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를 본관으로 하는 원주 李씨 종중에서 조성한 중흥조 사당인 이곡사입니다.
지정면의 원충갑 묘역 바로 아래에 모셔져 있습니다.
조상을 모시고 있으니(崇祖), 정숙(靜肅)하라는 글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삼문을 지나면,
바로 사당입니다.
사당 옆에는 비석을 나란히 모시고 있습니다.
한때 익흥도호부라 불리기도 했던 원주.
그래서 익흥李씨가 분파해 나가기도 했습니다.
익흥이씨는 그 내력이 전하지 않으나 이신우의 12세손인 이반계(攀桂, 고려시대에 중랑장을 지냄)를 시조로 하여 원주이씨에서 분적했다고 전해집니다.
다음으로 소개할 원충갑 장군의 부인이 益興李氏입니다.
원주이씨(原州李氏)
원주(原州)는 고구려 때에는 평원군이라 불렸고, 서기 940년(고려 태조23) 원주로 고쳤다.
그 후 일신현,·정원도호부,·익흥도호부, 성안부 등으로 변천해오다가 1353년에 원주목(原州牧)으로 하였다.
원주이씨는 서로 다른 두 계가 있다.
원주 이씨의 원조(元祖)는 중국(中國) 절서성(浙西省)에서 사람으로, 기원전(紀元前) 200년, 한고조 때(漢高祖時) 병난(兵亂)을 피해 진한(辰韓)으로 들어와 원주(原州)에 정착하였는데, 세보의 실전으로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중국에서 건너와 원주에 정착한 이씨는 ▲원주이씨(구파)라고 하고 경주이씨에서 분관된 원주이씨는 ▲원주이씨(신파)라고 한다.
구파의 시조 진민(眞民)은 신라 조관(朝官)으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을 지냈다. 27세 도균(道均)은 높은 관직에 나아가, 어사대부(御使大夫) 진양군(進陽君)에 이르렀으며, 3형제 성계(城桂) 춘계(椿桂) 공청(公淸)을 두었다. 중시조 춘계(椿桂)는 고려 인종과 의종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와 평장사(平章事)을 지냈다.
신파의 시조 이신우(李申佑)는 경주이씨 이거명(李居明)의 12세손이다. 그는 1004년(고려 목종 7년)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때 병부상서를 지냈다. 후에 원주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경주이씨에서 분관하여 원주를 본관으로 했다.
따라서 원주이씨 신파 시조 이신우(李申佑)의 선대는 신라의 전신인 진한 양산촌장 표암공 이알평(李謁平)의 원손 이며 소판공 이거명(李居明 : 경주 이씨의 일 세조)의 12세손으로 문종조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경흥군(慶興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신우(申佑)를 시조로 받들고 경주 이씨에서 분적 하여 본관을 원주로 삼게되었으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판도공파(版圖公派), 월성군파(月城君派 : 경주이씨로 환원),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 종파), 시랑공파(侍郞公派 : 뒤에 慶原君派〔대제학공파파, 정산공파파, 파주공파파, 산음공파파〕와 강릉공파로 분파됨)등 크게 네계통으로 갈라져서 세계를 잇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의 13세손 반계(攀桂)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로 신호위 영중랑장을 지내고 예부상서에 올랐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亡國(망국)의 한을 안고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태종과 친분이 두터웠던 반계(攀桂)는 누차 영상의 벼슬에 제수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자, 태종이 그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食飮)을 전폐하다가 7일만에 <은(殷) 나라가 이미 망했으니 누구의 녹(祿)을 먹겠는가(殷室己喪誰粟司食)>하며 세상을 떠나니, 그의 절의(絶義)를 가상히 여긴 王이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하고 경원군에 추봉(追封)하였다.
반계의 아들4형제 중 장남 이는 정주학(程朱學)에 정통한 유학자였으나 태종이 홍문관 대제학의 벼슬을 내려 관직에 오를 것을 종용하자 자식들을 불러놓고 "충효(忠孝)는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이다.
일찍이 아버지께서 벼슬을 버리시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순사(殉死)하셨으니 “내가 벼슬에 나가는 것은 자식으로서의 어찌 신자(臣子)의 도리라 하겠는가?” 하면서 음독(飮毒)자결(自決)하여 충의의 가통을 지켰다.
반계의 둘째 아들인 견(肩)은 정산 현감(定山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이 그의 청백한 치적을 영원하게 기리기 위하여 <영사불망철비(永思不忘鐵碑)>를 세웠으며, 그의 묘소가 있는 여주군 북내면 운촌리는(驪州郡北內面雲村里)그의 호(號)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견의 아우 요(腰)와 족(足)도 모두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니 세상 사람들은 이들 형제를<일문사충(一門四忠)>으로 일컬었다.
반계의 아우 을계(乙桂)의 후손에서는 손자 영화(永華)가 유명했다.
그는 감찰, 직산 현감(稷山縣監)을 거쳐 단종때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로 나갔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린 후 홀로 해남의 무진산(無塵山)에 산막을 짓고 세상을 등지며 은거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절의를 숭모하여 산막이 있었던 마을 이름을 산막리라 하며 그의 묘소가 있는 산 이름을 이영산(李英山) 이라 부르고 있다.
집성촌은 경기도 양평군 양평면. 평택시 포승면,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원주시 호저면,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면. 적성면,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해남군 계곡면. 해남군 마산면. 진도군 군내면 등이다.
주요파는 ▲대장군공파 ▲월성군공파…계천공파. 판사공파. 대제학공파. 정산공파. 파주공파. 산음공파. 강릉부사공파. 판도공파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135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 숫자는 신파와 구파의 구분이 안 된 것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이씨(原州李氏)는 남한에 총13,248가구, 56,0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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