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의(6)-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1.이러한 까닭에 공에는 색이 없으며 수․상․행․식도 없다.
1.따라서 공한 가운데는 육체적 구성요소인 색이 없고 정신적 구성요소인 감정과 지각과 선택과 인식작용으로서의 수․상․행․식도 없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이 공하기 때문에 색․수․상․행․식은 없다. 색이 몸이고 수․상․행․식은 정신 작용이다. 색․수․상․행․식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된다.
오온중에서 색만 존재하면 그것은 시체요. 수․상․행․식의 정시만 존재하면 그것은 영가 즉 귀신이다. 육체와 정신이 결합 될 때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된다.
@공하다는 것은 초월한 상태를 의미한다. 공이란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이란 유․무 어느 쪽과 손을 잡지 않는다. 공은 有와 관련이 있지만 有에 집착하는 법이 없고, 무와도 관련이 있지만 무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보통 유가 아니라는 뜻으로 실체가 없고 자성이 없는 것을 일컬어 공이라고 한다. 공이란 초월, 또는 중도라고 표현한다.
유가 아니라는 뜻으로서만이 공이 아니라 무도 아니라는 뜻까지 포함해야 완전한 초월, 완전한 중도, 즉 공이 성립된다고 보는 것이다.
오온이란 정신적․육체적 구성요소다. 즉 색․수․상․행․식이다. 이것을 蘊이라 표현한 것은 조합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오음이라 하는데 陰이란 陰蓋, 즉 가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조합하여 육체와 정신작용을 구성하고, 또 이들이 겉을 둘러싸 불성이 드러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시고공중(是故空中)>
(禪에서 본 반야심경)
허공은 청정함이 본래 그러하니, 작대기로 허공을 때려도 허공은 아프지도 않고, 칼로 배어도 허공은 끊어지지 않으며, 노끈으로 허공을 잡아 묶으려 해도 허공은 붙들 수가 없고 불로 허공을 태우려 해도 허공은 불 붙지 않으며, 화살을 쏘아도 허공은 뚫어지지 않고 비가 허공을 쏟아져도 허공은 젖지 않으며, 허공을 팔아 넘기려해도 허공은 값을 매길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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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無意識界
1.불교의 세계관
경의 본문은 '이런고로 공 속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고,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내지 의식계도 없나니라'고 하였다. 이 일절은 불교의 세계관을 말하는 '삼과(三科)의 법문' 즉, '온','처','계'의 삼종의 방면에서 '일체는 공이니라'고 하는 것을 반복해서 역설한 것이다. 그런데 먼저 '온'이라 함은 물론 '오온'이다. 이 오온은 먼저 말씀한 것처럼 우리들과, 우리들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원소다. 즉,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코로 맡는 것, 혀로 맛보는 것, 몸에 닿을 수 있는 일체의 객관의 세계는 다 이 색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음으로 '오온'속의 수․상․행․식은 의식의 작용으로 모두가 주관에 속하는 것이다. 더우기 주관의 주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제 4의 식으로서, 이 의식이 객관의 '색'과 교섭하고 관계하는 데서 생기는 심상이 수․상․행인 것이다. 따라서 '오온'이라고 하면 주관, 객관의 일체의 세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오온은 공'이라고 하는 것은 즉, 일체의 존재, 모든 세계는 다 공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공 속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주관의 세계도 객관의 세계도 모든 것이 공의 상태에 있는 것이니, 다만 인연에 의해서 임시로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집착할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처'라고 하는 것은 12처를 말하는 것이니, 6根과 6境을 말한 것이다. '六根'은 안․이․비․설․신의 5관, 즉 5根에 '意根'을 넣어서 六根이라고 한 것이다. '根'이라 함은 識을 발해서 境을 취하는 '발식취경'의 뜻이라던가 또는 '승의자재'의 뜻이라고, 전문적으로는 대단히 어렵게 해석을 하고 있다. 요컨데 '根'이란 초목의 근이라는 그러한 근으로 根源 혹은 根本이라고 하는 뜻이다. 즉 이 六根과 六識이 外境을 인식하는 경우에 그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근'이라고 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근을 '부진근', '승의근'의 둘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가령 눈을 뜨고 볼 때, 안구는 '부진근'이고, 시신경은 '승의근'이다. 만약에 안구는 있어도 시신경이 마비되어 있으면 색은 보이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시신경은 아무리 건전해도 안구가 없으면, 장님처럼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게 된다. 그런고로 이 승의근과 부진근, 시신경과 안구의 둘이 완전히 갖추어야 비로소 우리들의 눈은 눈의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역시 다른 五根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다음 '六境'이란, 육근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색․성․향․미․촉․법이다. 육근에 대한 여섯 가지의 경계라는 뜻으로, 六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육경을 또한 '육진'이라고 하기도 한다.
