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6일 자료입니다
* 지난 9월 문무왕 박사의 유식학 강의를 듣고 좋은 자료가 있어 소개합니다.
현재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신 妙珠스님의 “唯識學의 中心思想”이라는 원고가 있어 우리들이 유식학을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어 몇 회에 걸쳐 제공하겠습니다. 이 원고의 왜곡을 우려하여 저의 의견은 일체 배제하고 원고 그대로 보내드립니다.
唯識學의 中心思想 妙珠스님 동국대교수 재직
(1) 無意識의 精神世界
유식론서(唯識論書)는 주로 唯識學의 내용을 설명하는 論書입니다. 그 중에서도 여러 가지 논서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섭대승론(攝大乘論), 유식삼십론송(唯識三十論頌), 성유식론(成唯識論)등이 읽히고 있습니다. 이런 유식학의 여러 논서에 서는 정신세계 중 의식 영역뿐만 아니라 무위식의 영역까지, 즉 정신세계의 심층에 이르기까지 아주 자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수행자의 당면과제인 번뇌(煩惱)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기는 것이고, 그런 번뇌를 사멸(死滅)하는 과정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심리작용의 종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깨달음의 경지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깨달음의 경지라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 왜 유식론에서는 정신세계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밝히고 있겠습니까? 불교의 모든 경전을 통틀어 팔만대장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팔만대장경을 한 손에 꽉 움켜쥐었다가 펴보면 손바닥에 남는 글자가 딱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 심(心)자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교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해 놓은 경전과 논서들입니다. 그런데 팔만대장경의 모든 초점이 결국 마음 心자, 즉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佛性의 존재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니까 눈에 보이는 게 아닙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모습에 따라서 변합니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물도 항상 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음이 되었다가도 수증기로 변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물질은 고정된 게 아닙니다. 더구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일정한 형상이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육안으로 보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마음은 눈으로 보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마음의 세계에는 중요한 道理나 萬法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唯識學에서는 마음의 세계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인식할 것인가를 비롯, 무의식 즉, 심층의 세계에서는 어떤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자세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의식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는 작용을 하는 영역을 말하고 무의식은 그러한 의식영역의 저변에 있는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의 영역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은데 그 의식의 저변에 있는 무의식의 세계까지 생각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평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내용이 무의식의 영역 안에 그대로 다 저장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는 무의식의 영역이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도로에서 뻑 하는 소리가 나서 쳐다봤더니 어떤 차가 사람을 들이박고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당황하여 언뜻 본 차의 기종이나 색깔을 기억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었으니까 너무 놀랐던 것입니다. 차번호도 본 것 같은데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유일한 목격자가 정확한 것을 모르니까 경찰들도 그만 그 사건을 덮어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유가족들이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그래서 가족들은 이 목격자를 정신과 전문의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최면을 걸면 무의식 영역 안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것을 언뜻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찰관과 함께 그 목격자를 정신과 전문의에게 데리고 간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그 목격자에게 최면을 걸도 당신은 언제 어디에 있습니다. 지금 무슨 사고가 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목격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지금 차가 사람을 치어 놓고는 그냥 도망간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차번호를 보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이 목격자가 차번호를 봤다고 하면서 차번호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뺑소니 범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무의식에는 잠시 스쳐간 차번호까지도 그대로 저장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일상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내용들이 다 무의식 영역 안에 그대로 저장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무의식들이 쌓이면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데도 점차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불교를 믿고 난 뒤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좀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누가 나에게 안 좋은 소리를 했을 때, 예전 같았으면 아마 금방 화를 내거나 앙갚음을 하려고 오랫동안 가슴속에 담아둘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공부하면서부터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상당히 너그러워져 있기 때문에 