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극락과 지옥 - 법타스님

難勝 2009. 10. 24. 04:31

사람들의 궁금증 중에는 극락과 지옥의 실재 여부가 큰 관심거리다.
"스님! 극락과 지옥은 정말 있습니까? 진짜 있다면 불교를 믿지요."
이런 유형의 물음은 모든 성직자들이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극락과 지옥의 개념은 종교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르다.
유신교(기독교)의 경우에는 주재신(主宰神) 의하여 천당과 지옥의 길이 전개된다. 이원론(二元論)적이거나 흑백이론(黑白論理)에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렇지만 불교는 이 두 극단에 머물지는 않는다. 사람의 행위(業)에 따른 결과에 의해 여섯 가지의 길로 윤회전생(輪廻轉生)한다고 본다. 복덕(福德)을 가장 많이 지으면 극락에 가고, 그 복덕이 다하면 다시 윤회한다.
윤회의 육도(六道)는 천(天),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순이다. 가장 좋은 세계가 천(天)― 극락이며, 가장 나쁘고 악한 세계가 지옥이다. 이 여섯 갈래의 길을 인간은 영원히 쳇바퀴 돌 듯 윤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 영원한 즐거움을 얻는 것을 열반(Nirvana), 극락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천당과는 개념이 다른 자기 스스로의 과보(果報)로 얻는 완벽한 이상향(理想鄕)을 말한다.
이 세계는 그렇게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다. 설사 이 지구와 별개라 할 지라도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 세계를 오가고 있다. 이는 그 세계가 우주 어느 한 곳에 존재한다기보다는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볼 때 극락의 유무를 따지는 사람은 얄팍한 사행심으로 가득한 욕심꾸러기, 눈치꾼일지도 모른다.


중국 당(唐)나라에 한 장군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생명을 걸고 국가를 위해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항상 희생된 망령들의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다. 인도 아쇼카 대왕의 고민쯤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극락, 천당에는 못 갈 것 같고, 항상 지옥의 모습만이 눈에 선했다.
고심 끝에 도력이 높다는 어느 스님을 찾았다.
"스님! 극락과 지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묵묵부답.
다시 물었다.
"스님! 극락과 지옥을 진짜 있어서 있다고 합니까?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겁니까?"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장군은 두 마음을 다 가졌군." 심하게 꾸짖었다.
장군은 참을 수 없는 질책에 모욕감과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올랐다.
"이 늙은 중이 천하 대장군인 나를 멸시하는군. 살려 둘 수 없다."
칼을 빼어 스님을 내리쳤다. 목이 댕강 날아갔을까?
그러나 순간, 스님은 몸을 잽싸게 날려 법당 앞에 바람처럼 서 있었다.
"장군! 방금 그 마음이 바로 지옥일세."
장군은 자기의 경거망동을 크게 뉘우치며 머리를 조아렸다.
"스님! 죄송합니다."
"억! 장군, 지금의 이 마음은 바로 극락이라네."


짜릿한 할[喝]의 여운이 장군의 가슴을 찔렀다. 어느덧 가슴을 짓누르던 마음속의 시커먼 먹구름은 청천백일(靑天白日)처럼 말갛게 벗겨지고, 참회와 환희의 눈물만이 샘솟고 있었다.

마음이 즐겁고 모든 것을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생각 할 때, 극락과 천당은 그곳에 있음이요. 욕심으로 괴롭고, 아플 때 지옥은 그곳에 펼쳐질 것인 저. 이는 분명 마음은 극락과 지옥을 가르고 세계를 만드는 주인공이며, 창조주의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리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