'塵'이라 함은, 무엇을 더럽힌다는 뜻으로, 우리들의 맑은 마음을 더럽히고, 미혹되게 하는 것은, 즉, 이 마음 밖에서 오는 색과 성과 향과 미와 촉과 법이니, '육경'을 또한 '육진'이라고도 하니, '육진의 경계'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육진중에서 '法塵'은 '意根'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기쁘다든가, 슬프다든가, 밉다든가, 예쁘다든가 하는 정신상의 작용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六根과 六境을 소위 '12處'라고 말하며, 이것을 또한 '12入'이라고도 한다. '處'라고 함은 '장소'로, 생장의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六根이 六境을 받아 넣어서, 의식을 잘 생장시킴으로 해서 이것을 '십이처'라 한 것이다. 그래서 이'根'과 '境'과는 서로 얽혀 들어간다는 뜻에서 '십이처'를 또한 '십이입'이라고 한 것이다.
'界'라는 것은, 자세히 말하면, '18계'라고 하는 것으로 '六根'과 '六境'에 '六識'을 합쳐서 十八界가 되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들의 인식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根'과 '境'과 '識'의 세 가지로 서로 응해서 일치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다만 '根'과 '境'만 있고 '識'이 없으면 즉 '마음이 여기 없어, 보아도 본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있어도 없는 것 같은 것이다. 무슨 일이고 열심히 하고 있으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간다. 한시간 두 시간이 5분이나 10분밖에 안된 것 같다. 그러나 한시간이 10분이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시간을 초월해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있어도 없는 것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界'라고 하는 글자는, 철학의 세계라든가, 신록의 세계라든가, 하는 그 '세계'로서, 차별이라던가, 구별 혹은 영역이라던가 하는 뜻이다. 따라서 '十八界'라고 하는 것은, 18종의 세계로서, 즉, '근'과 '경'과 '식'과의 상대관계에 의해서 생긴 18의 세계다. '眼根'과 '色境'과 '眼識'이 화합하면, 여기에 눈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세계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즉 '眼界'다. 눈의 세계다. 지금 이 '心經'에는 최초의 眼界와 최후의 '意識界'만 들어서 말하고 그 중간의 '귀의 세계' '코의 세계' '혀의 세계'등 18의 세계는 생략했다.
눈의 세계는 우리들 눈에 비쳐 오는 곱게 물든 단풍이 보인다. 우리들의 눈은, 안구를 통해서 단풍이라고 하는 '색'의 세계를 인식한 것이다. 즉 알아진 것이다. ‘어느덧 단풍 시절이로구나'하고 눈은 아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로 한번 단풍놀이를 갈까'하게 되면, 벌써 눈의 영역이 아니다.
'증일아함경'이라는 경 속에는 '눈은 색으로써 식을 삼고, 귀는 聲으로써 식을 삼는다'고 하였다. 눈의 음식은 색이다. 귀의 음식은 소리다. 좋은 구경을 보고 싶다, 좋은 음악 소리를 듣고 싶다, 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향불을 피운다. 이것은 '중유(지옥에는 안가고, 극락에도 못 가는 영혼)의 중생은 향을 가지고 식을 삼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식물은 다만 입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눈에도, 귀에도, 코에도 필요한 것이다.
다음은 '귀의 세계'다. 좋은 명곡의 음악 감상을 한다는 것은 귀를 먹이는 것이다. 유감 천만으로 귀가 먹은 사람은 귀의 형용만은 있다. 제일 긴요한 청신경이 마비되어 있으므로, 모처럼 좋은 음악 소리를 듣더라도 무감각하여 모르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혀의 세계'다. 미각의 세계다. 병이 들어서 열이 나든지 하면 무엇을 먹으나 맛있다는 감각이 없을 때, 혀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즉 미각이 없기 때문에 조금도 맛이 없는 것이다. 즉, '맛없다'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눈'과 '귀'와 '혀'의 세계와, 그 대상이 되어 있는 '색'과 '성'과 '미'의 경계가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五官의 중심이 되어 있는 안․이․비․설․신의 오근과 그 대상이 되는 색․성․향․미․촉의 오경, 이러한 것을 통일하는 인식의 주체가 즉, 제6의식이다. 이 의식이 '意根'을 의지해서, 일체의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제육의식'은 일체의 만물을 널리 인식한다는 뜻에서 '광연식'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현재만이 아니고, 과거의 일, 장래의 일까지라도 이것저것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이 '제육의식'의 작용이다. 이 '제6의식'은 말하자면 '오식'의 주인공이다. 이 주인공이 든든해 있을 때에 안․이․비․설․신의 오식은 명령대로 잘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그 생각의 주체는 이 의식인 것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에 우리들의 인식작용이라는 것은, 결국 이 근과 경과 식의 화합으로 해서 생겨나는 것이며, '식'이란 인식의 주체로서, 마음을 말하는 것이며, '근'은 그 식의 의지하는 곳, '경'은 즉 마음에 의해서 인식되는 바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식을 떠나서는 일체 만물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심경'본문에 '안,이,비,설,신의가 없으면, 색,성,향,미,촉, 법도 없고, 안계도 없고, 의식계도 없느니라'고 한 것은 결국 '일체는 모두가 공이라'고 한 것을 자세히 분석해서 설명한 것이다.
