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金剛經) 강의(8)
6. 正信希有分
須菩提白佛言 世尊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佛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生淨信者 須菩提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得如是無量福德 何以故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則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則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說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해석:바른 믿음의 숭고하다(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참다운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하여서는 안 된다. 여래가 입멸한 후 오백 년이 지난 뒤에도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글귀를 보고 능히 신심을 내고 진실로 깨닫게 될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한 분의 부처님, 두 분의 부처님, 세 분, 네 분의 부처님에게만 귀의하여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귀의하여 여러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일념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는 다함 없는 지견으로써 모든 중생이 이와 같은 무량 복덕을 얻은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에게는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없으며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지도 않고, 마음의 대상 없음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 모든 중생이 형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다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며 만약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마음의 대상 없음에도 집착하게 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항상 '여러 제자들이여, 나의 설법은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라고 설한 것이다.
강설(講說):바른 믿음의 숭고하다(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정신(正信)은 바른 믿음입니다. 신(信)이란 사람의 말이며, 희유(希有)는 “드물게 있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세(人間世)에서는 언제고 “바른 믿음”은 희유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말세론적 색체를 띠고 있습니다. 불법이 날이 갈수록, 인간의 역사가 진행될수록 쇠퇴하리라는 것은 초기불교승가의 믿음중의 하나였습니다.
본문:須菩提白佛言 世尊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해석(解釋):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참다운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이제까지 말씀하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수보리존자가 문제를 제기합니다. "형상 있는 것은(凡所有相) 모두 허망하다.(皆是虛妄) 부처님께서는 무릇 모든 상(相)이 있는 것은 허망한 것 일뿐, 꿈속에서라도 부처를 보거나, 혹은 진짜 부처가 구름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면 그것은 마구니 경계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부처가 아닙니다. 모든 형상이 실체가 없다고 보면(若見諸相非相) 곧 여래를 보느니라(卽見如來)" 까지의 법문을 듣고 육신 본위로만 사는 우리 중생들이 육신이 내가 아니라는 그 법문을 얼른 알아듣고 믿음을 낼 수 있겠느냐는 물음입니다.
파유중생(頗有衆生)에 파(頗)는 자못 파자인데 행여나, 진정 그런 중생이 있겠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득문여시언설장구(得聞如是言說章句)는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이와 같은 말과 글을 듣고 나서”란 뜻이니, “언설장구”는 곧 경문(經文)을 가리키며 말과 글을 가르키는데 말이 세련(洗練)되면 그것이 글이고, 글이 서투른 것이 말이어서 마치 시와 소설이 다르듯이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가 됐을 때 부처님이 이런 연설이나 이런 글자를 보고 이 금강경을 읽어보고 천독만독(千讀萬讀) 자꾸 읽어서라도 “그것이 참말이구나”하고 “실다운 믿음을 내는 중생들이 정말 있을까.”(生實信不)하는 의심을 냈습니다. “부처님 말씀이 참말로 가치가 있는 진리의 실재 내용이 있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구나 하고 그런 신심을 낼 사람이 있겠습니까.?”하고 부처님께 의문을 여쭈었습니다.
본문:佛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해석(解釋):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하여서는 안 된다. 여래가 열반에 드신 후 오백 년이 지난 뒤에도 계를 잘 지키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경을 보고 능히 신심을 낼 것이며, 진실로 깨닫게 될 것이다.
강설(講說):일체의 상이 없으며, 상에 집착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부처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보리존자의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莫作是說) 부처님이 열반(佛滅)한 뒤에 부처님이 육신의 몸뚱이를 버리고 열반적멸(涅槃寂滅)의 부처님 세계에 멸도(滅度)하신 뒤에(如來滅後) 오백년 뒤 그 때에도(後五百歲) 계를 잘 받아서 목숨처럼 지키어 큰복을 짓는 갸륵한 수행자가 있어서(有持戒修福者) 이 금강경의 이런 거룩한 법문을 듣든지 읽어보고 육조대사(六祖大師)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하라는 법문 듣고 깨치듯이 "참 그렇겠구나"하는 신심(信心)을 낼 것입니다.(於此章句 能生信心). 그리고 "아 참말로 진실한 말이구나 이런 내용 이런 말씀이었구나.. 그것은 정말 한 말 한 글자도 거짓말이 없구나" 하고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후오백세(後五百歲)란 말은 오백년을 단위로 하여 제오백세는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오백년까지를 가리키고, 제이 오백세는 부처님 가신 뒤 오백년에서부터 천년까지를 가리키고, 제삼 오백세는 천오백년까지, 제사 오백세는 부처님 멸도(滅度)하신 뒤 이천년까지, 제오 오백세는 불멸(佛滅) 이천 일년부터 이천 오백년까지에 해당합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셨던 시대를 정법시대(正法時代)-500년 교(敎)-가르침, 행(行)-수행, 증(證)-깨달음이 구비된 시대이고,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이후를 상법시대(像法時代)-불상과 불경이 있는 시기(500년)-교(敎)-가르침, 행(行)-수행만 있고 증(證)은 결여된 시대를 말하며, 말법시대(末法時代)-불경이 없어지고 미신만 있는 시기(1000년이후) 교(敎)만 있는 시대를 말합니다.
