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명월관(明月館)

難勝 2011. 1. 10. 06:08

 

 

 

명월관(明月館)

 

대한제국 당시 기생관으로 유명했던 집은 구한말에 궁내부(宮內府)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으면서 어선(御膳)과 향연을 맡아 궁중요리를 하던 안순환(安淳煥)이 1909년에 지은 명월관이다.

 

황토현, 지금의 세종로 동아일보사 자리에 있었는데 회색빛 2층 양옥이었다. 2층에는 귀빈석, 하층에는 일반객을 받았으며, 매실이란 특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귀빈 중의 귀빈에게 제공되었다. 하층은 온돌이었고 2층은 양탄자와 돗자리를 깔았다. 명월관을 개업한 안순환(安淳煥)은 궁중요리를 일반에게 공개했으며 술은 궁중내인이 빚었기 때문에 성황이 일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그 해에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어전에서 가무를 행하던 궁중기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으나, 초기에는 대한제국의 고관과 친일파 거물들이 나타났으며, 후기에는 문인 언론인등이 드나들었고 외국에서 잠입한 애국지사의 밀담장소가 되기도 했다.

초기의 귀빈들로는 의친왕 이강(李堈)공을 비롯 민병석, 윤태경, 박영효, 민영찬, 조남승, 구용산, 그리고 친일파 거두로 이완용, 송병준, 이지용 등과 화가 김용진도 드나들었다. 1930년을 전후해서는 문인 · 언론인 등이 드나들었으니 최남선, 변영로, 이광수, 방인근, 김억, 김동인, 윤백남, 안석영, 이상범, 노수현, 김팔봉, 최독견, 주요한, 이관구 등이며 박동화는 천향원에 자주 드나들었고 명월관엔 가끔 출입했다고 한다.

진주 기생으로 명월관에 드나들던 산홍에게 친일파 이모가 당시 거금 1만원을 주고 소실로 삼으려 하였으나 산홍은 돈을 보고 「기생에게 줄 돈 있으면 나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하고 단호히 거절했으며, 춘외춘은 남산 경무총감부에 불려가서 경무총감으로부터 배일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달라면서 돈 한뭉치 주는 것을 뿌리친 일이 있었다.

 

또, 그림과 서예에도 능했던 주옥경(기명 산월)은 의암 손병희가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 주위에 방을 구할 수 없어 형무소 담 밑에 있는 초가 한칸을 빌려 음식을 차입했다. 하루는 일본인이 주옥경에게 찾아와 의암선생이 졸도했으니 모셔가라고 해서 달려갔을 때 조금 의식을 회복하자 도로 감방에 수감했다고 한다. 주옥경은 다동기생조합 제1대 번수를 지낸 서도 출신이며, 1967년 정부에서 의암선생에게 드린 건국공로훈장을 대신 받았다. 당시 명월관에서 의암선생의 부름을 받고 평생을 의암 선생을 위해 살았다.

 

또, 명월관에 나가던 남도 출신 현산옥의 집에 상해에서 잠입한 애국지사가 은신하고 있었다. 명월관 인력거꾼이 현산옥의 집에 쪽지를 전했는데 미행한 일본 형사가 무슨 쪽지냐는 질문에 문밖놀이에 나오라는 기별쪽지라고 인력거꾼과 같은 대답을 했으나 믿지않고 방문을 열었을 때 현산옥 어머니와 같은 이불 속에 누운 지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당시 인력거꾼은 고학생이 많았고 이들 중엔 애국지사의 연락역을 맡은 사람이 많았다. 당시 인력거를 타고 가던 기생이 인력거꾼이 고학생인 줄 눈치채고 돈을 주고 걸어갔다는 이야기는 기생의 애국충정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또, 식도원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과 친일파 박춘금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는데 박춘금이 육혈포를 인촌선생에게 겨누자 그 자리에 있던 기생들은 재빠르게 인촌선생 주위를 둘러 막아서는 바람에 박춘금은 총을 거두었다. 이날 인촌선생은 기생중 대표격인 이연행을 자택으로 불러 부인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했다고 하며 최홍련은 상해로 , 현계옥은 상해를 거쳐 시베리아로 망명했다.

이 무렵 서울의 대표적인 관은 명월관, 국일관, 식도원이 손꼽혔으며 그밖에 봉천관, 영흥관, 혜천관, 세심관, 장춘관 등이 있었고 일본인이 사는 남촌에 백수화일, 천대본 등 일본식 요리집도 생겨났다.

당시 명월관은 주로 유명인사가 출입했으며, 국일관은 상업하는 신흥부호, 식도원은 일본인과 관공리들이 드나들었다.

1918년경에 명월관이 소실된 뒤 순화관(현 종로구 인사동 194)에 명월관 분점격인 태화관(太華館)을 차렸다가 뒤에 태화관(泰和館)으로 개명했다. 이 태화관은 기미독립선언 때 33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하연을 베푼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본관 간판은 장춘관으로 옮겨졌지만 명월관을 경영하던 안순환이 경영했기 때문에 명월관에 모였던 명기들이 그대로 모여 전처럼 번창했다. 궁정양악대 출신들이 시중에 불려나와 우미관양악대와 단성사양악대를 꾸며 태화관에 등장하기도 했다.

출처 : 원주불교대학 제7기
글쓴이 : 다루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