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음 인물 중 부처님의 친족이며 부처님의 십대제자중 다문제일(多聞第一)로 열반을 직도한 인물은?
① 아난 ② 가섭 ③ 라훌라 ④ 데바닷다
10대제자는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수승한 특징이 있는 큰 열 제자를 말합니다.
즉, 두타제일인 대가섭, 지혜제일인 사리불, 신통제일인 목건련, 논의제일인 가전연, 천안제일인 아나율, 설법제일인 부루나, 해공제일인 수보리, 다문제일인 아난, 계율제일인 우바리, 밀행제일인 라후라를 말하는데 이왕 문제가 나왔으니 예문의 인물을 자세히 언급해 보겠습니다.
1) 아난
석가모니부처님의 10 대제자중 일인이며 범어로 아난다(Ananda)를 음역한 이름입니다.
그뜻은 환희(歡喜),희경(喜慶)이라고 하며 석가모니부처님이 오십오세때, 아난을 선택하여 시중들게 했으며 당시 시자로서 이십오년간 따랐다고 합니다。이렇게 많은 시간을 시자로 보냄으로서 부처님의 한마디 한마디를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다하여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는 칭호를 들었고, 불타 입멸후 부처님의 말씀을 모으는 제일차 결집때 많은 불법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대가섭존자가 초조(初祖)에 봉하여졌는데 대가섭존자의 원적후에,아난존자가 이조(二祖)가 되어 불법을 전하였습니다.
아난다(阿難陀, Ananda)의 일대기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불리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다.데바닷다의 친동생으로, 8세에 출가해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잘생긴 얼굴 탓으로 여러 차례 여자들로부터 유혹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 바, 부처님 입멸 후 수행에 전력한 끝에 깨달음의 경지인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었다.언제나 부처님을 따라다닌 까닭에 부처님 법의 내용을 가장 많이 들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불렸으며, 부처님 입멸 후 마하가섭에 의해 경전이 결집되던 당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의 내용을 그대로 외워 경전을 결집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아난은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정반왕이 아난다(Ananda;기쁨,환희)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아난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룬 후 붓다가 되어 고향인 카필라 성으로 돌아왔을 때 출가한다.당시 그의 나이 8세 였지만 석가족의 자연스러운 출가 분위기에 따라 사촌들과 더불어 교단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그는 생김새가 굉장히 출중한 미남이었다. 이런 외모를 지닌 탓으로 많은 여인들로 부터 유혹을 받는다.이러한 아난에게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몇가지 일이 벌어진다.①부처님의 시자로서 그 인류의 스승이 열반에 들 때까지 보필한 일.②여인의 출가를 부처님께 간청하여 받아낸 일.③경전 결집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일. 가장 뛰어난 공적은 경전을 편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마하가섭이 주도한 경전편찬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부처님 말씀을 외워 보인 뒤 거기에 참가한 500나한들의 지지를 받고 정식으로 경을 성립시키는 주역으로 등장한다. 오늘날 경전의 첫머리에 상용구처럼 따라 다니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라는 말은 바로 아난이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그 말씀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그러나 그는 경전편집 과정에서 애초에 마하가섭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해 참가하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는 참담한 운명에 처한다. 그 후 아난이 번뇌를 모두 없앤 뒤 경전 편집에 참여 하였다.석가모니불의 십대제자상에서나 여러 후불탱화에서 아난은 머리를 단아하게 깍은 젊고 용모가 바른 비구의 모습으로 부처님 우측에 등장하고 있으며 마하가섭은 그 좌측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얼굴로 자리잡고 있다. 석굴암에서 아난은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 맨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다. 두 손은 단정히 깍지를 낀 채 가슴에 대고 있으며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는 젊은 비구로서 옷깃을 세운 미남형 비구의 모습이다. 갸름한 얼굴, 단아한 이목구비, 상큼한 미소에서 단박 아난존자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부처님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 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말씀인 교학을 유통시켰고, 상수제자 가섭 존자는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였다는 내용이다. 불교의 경전은 그 경전이 언제 결집이 되었든 모두가 아난 존자의 구술에 의하여 결집된 것으로 간주한다.