두뇌가 명석한 사람은 처음부터 '일체가 공이라'고 하면 곧 '아아! 그럴 것이다'하고 알겠지만, 아직 공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오온'이 공인 것을 설명하고, 그래도 모르는 이에게는 '육근'과 '육경'이 공인 것을 설명하고, 그래도 또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좀 더 '육근'과 '육경'과 '육식'의 관계를 설명해서, 즉 '인연으로 해서 만들어진 우리들의 세계의 존재는 모두가 공이라'고 하는 것을 설명해 본 것이다.
참으로 인연에서 생겨난 일체의 모든 것은 공이다. 따라서 일체의 사물은 모두가 상대의존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서로가 의지해야 산다는 것은 비단 인간세계뿐만이 아니다. 우주 일체 만물은 모두가 서로 의지하고 사는 것이다. 살리고 살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연의 관계다. 상대의존의 관계다.
이와 같이 일체의 만물은 서로가 의존하고 살뿐만 아니라, 모두가 물과 같이 흐르고 있다. 움직이고 흐르고 그래서 우리들은 이와 같은 움직임과 흐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흐름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 번 발을 씻은 물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다. 흐르는 물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들도 역시 항상 변화하고 있다. 어제의 나는 이미 오늘의 내가 아니다. 따라서 이 '만물유전'과 '상대의존'은 곧 인연이라고 하는 모태에서 생겨난 두 원리가 된다. 길이로 보면 '만물유전', 옆으로 보면 '상대의존' 이 두 원리는 실로 의심 할 수 없는 우주의 진리다. 우리가 이 두 진리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사회의 은혜'를 느끼고, '인생의 귀중함'을 명확히 알게 되는 것이다.
자기 혼자만의 자기가 아닌 것이다. 모든 것을 해서 길러지고 있는 나 일체 모든 것으로 해서 살리워 지고 있는 나임을 알 때, . .
우리들은 새삼스럽게 사회의 은혜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아니
. . . . . . . . .
느낄 수가 없게 된다.(편자주;본문 그대로를 옮긴 것임.)
자기의 모습이 사회의 모습이며, 사회상이 그대로 자기의 모습인 이상, 세상을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하는 '보은감사'의 생각이 맹렬히 마음속에서 용솟음 치는 것이다. 자기 생활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참회도 없고, 다만 남을 저주하고 사회를 원망하는 그런 사람을 생각해 보라. 우선 나 자신을 반성해 볼 것이다. 한 번 '인연의 원리'에 눈을 뜨고, 참으로 '반야의 공'을 깨달은 사람은 생의 허망함을 아는 동시에, 또한 생의 귀중함을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산다는 것이 허망한 것이므로 더욱 귀중한 것이다. 죽어야 하기 때문에, 아니 죽지 않으면 아니 되기 때문에 '생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생의 귀중함과 고마움이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공을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그 생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생사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즉,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이다. 결코 함부로 죽음을 구하는 사람은 아니다. '죽음을 겁내지 않으며, 죽음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뜻 깊은 말이다. '군자는 촌음을 아낀다'고 한다. 그것은 진실이다. 촌음을 아껴서, 삶의 더 없는 귀중함을 맛보는 사람만이 비로소 '언제 죽어도 좋다'고 하는 귀중한 각오가 생기는 것이다. 언제나 '내일'과 약속하는 사람은 '오늘'을 참으로 살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지금으로부터 1천 5백여년전에 중국에 '승조'라고 하는 젊은 불교학자가 있었다. 그는 저 유명한 '나십삼장'의 제자로서, 3천제자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학자였다. 그가 어떤 사건으로 해서 당시의 국왕의 노여움을 사서 곧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무엇을 생각하였는가 이레 동안의 여유를 달라고 특청을 했다. 그는 그 이레 동안에 옥중에서 '법장론'이라는 훌륭한 책을 써 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그 때의 그는 31세 , 그 임종시에 '유게'가 또한 훌륭하다.
'사대(지,수,화,풍)의 주인이 원래 없으며, 5음(자기의 몸)이 본래 공이라, 머리를 칼날 밑에 맡기노니, 오히려 봄바람을 베는 듯하리라'
아아! 얼마나 철저하고 통쾌한 사생관인가. 그 젊은 학자 승조야말로 참으로 반야의 경전을 마음으로 읽고, 이것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인간이 여기까지 가지 않아서야 어찌 대장부라 하겠는가?. 나는 그 임종에 읊은 노래가 철저해 있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옥중에 갇혀 있는 몸을 가지고, 유유히 '법장론'이라고 하는 훌륭한 한권의 책을 남겨 놓았다는 사실에, 학자로서 그리고 불교의 승려로서 보다 위대하고 또한 그 진실됨에 경탄해 마지 않는 바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 '법장론'을 손에 들 적마다 '반야의 공'의 참 체험자 였던 승조의 위대함을 새삼스럽게 절실히 느끼게 된다.
불과 31세에 그와 같이 죽음을 조용히 맞이할 수 있었던 그를 생각할 때, 우리는 범부의 경지를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까,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생사의 간두에 서서 대자재를 얻을 수 있는 경지까지 하루 바삐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 간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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