무량대복(無量大福)을 지으려는 수행인이라면 계를 바로 지키지 않고서는 큰복을 성취할 도리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계(持戒)하고 수계(守誡)하며 복보를 닦아, 복보를 성취한 후 비로소 무상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총명하게 태어나는 것도 일체의 선행과 공덕을 닦아야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 누적되고 거기다 악을 행하지 않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는 수복이 더해질 때, 비로소 진정한 대복보인 대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열반에 드신후에 지계와 복을 닦는자는 오백년후에도 이 경을 보고 능히 신심을 낼 것이며, 진실로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오백년 후를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말하자면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발전합니다. 그러나 인문이나 도덕, 정신은 시대가 갈수록 타락하고 퇴보합니다. 우리가 현대 시대의 진보를 말하는 것은 물질문명이 발달한 것을 말합니다. 불법은 인문적 관점에서 시대를 보고 있습니다. 오백년이 지나면 사람은 지혜는 더욱 낮아져, 말법시대에 이르면 사람의 경우 12세에 아이를 낳고, 두뇌가 비상하게 발달하는 반면 손발은 갈수록 작아진다고 합니다. 지극히 총명하나 지혜가 없고, 재난 질병이 수시로 존재하는 것이 말법의 시대입니다. 말법시대에 어떤 사람이 선을 행해서 복을 닦으며 신심으로 금강경에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느니라. 모든 형상이 실체가 없다고 보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을 안다면 그것은 반야의 지혜를 얻은 것입니다.
일반인이 종교를 믿을 때 모든 사람들은 형식을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바라며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공양미 한 봉지, 향 한통, 불전금 천원을 넣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요구를 하는지 모릅니다. 절을 한 후 머리를 숙이고 기원하기를 남편을 잘 보호하사 사업이 번창하고, 건강하게 해 주시고, 자식들 공부 잘 해서 대학 진학하게 해주시고, 가정이 평안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자신이 부처나 보살이라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흥! 이 보살 욕심이 대개 많군. 돈을 쬐금 내 놓고 일체가 원만하게 해 달라고 하니, 만약 그렇게 안되면 나 더러 영험이 없다고 하겠지. 여러분이 보살이고 부처라면 어떻게 모든 사람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까?
그래서 옛 시에 하늘도 참으로 해 먹기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도 해 먹기 어려운 사월이라 주천난주사월천(做天難做四月天)
누에는 온기를 보리는 냉기를 바라고 잠요온화맥요한(蠶要溫和麥要寒)
길손은 맑기를 농부를 비오기를 바라며 출문망청농망우(出門望晴農望雨)
뽕잎 따는 아가씨는 날씨가 흐리길 바라노니. 채상낭자망음천(採桑娘子望陰天)
두 사람이 소송을 벌이는데 두 사람 모두 향을 피워 놓고 도와 달라고 빕니다. 이기게 해 달라고 두 사람이 매달렸을 때 하느님과 부처님은 어떻게 할까요? 불전을 누가 많이 내는지? 돼지 대가리를 누가 큰 것을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는지 천지신명님은 보고 결정을 할까요? 이것은 모두 종교의식 일뿐입니다. 심리학적으로는 본다면 참으로 웃기는 일입니다. 현재 부처는 진리를 말합니다. 아주 평범하지만 믿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후세에 어떤 사람이 이 평범한 이치를 대도라 생각하고 믿는다는 사실을. 그러기 위해서는 대복보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소위 믿음이 생긴다는 것은 미신이 아니라 이성으로 믿는 바른 믿음입니다. 이것을 실재의 진리라 생각합니다.(以此爲實)
지계수복자(持戒修福者) 곧 “계 지니고 복을 닦는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선 먹을 것 다 먹어서 말하자면 고기를 먹는다, 파, 마늘 먹는다 하면 영양 있고 자극성식물(刺戟性食物)이고 양기를 돕기 때문에 비구나 비구니가 혼자 살 수 없게 됩니다. 동시에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항상 환경에 주의하고 계율에 맞추어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를 지키고 복을 닦아야 큰복을 닦을 수 있지 계를 지키지 않고는 번뇌 망상에 끄달리게 되, 탐진치 삼독으로 사는 중생놀음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므로 큰복을 지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계를 안 지키고도 복을 지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계를 가지고 짓는 복에 비교해 볼 수가 없는 작은 복입니다. 