경전 발달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초기경전도 불멸 300년경에 비로소 문자로 편찬되었으며, 대승경전들은 불멸 5,6백년 경에 가장 활발하게 편찬된 것으로 되어 있다. 멀게는 1천년이 지난 뒤에 편찬된 것도 있다고 역사학자들은 연구하고 있다. 또한 편찬된 장소도 인도로부터 서역을 거쳐 중국에까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전들은 전부 세존이 설하고 아난 존자가 구술하여 결집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불교에서 경전을 보는 특징이다. 설사 이 시대에 경전을 편찬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같은 입장이다. 즉 아난 존자가 “이와 같은 말씀을 나는 부처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로 시작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경전을 편찬하는 절대적인 원칙이기 때문이다.
2) 가섭
석가모니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 한 분으로 석가모니부처님 입멸 후 제자들의 집단을 이끌어 가는 영도자 역할을 해냄으로써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불렸습니다.
가섭의 일대기
음을 따서 마하가섭, 의역하여 대음광(大飮光)·대구씨(大龜氏)라고도 한다. 인도 왕사성 마하바드라의 거부였던 브라만 미그루다칼파의 아들로서 비팔라 나무 밑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나이로 비야리성(城)의 가비리라는 바라문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12세에 부모를 잃고 세속적인 욕망의 허무함을 깨달아 아내와 함께 출가하였는데, 그 후 석가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
8일만에 바른 지혜의 경지를 깨쳐 자기 옷을 벗어 석가에게 바친 후 부처가 주는 마을 밖의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온 헌옷의 천으로 만든 분소의(糞掃衣)를 입고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 욕심이 적고 족한 줄을 알아 항상 엄격한 계율로 두타(頭陀: 금욕행)를 행하고, 교단의 우두머리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부처의 아낌을 받았다.
어느 날 사위국의 고요한 숲 속에 오랫동안 머물다가 길게 자란 수염과 머리, 헌옷을 입은 채 기원정사를 찾아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속으로 경멸하였다. 그러나 석가는 여러 비구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잘 왔다. 가섭이여, 여기 내 자리에 앉아라.” 하고는, 가섭존자가 얻은 훌륭한 공덕이 자기 자신이 얻은 공덕과 다를 바 없다고 칭찬하면서, 석가는 모든 무상의 정법을 가섭에게 부촉하며 자신이 죽은 뒤 모든 수행자의 의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래서 그를 십대제자 중‘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하였다.
한때 바사성에 머물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석가가 열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쿠시나가라의 천관사로 달려가 스승의 발에 예배한 후 다비의식을 집행하였다. 이어 그는 500명의 아라한들을 모아 스스로 그 우두머리가 되어, 아난과 우바리로 하여금 경(經)과 율(律)을 결집하도록 하였다.
석가가 입멸 후 제자들의 집단을 이끌어 가는 영도자가 되었는데, 선가(禪家)에서는 그를 부법장(付法藏) 제1조(祖)로 높이 받들고 있다
선가에서 말하는 선법(禪法)은 상수제자인 가섭 존자에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으로서 그 시작을 삼는다.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고 가섭은 미소를 지은 것과, 다자탑 앞에서 늦게 도착한 가섭에게 부처님이 자리를 반으로 나눠서 같이 앉은 일과, 세존이 열반에 든 뒤에 가섭 존자가 늦게 도착하자 관(棺)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이신 이야기가 그것이다. 소위 삼처전심(三處傳心)이다.