그만큼 평정을 빨리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의식의 세계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평소 무엇을 듣고 생각하느냐가 그대로 저장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의 잘못된 행동이나 말을 알거나 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나의 심층에 저장이 되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의식 영역에 대해 대단히 깊게 연구한 유명한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융이 수십년 간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의식영역이 섬(島)이면, 무의식의 영역은 바다와 같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는 의식의 작용이 아주 크기 때문에 의식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의식이 하는 역할이 섬과 같으며 그 밑에 있는 무의식의 영역은 바다와 같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 느껴지지는 않지만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바다보다 더 광활한 세계, 불가사의한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구에서는 이런 무의식 세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였지만 불교에서는 이미 1500년 전인 5세기 때에 대단히 자세히 연구했습니다. 현대의 심리학에서는 그 용어를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이라고 하지만 우리 불교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합니다. 아뢰야식이란 말은 무엇을 저장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식선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식과 행동의 결과가 하나의 씨앗으로 저장이 되기 때문에 아뢰야식이라 합니다. 이것을 한자로 번역하면 장식(藏識)이라고 합니다. 1500년부터 아뢰야식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불교는 과학이 아니고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아뢰야식을 지금과 같으면 선승, 참선하는 분들과 같은 당시의 요가 수행자 즉, 유가사들이 조용히 내면의 세계를 관조(觀照)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서 내면의 정신 세계를 관찰하고 나가가서는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관조를 하는 것입니다. 점점 더 깊이 들어가 10재 둥 8재 정도가 되면 그 무의식의 작용이 그대로 다 관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 무의식의 영역을 아뢰야식이라고 명하고 그 작용을 대단히 자세하고 깊이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뢰야식은 어떤 작용을 하겠습니까? 먼저 모든 의식과 행동의 결과가 그대로다 아뢰야식에 저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장되는 형태를 종자라고 합니다. 종자는 씨앗이란 뜻인데 씨앗은 곧 열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장되는 형태를 씨앗이라고 표현한 것은 꽃이 지면 열매를 맺습니다. 또 열매는 나중에 싹이 트고 또 자랍니다. 결국 열매는 결과이면서 새운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인식과 행동의 결과가 아뢰야식 안에 저장이 될 때, 그 형태를 종자라고 하는 겁니다.
결과이면서 그것이 저장되어 있다가 또 새로운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에 종자라고 하고 특히 업의 종자이기 때문에 업종자(業種子)라고 합니다. 또는 이것이 하나의 에너지가 되기 때문에 습기(習氣)라고도 합니다. 즉 창고 안에 물건 집어넣듯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체가 에너지의 흐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기운 氣자를 써서 습기라고 합니다. 또 삼업(三業) 즉 口業, 身業, 意業의 결과로서 저장되기 때문에 업종자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우리의 행동과 생각에 대한 결과가 다 나타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과법(因果法)이라고 하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부처님도 인과법은 어떻게 대신 받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참회(懺悔)하고 惡業의 종자를 선행으로 다스리면 악업의 세력은 약화된다고 했습니다. 악은 선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행을 해서 악업의 종자를 다스리면서 자꾸 뉘우치면 업장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업장이 있는 사람이 선행을 베풀지 않으면 그것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팔자가 좀 기구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결혼을 두 번이나 했는데 만나는 남자마다 걸핏하면 때리고 욕을 하는 등 난폭한 남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내가 또 남자를 잘못 만났구나. 이것은 순전히 내가 아직 나에게 맞는 남다를 못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새벽에 짐을 싸서 도망을 쳤습니다. 한참 도망을 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팔자가 앞장 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팔자라는 것도 결국은 업종자입니다. 사주팔자도 나의 의지하고 상관없이 그 날 그 시에 태여 났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내가 전생에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 날 그 시에 태어나서 그 사주팔자를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팔자라고 하는 것도 아뢰야식에서는 업종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팔자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왜나 하면 팔자도 결국은 인연법(因緣法)이니까, 그에 상당하는 노력을 한다면 다스릴 수가 있는 겁니다. 말과 생각과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또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주팔자가 굉장히 좋게 타고났는데도 별로 신통스러운 일을 못 보는 경우도 있고, 사주팔자가 굉장히 안 좋게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참회하고 기도하고 계속 선행을 베풀고 하다 보니까 그게 또 전화위복이 되어서 아주 잘 사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그것은 因은별로 안 좋았지만 緣을 잘 가하다 보니까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음주에는 (2)業 은 輪廻의 主體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상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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