이런 지계수복자(持戒修福者)가 금강경의 이런 구절을 읽어보고서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 行於布施)이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같은 구절을 읽어보고서(於此章句) 능히 신심을 내어 "참말로 진실한 진리였구나. 한 글자 한 마디도 진리 아닌 것이 없구나"하고 깨달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能生信心以此爲實)
본문: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生淨信者
해석(解釋):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한 분의 부처님, 두 분의 부처님, 세 분, 네 분의 부처님에게만 귀의하여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귀의하여 여러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일념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강설(講說):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당지시인(當知是人)하라,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장래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아 두라.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저 한 부처님이나 두 명의 부처님이나 세 명의 부처, 네 명의 부처, 다섯 명의 부처님이 출현(出現)하실 때마다 태어나서 이종선근(而種善根)이라. 예배도 하고 참선도 하고 부처님께 법도 묻고 같이 공부도 많이 해서 착한 선(善)을 많이 심었을 뿐이 아니라.” 착한 일 하는 것은 착한 뿌리가 되고 악한 일 하는 것도 뿌리가 된다는 말은 하나의 바탕이 되고 습관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한 부처님께만 뵈옵고 따라 배우면서 하나도 빼지 않고 듣고 그걸 다 기억하면 전능만능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한 부처님만 친견하고 신행(信行)하기도 어려운 일 인데 한 다섯 부처님을 이 세상에서 만났다면 그건 참 큰 복 지은 사람입니다. 다섯 부처님한테만 이런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한두 부처님 계신 데서가 아니라 이미 오랜 과거세(過去歲)부터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계신 곳에 가서(已於無量千萬佛所) 그 많은 부처님 앞에 참회를 하고 부처님 가르쳐 주시는 대로 목숨 내 놓고 철저히 좋은 수행을 했습니다(種諸善根). 부처님 직접 만나 놓으면 얼마나 신심이 나겠는가? 휘발유가 불을 만난 것처럼 우리의 마음바탕이 그만 환하게 드러납니다. 후 오백세(後五百歲)에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많은 부처님 앞에서 많은 선근(善根)을 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천 오백년이나 지난 말세에도 어려운 불법을 듣고 “그게 참말이구나.”하고 바른 신심을 내어 바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문시장구 내지일념 생정신자(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니라.” 금강경 가운데 어떤 구절을 듣든지 한 생각이라도 청정한 신심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바로 믿는다는 정신(淨信)은 깨끗한 신심을 낸다는 말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상은 허망한 것으로,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본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한 순간에 깨끗한 믿음(淨信)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정신(正信)이 아니라 깨끗한 믿음(淨信)입니다. 깨끗하고 변화무쌍하나 어떤 망념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생애를 깨끗한 믿음으로 일관 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깨달은 사람이요, 이미 진정으로 아무 것에도 머물지 않은 경계에 이른 사람입니다. 금강경(金剛經)은 시작부터 머무는 바가 없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머무름이 없는 것이 바로 한 한 생각도 일지 않아 전체가 드러나는 경계다.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깨끗한 믿음입니다.