3) 라훌라
석가모니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의 한 분으로, 출가하기 이전의 석가모니의 아들이며 출가의 장애가 되었다 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부처님이 성도 후, 고국 가비라성으로 돌아왔을 때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를 받았으며 교단 최초의 사미였다고 합니다. 출가 후에는 사리불의 지도를 받아 수행했고, 침묵을 원칙으로 삼아 수행에 전념하여, 많은 비구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배워 익히기를 좋아하고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을 은밀히 잘 실행한다 하여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고 불렸는데,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아들이라는 입장에서 다른 제자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드러내기도 하여, 부처님으로부터 훈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라후라(Rahula)의 일대기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불리는 부처님 제자로서, 부처님의 아들이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시던 날 밤에 태어났다고 전하는 라후라는 15세에 출가해 사리불을 은사로 최초의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그의 이름을 '라후라'라 한 것은 그가 태어날 때 라후라 아수라왕이 달을 가렸기 때문이라 하며, 이후 출가한 그는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나 선행 및 수행을 철저했기에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불린다.이후 법회회상에 태어나 도칠보화여래(蹈七寶華如來)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 라후라 존자는 석가모니불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가운데도 은밀하게 스스로 행할 바를 실천하여 부처님으로부터 밀행제일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실제로 그는 인욕행(忍辱行)과 계율준수를 남이 보지 않는데서도 철저히 해 나갔던 모양이다. 산스크리트명은 라훌라(Rahulla)이다. 장애로 의역 되고 있다. 사실 '라훌라'라는 이름은 아수라의 일종으로 그 아수라의 무리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자를 일컫는 말이다. 신화에 근거하여 '라훌라'라는 말은 월식으로 불리게 되고 결국에는 장애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하고 출가를 결심하여 돌아오던 길에 아들이 태어나 "라훌라(장애)가 생겼구나"라고 통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행간에 숨어 있는 본래의 의미는 태자의 출가후 야수다라비는 정상적으로 라후라를 분만했다. 그렇지만 싯다르타가 깨닫기 까지의 6년 고행기에는 가족들도 인도의 풍속대로 고행에 가까운 생활을 하였으므로 라후라의 출생을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았고 성도의 소식과 함께 그의 출생이 공표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공교롭게도 출생일 날 월식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를 '라후라'라고 불렀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후 고향 카필라 성으로 돌아왔을 때 야수다라 비는 라후라에게 "저분이 너의 아버지다. 가서 나는 왕이 되려하니 물려줄 재산을 달라고 하라."고 했다. 어린 라후라는 어머니 말대로 물려줄 재산을 요구했다. 부처님은 그녀의 마음을 간파하고 '차라리 그에게 보리 도량(菩提道場)의 거룩한 보물을 주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법의 상속자가 되게 하리라"고 생각하고 사리불에게 명해 라후라의 정식 출가의식을 명령했다. 당시 그의 나이 6세 혹은 10세라 한다. 이렇게 라후라는 사리불을 스승 삼아 최초로 사미가 되었다.`석굴암 십대제자상 중에서 본존불을 향하여 우측 다섯 번째로 등장하는 라후라 존자는 얼굴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주먹을 쥔 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활달하게 들어올려 옷자락을 잡은 모습이다. 만면에 미소가 감돌고 있는 미남형의 중후한 비구로서 단정한 자태다. 일반적으로 불화에서 라후라 존자는 아난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단아하게 깍은 젊은 승려로 나타난다. 그 화면 구성을 보면 부처님 좌측에 마하가섭, 우측에 아나존자가 머무는데, 라후라는 가섭이 위치한 자리에서 약간 위에 젊은 비구의 모습으로 얼굴을 보이고 있다.
4) 데바닷다 :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데바닷타는 부처님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야쇼다라의 동생이고 아난다의 형이었다.
그는 아난다와 우팔리가 출가할 때 함께 출가하여 부처님 교단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데바닷타는 남달리 큰 야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부처님의 교단을 이어 받으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마가다의 태자 아자타삿투의 후원을 얻게 되자 그의 야심은 더욱 커갔다.
아자타삿투 태자와 데바닷타의 사이가 가까와지면서 여러 가지 소문이 돌고 있었다.
부처님은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셨다.
오랜만에 부처님을 가운데 모시고 둘러앉은 제자들은 데바닷타의 소문을 부처님께 알려 드렸다.
부처님, 아자타삿투 태자는 아침 저녁으로 오백 대의 수레에 음식을 실어다가 데바닷타와 그 무리들에게 공양한다고 합니다.
며칠이 지나 데바닷타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부처님을 찾아왔다.
교단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교단의 내용과 데바닷다를 잘 알고 있는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데바닷타, 잘 들으라.
맡긴다고 하더라도 목갈라나와 같은 제자들이 있지 않느냐.
거절당한 데바닷타는 무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빔비사라왕을 옥에 가두고 왕위를 빼앗은 아자타삿투의 힘을 빌어 부처님을 죽이려 했다.
한번은 칼 잘 쓰는 자객을 보내어 부처님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
한 번은 데바닷타의 무리들은 벼랑 위에 숨어 있다가 부처님이 그 아래를 지나가는 순간 큰 바위를 내려뜨렸다.
이번에는 부처님을 향해 아주 성질이 사나운 코끼리를 풀어 놓았다.
데바닷타의 음모는 세 번 다 실패로 돌아갔다.
어떠한 폭력도 여래의 법 앞에서는 무력했다.
데바닷타의 사건은 부처님의 일생에서 가장 큰 아픔이었다.
데바닷타로 인해 교단이 분열된 일까지도 일어났다.
교단을 분열시킨 데바닷타가 부처님의 가까운 친척이었다는 것이 부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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