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弘忍) 선사에게는 언제나 많은 제자들이 모여 선(禪)에 참여했습니다. 어느 날 홍인선사는 제자들에게, "누군가에게 내 선법(禪法)을 물려주려고 해. 누구라도 좋아. 자기가 깨달은 심경(心境)을 노래로 읊어봐. 선의 진수를 깨달은 사람에게 물려주겠다." 하고 말했습니다.
당시에 홍인의 제자들은 700명을 헤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선뜻 노래를 읊으러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때 손꼽히는 제자 중에 신수(神秀:706년 입적)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문에도 정통하여 스승의 대리를 맡은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그가 노래를 읊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는 자기가 깨친 심경을 노래로 읊어, 스승이 지나다니는 복도에 붙여 놓았습니다.
身是菩堤樹(몸은 보리수)
心如明鏡台(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다)
時時勤拂拭(언제나 부지런히 닦고 훔쳐서)
莫使惹塵埃(먼지가 끼지 않게 한다)
이것은 좀더 자세히 풀이하면 몸은 득도한 보리수와 같고 마음은 깨끗하여 맑은 거울과 같으므로 언제나 더러워지지 않도록 닦고 훔쳐서 번뇌의 먼지나 티끌이 끼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수는 이처럼 수행의 중요성을 4행 20자로 노래했습니다. 사실 그는 이처럼 노력한 사람입니다. 이 수행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츄타판타카는 형과 함께 석존의 제자입니다. 형은 대단히 총명했는데 동생은 매우 어리석었기 때문에 "바보"라고 불리워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는 한동안 교단에서 추방되었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석존으로부터 "먼지와 티끌을 닦고 훔치라"는 가르침을 받고,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을 철저히 실행하여 오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도구를 가지고 청소한 것이 아니라, 청소 자체가 되어 여기에 동화하여 비로소 가능했던 것입니다. 눈썹에 붙은 하나의 먼지를 터는 것이 자기 마음 속의 먼지를 터는 일입니다. 흐트러진 신발을 정돈하는 것이 자기 마음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도가(道歌)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쓸면 또 다시 쌓이는 뜰 안의 낙엽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아라
아무리 정교한 청소 도구를 사용해도 먼지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쓸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환경도 사람의 마음도 영원히 계속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영원히 청소를 계속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영원한 더러움과 영원한 청소가 대결하여 비로소 청정(淸淨)의 경지가 개발되는 것입니다. 선(禪)에서는 이와 같은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여기에 신수의 선풍(禪風)이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신수의 노래를 들은 홍인 선사의 제자들은 저마다 그를 찬양했습니다. 사실 홍인 선사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전해들은 혜능(慧能)은,
"신수의 노래는 진실을 표현하고 있으나 아직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비평했습니다. 그러나 무식한 사람이 선심(禪心)을 알 리가 없다고 아무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날 밤에, 자기의 심경을 다른 사람에게 노래로 쓰게 하여 신수의 노래 옆에 붙였습니다.
菩提本無樹(보리수는 본래 없고)
明鏡亦非台(밝은 거울도 있을 수 없다)
本來無一物(본래 아무것도 없으니)
何處惹塵埃(어디서 먼지를 닦겠는가)
좀더 자세히 풀이하면, "보리수라는 나무도 없고, 밝은 거울 같은 것도 없고,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먼지가 묻을 데도 없으니 털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홍인 선사의 문하생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선(禪)의 절대성을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홍인 선사는 이것을 보고 "아직도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홍인의 정통적인 선법(禪法)이 혜능에게 전해졌던 것입니다. 후에 혜능의 선풍(禪風)이 남방(南方)에서 성하였으므로 "남종선(南宗禪)"이라고 부르고, 신수의 선풍이 북방에서 성하였으므로 "북종선(北宗禪)"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두 도가(道歌)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북종선은 수행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므로, "점오(漸悟)"라고 부르고, 혜능의 남종선을 "돈오(頓悟)"라고 부릅니다. 수행을 쌓고 나서 다시 하나의 비약이 필요한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수와 혜능은 홍인 선사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선(禪) 자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수행의 필요를 두 사람 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대응시키고, 미망과 오도를 적대시하고, 먼지와 불식을 구별하는 상대적인 인식을 보다 높은 차원의 관점에서 "본래 아무것도 없다(本來無一物)"라고 부정(否定)한 것입니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순수한 인간성의 원점(原點)에서의 인식입니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실감은 더욱 깊어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경지에 도달하려면 실제로는 차곡차곡 수행하는 신수(神秀)의 과정을 거쳐서 도달한 정점에서 다시 비약하여 혜능(慧能)의 선심(禪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선자(禪者)는 수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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