본문:須菩提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得如是無量福德
해석(解釋):수보리여, 여래는 다함 없는 지견으로써 모든 중생이 이와 같은 무량 복덕을 얻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강설(講說):수보리야 여래께서는 신령한 마음을 눈으로 다 아시고 다 보시느니라(如來悉知悉見). 이런 중생들이 곧 다생(多生)으로 부처님 처소(處所)에 인연을 맺어서 이 금강경의 네 글귀를 듣고 청정한 신심을 내는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이 모든 중생들이 곧 말세에 가도 이런 사람이 한 두 사람 있는 것이 아니고 선근중생(善根衆生)들이 인연 있는 곳에 태어나 불법을 받아 지니고 거룩한 신행을 닦는 중생들이 많은데 이와 같은 중생들이(是諸衆生) 무량한 복덕을 얻는 것을(得如是無量福德) 여래께서 다 아십니다. 금생에 이 중생이 죽어서 어디로 가고 내생에 공부를 많이 하여 그 후세에 가서는 어떻게 과보(果報)를 받는지 그걸 부처님은 낱낱이 다 아십니다. 내생에는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서 글을 어디서 배우고 어떤 스님을 만나 출가(出家)하고 어디서 발심하여 어떻게 수행한다는 것을 활동사진 필름 들여다보는 것처럼 환히 듣고 보고하시는 데, 그것은 부처님은 사차원, 천차원(千次元), 만차원(萬次元), 무한차원(無限次元)의 세계에 들어가서 시간공간을 자유자재하게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일일이 지나온 일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본인보다 더 잘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여! 나는 모두 알고 있다. 나 역시 직접 이런 사람을 보았다. 그 자리에서 이미 무상의 복덕을 얻어버린 사람을 보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리를 증득하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는 것을 안다. 지혜의 성취에 이르기는 더욱 어렵다.”
본문: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해석(解釋):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에게는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없으며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지도 않고, 마음의 대상 없음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설(講說):인생의 일체 고통과 번뇌는 모두 사상(四相)으로부터 옵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사상이란 네가지 관념입니다. 우리는 나라는 생각이 아주 강합니다. 이 모든 중생들이 아(我)가 있어서 나라는 생각, 곧 아상(我相) 육체가 나거니 하는 그런 망상인데 이 생각이 앞서 가지고 제가 잘났다는 것이고 육신인 나 본위로 모든 것을 내세워서 남한테 안 지려고 싸우고 얼굴 붉힙니다. 아상을 떨쳐버릴 수 있다면 거의 다 된 것입니다. 아상을 떨쳐버리면 당연히 무상(無相)으로 일체가 평등합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이며, 천하 남녀가 부모이며, 천하 사람이 내 가족입니다. 이렇게 가능한 것은 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상이 없으니 인상이 없고, 인상이 없으니 자연 중생상이 없어 평등합니다. 그리고 수자상이 없으니 오래 사나 짧게 사나 마찬가지입니다.
금강경을 아는 사람은 아상이 없어서 내가 잘났다는 생각이 없고 동시에 남을 멸시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라는 생각이 붙어 있으면 무엇이든 조건이 있게 됩니다. “난 잘 산다, 나는 가난하다, 난 기독교다, 난 불교다.”라는 생각을 하면 아상입니다. 그런데 이천 오백년 뒤에 금강경의 사구게에 발심한 이런 중생들은 아상도 없고 또 인상(人相)도 객관도 없습니다. 인상은 남이라는 소리도 되지만, 사회환경 전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 육체가 나인데 육체 밖에 객관을 인정하는 것이 인상입니다. 중생상(衆生相)은 "시집가서 잘 살아야겠다. 자식 공부 잘 시키고 돈도 벌어야겠다."하는 것이 중생상(衆生相)이니 곧 살림살입니다. 또 중생들은 금방 죽는 건 생각 안 하고 죽게 되면 다 끝날 것인데 공연히 그 사람과 감정을 맺고 내가 공연히 마음 안 좋게 해주었구나 이런 것이 모두 죽을 때 후회가 됩니다. 그러니 그거 천년 만년 살 줄 알고 생각하는 것, 오래 살려고 좋은 약이 있으면 그걸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수자상(壽者相)입니다.
이런 법문(法門)을 처음 듣고 비로써 "아 진리가 이런 것이구나, 내가 이런 법문 이제야 만났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법상(法相)입니다. 그런 건 진리가 아니고 불법(佛法)만이 정법(正法)이니까 그것만 지켜야겠다는 마음도 없고 불법 믿는다는 생각도 없는 것 그것을 무법상(無法相)이라 합니다. 무릇 모든 상(相)은 허망한 것으로, 일체 상에 집착하지 않고 모두 놓아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법상이 없는 것입니다. 비법상(非法相)이란 것은 "잘못된 법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법이라고 지키려는 법이 아닙니다" "법이 없는 게 참말 법이구나 하는 생각"이라고도 하는데 그러니 또한 법 아닌 것, 잘못 생각하는 것도 그릇된 법이라는 생각도 없는 것을 무비법상(無非法相)이라고 합니다. “법 아닌 것도 없는 것” 달리 말하면 일체가 모두 “~이 아니요”, 일체가 역시 “~입니다”
능엄경(楞嚴經)에 “부처는 일체의 상을 떠나되, 일체의 법에 있다.”고 했습니다.(離一切相, 卽一切法) “일체의 법에 즉하는” 것은 바로 “무법상(無法相)”해석한 것이고, “일체의 상을 떠나는” 것은 또 “역무비법상”을 해석한 것입니다. “일체의 상을 떠나되 일체의 법에 즉한다”는 것은 공(空)이 아니라 “모든 것이 허망하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입니다.
후오백세에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금강경의 네 글귀를 듣고 깨끗한 신심을 낸 사람은 이렇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이 네 상(四相)과 "법이란 생각"(法相) "그릇된 법이란 생각"(非法相)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는 복덕을 짓는다는 뜻입니다.
본문: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則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則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해석(解釋):만약 이 모든 중생이 형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다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며, 만약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마음의 대상 없음에도 집착하게 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도 말고, 법이 아닌 것을 취하지도 말아야 합니다.-법(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강설(講說):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왜 그런가? 우리가 심리적으로 상(相)에 집착해 불법을 배운다면 오늘은 향을 피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절을 꼭 해야 된다는 것은 상에 집착한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마음속에 있는 부처에 대한 신앙은 모두 상에 집착한 것입니다. 바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한 하게 될 것입니다. 상에 집착하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약 마음의 대상 없음에도 집착하게 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空)이라 말하면 옳지 않습니다.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유(有)에 집착하는 것도 불법이 아닙니다. “비공비유(非空非有)” 또한 옳지 않다. “즉공즉유(卽空卽有)” 또한 불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불법은 능단금강반야바라밀(能斷金剛般若波羅密)입니다. 도를 깨치기 위해서는 진정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선종의 고사에 사형(師兄)사제(師弟)간인 두 선사는 모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느 날 두 스님은 행각을 떠나는데 삽을 하나씩 들고 다녔습니다. 감자 한덩이를 가지고 다니다가 적당한 장소에 네 조각을 심으면 오래지 않아 감자가 자라 먹을 수 있어 좋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죽은 시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한 사람은 아미타불하면서 땅에 파 뭏어 주고 가는데 한 스님은 아무렇지 않게 전혀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두 스님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데 태도가 전혀 딴판이냐고 물으며 어느 쪽이 옳은지 여쭈었습니다. 그렇더니 스님 왈, “묻는 것은 자비요. 묻지 않은 것은 해탈이라오. 사람이 죽으면 마침내 흙이 된다오. 그러니 위에서 흙이 되나 아래에서 흙이 되나 뭐 다를 게 있겠소? 이 때문에 묻은 것은 자비요, 묻지 않은 것은 해탈이라 한 것이오.”
이 말은 금강경(金剛經)에 “머무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應無所住)” “법을 취해서는 안 된다.(不應取法)입니다.” 하나의 불법을 붙들고 수행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에 떨어집니다. 더욱이 “법이 아닌 것을 취해서도 안 됩니다.(不應取非法)”
근본적으로 마음에 지킬 것이 있다면, 모든 중생들이 마음 가운데 무언가 하나 고집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마음에 간직하는 게 있다면(若心取相) 아상, 곧 나라는 생각에 끄달리게 되고 따라서 사상에 끄달리게 되는 까닭이니, 그렇게 되면 사상이 따라오게 되므로 중생을 면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금강경의 이런 글귀를 듣고 보더라도 청정한 신심을 낼 수 없습니다. 사상이 다 없어져서 조건 없는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으로 중생을 위해 봉사해야만 한량없는 복만 짓고 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집착이 있고 선택이 있으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걸려서 결국은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생사의 굴레를 뒤집어쓴 중생에 떨어지며, 그러다 보면 지옥(地獄) . 아귀(餓鬼) . 축생(畜生)의 삼악도(三惡道)에 들어가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卽着我人衆生壽者).
본문:以是義故 如來常說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해석(解釋):그러므로 여래는 항상 '여러 제자들이여, 나의 설법은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라고 설한 것이다.
강설(講說):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평소에 그대들에게 가르쳐 왔건만 (以是義故 如來常說) 그대들 나와 함께 출가한 천이백사람은(汝等比丘), 내 설법이 강을 건너는 배와 같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知我說法 如筏喩者) 이런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以是義故) 여래가 항상 말하기를(如來常設) "너희들 비구, 비구니나 선남선녀는(汝等比丘) 내가 설명한 법은(知我說法) 뗏목에 비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줄을 알아야 한다(如筏喩者)"고 하셨는데 이것은 불법도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고 불법 자체가 인생의 목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체의 진정한 불법도 최후에는 강을 건넌 배처럼 버려야 하거늘(法尙應捨) 하물며 법이 아닌 일체의 것이겠는가?(何況非法) 바른 법이라도 최후에 깨끗이 버리지 않으면 도를 이룰 수 없습니다.
벌(筏)이란 나무를 묶어 배를 건너는 데 사용하는 뗏목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모두 방편적인 것입니다. 모두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강물 건너는데 떼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큰 나무를 연쇄적으로 연결을 시켜서 떼를 만들어 가지고 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쇠로 좋게 만든 요사이의 큰배에 비유해도 좋고 군함이나 큰 기선으로 봐도 됩니다. 하여간 강은 그 폭이 넓어서 헤엄쳐 건너갈 수 없고 꼭 건너는 가야겠고 하니 배를 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는 강을 다 건너고 나서까지 배를 짊어지고 육지를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가 아무리 고마와도 강 건너 저 언덕에 왔으면 배를 버리고 가야 합니다. 배타는 게 목적이 아니고 강을 건너는 것이 목적이고 집에 가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서너 살 먹은 아기를 앉혀 놓고 밝은 달밤에 “저 달 좀 봐라”하며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보이면 어린아이들은 달을 보지 못하고 엄마 손가락만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사십구년 설법은 네 마음 깨치라고 목이 터져라 하고 일러 줬는데도 그 목소리만 따라 다니며 “아, 깨쳐라, 그 소리구나!” 그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말에 끌려 다니는 것이 마치 소가 코에 끌려 산이나 들이나 끄는 대로 가듯이 말에 끌려 다니기만 하니 한심한 노릇입니다. 이 자식 저 달을 볼 것이지 왜 내 손가락만 쳐다보느냐고 때려 줘봐야 울기만 하지 달을 볼 생각은 못 냅니다. 엿을 주며 달래 봐도 “저기 저기” 하는 소리밖엔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을 말로 가리킨 그것, 곧 팔만대장경에 있는 불법도 역시 남겨 두어 후손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자기는 이미 깨쳤다 해도 후대에 모르는 사람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경에서 실제로 깨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전의 말과 글은 달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을 하는 정도일 뿐, 실제의 달 자체는 아니며,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고 경이고 법일 뿐, 저 언덕의 목적지는 마음을 깨치는 데 있습니다.
불법인 정법도 버려야 하는데(法尙應捨) 어찌 하물며 법 아닌 것, 무당 법, 삿된 법, 그릇된 법 그걸 의지해서 점을 친다든지 관상보고 사주보고 손금보고 하는 사람이 무슨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이 세상은 모두 허무한 존재이고 하나의 물거품이고 이것이 꿈인데 이것을 어찌 참말이라 하고 육신이 나라고 고집하겠느냐(何況非法).
이와 같은 그릇된 법, 불법이 아닌 법들은 마땅히 다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육체는 죽어 있고 살아 있다면 마음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확실히 나라고 그렇게 믿고 있는 일반적인 중생들은 입은 옷을 주지 않으면 네 목숨을 죽이겠다고 위협 당했을 때, 아무리 대낮이라도 종로 네거리에서 옷을 훌쩍 벗어 주며, 반대로 몸뚱이가 내가 아닌 걸 확실히 아는 사람은 몸뚱이 벗어라 하면 몸뚱이 내버리고 마음만 갈 것입니다. 옷 벗어버리듯 하게 됩니다. 이럴 때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법이고 몸뚱이는 옷이고 마음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법(正法)인데 마음을 깨치고 나면 이 두 가지를 다 버려야 합니다. 대승불법은 계를 지킬 필요도 없고 고기도 막 먹고 술도 계집질도 보리반야에 방해되지 않으니 삼가 할 것도 없다는 막행막식주의(莫行莫食主義)의 그릇된 생각은 비법(非法)이고 계를 지키고 음행도 술도 하지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서 육신이 내가 아니라 마음이 나라는 진리를 체득하고 깨달음을 성취해야겠다는 생각은 정법인데, 우리가 마음을 일단 깨치고 나서는 계를 지니고 마음을 닦겠다는 정법도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아무렇게나 막행막식해도 관계없다는 그릇된 법은 더 말해 볼 것도 없이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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