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金剛經) 첫 강의
금강경(金剛經) 이란?
“반야바라밀로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반야바라밀은 “지혜의 완성”을 뜻한다. 지혜란 열린 마음․빈 마음이다. 중생은 “나와 나의 것”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중생이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고 당연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나의 것은 채우고 채워도 끝이 없기 때문에 불만스럽게 살아간다.
그러므로 “나의 것”을 채우는 일을 멈추고 그 마음을 지켜보아야 한다. 왜 내가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지 알아야 한다.
만족스럽다는 생각이나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리지 않고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생각을 쉰다는 것은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흘러가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족스러운 것과 불만족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직 밝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쉬고 ‘생각의 흐름을 그냥 지켜보는’ 것이다. 그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 ‘생각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다’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따라가는 마음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쉬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다.
금강경(金剛經)은 선종(禪宗)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금강경에서 禪宗이 나온 것도 아니다.
선(禪)이란 본래 중국 당대(唐代)에서 생긴 일체의 교학을 부정하는 불립문자 직지인심(不立文字 直指人心)의 래디칼한 토착화운동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금강경은 선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되어야 할 교학불교의 대표적인 경전 중의 하나다. 더욱이 金剛經은 선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선종의 대표적인 소의경전으로 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선은 부처님의 많은 제자 가운데 마음 깨친 법을 가장 정통으로 이어받은 분이 우두머리 제자이신 마하가섭존자다. 마음 법을 정통으로 전해 받은 분이 이조(二祖) 아란존자이고, 이렇게 내려가서 二八대의 조사가 되는 분이 바로 유명한 달마대사다. 이 달마대사는 중국에 오셔서 선종의 초조(初祖)고 마음 깨치는 법을 혜가(慧可)스님에게 전했다.
중국에 선을 일으키신 육조 혜능대사(六祖 慧能大師-638-713)는 이 어른이 본래 글도 모르는 무명의 나무장수였다. 육조 스님이 마음을 처음 깨치게 된 동기가 바로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에 있다. 시장에 나무를 팔고 돌아가는 길에 어느 스님에게 금강경 가운데 제10分 莊嚴淨土分 第五節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응당 머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란 경문을 듣고 마음을 활짝 개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노행자의 대사한테 다가가서 이렇게 여쭌다.
“대체 그 경이 무슨 경(經)이오?”
“金剛經이외다” “선생은 어디서 오셨길래 그런 훌륭한 경전을 가지고 계시오?”
“나는 蘄州에 黃梅山 東禪寺에서 왔는데 그곳에 五祖 弘忍大師께서 주석하고 계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고 계신데 그 門人이 일천명이 넘습니다. 내가 그 절에 가서 홍인대사께 인사를 드리고 이 금강경을 받았소. 대사님은 항상 僧俗에 권하시기를 이 金剛經을 몸에 지니고 있어도, 곧 스스로 見性할 것이요, 단박에 성불하리라 하시었소”
그 말을 들은 노행자는 그 자리에서 출가구법의 결심을 세우고 어느 손님에게 구걸하여 은 十兩을 얻어 노모의 식량과 의복을 충당하고 엎드려 사직하고 출가하였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뜻은 “싫다. 좋다. 내 것이다. 주관이다. 객관이다. 나쁘다. 착하다 하는 분별심을 버리고 본연의 마음 자세 그대로의 마음을 지니고 오직 중생제도를 위해 살라.)는 뜻이다. 하나 더하기 둘은 셋이 된다는 수학의 기본원리를 두살 세살된 어린애들은 해결 못하지만 어른들은 듣자 마자 알게 된다. 그것은 어렸을 때는 하나 둘을 들어도 곧 잊어버릴 정도로 지혜가 아직 밝아지지 못했기 때문이고, 나이가 들어서 곧 알게 되는 것은 지적 능력이 열리고 지혜가 생겼기 때문이다.
금강경은 반야경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반야경이 어떤 단일한 책의 이름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반야경은 반야사상을 담은 一群의 카테고리에 들어오는 책들을 말한다. 漢譯으로 된 것만 42종이고 금강경은 600부중 577부에 해당한다.
반야사상이란 기독교의 “신약성경” 쓰여지기 시작한 1세기 같은 시기에 불교 초기불교승단에서 불꽃같이 타오른 대승불교의 내용이다.
<금강경>에 사용된 용어의 특색을 살펴보면 경의 서술이 소박하고 ‘후오백세’설과 ‘대승과 소승’의 구분이 없고 ‘空’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불전문학의 영향으로 여겨지는 ‘연등불 수기’와 般若部係 경전에서 확립되는 육바라밀 중의 인욕바라밀의 표출이다. <금강경>은 600권의 大般若波羅蜜經및 많은 반야계의 경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금강경>을 ‘無自性의 空’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세간을 초월한 지혜의 입장으로서, 곧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相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空의 한 면만을 고집한다면 다시 實在論의 입장으로 역전하게 되므로 다시 空도 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금강경>의 大義를 단적으로 말한다면 眞空(人無我), 無相(諸法皆空)이라 할 수 있다.
또 ‘應無所住 而生其心‘ 이라고 하는 無住의 사상은 중국 선종의 실천사상으로서 응용되었다.
그리고<금강경>의 敎說인 無相 역시 반야공관의 실천을 설하고 있는〈如理實見分〉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와〈無斷無滅分〉에서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고 설파한 四句偈에서 無相의 가르침이 잘 표현되어 있다.
또 이 無相의 가르침은<육조단경>의 無相心地戒의 사상적인 근거가 되어 육조혜능이 自誓自受의 대승보살계 정신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
<금강경>서문에 ‘금강경은 無相을 宗으로 하고 無住를 体로 하며 妙有를 體로 한다.’라고 서술하여 이 無相과 無住는 空觀사상의 실천으로서 <육조단경>의 중심사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금강경오가해는 구마라즙이 번역한 <금강경>에 대하여 다음의 다섯 사람이 주해를 한 것을 한권으로 편집한 것인데, 누구에 의해 편집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금강경 오가해는 다음과 같다.
①唐 圭峰宗密의 金剛經疏論纂要
②唐 六祖慧能의 金剛經解義(口訣)
③梁 雙林傅大士 金剛經提綱頌
④宋 冶父道川의 金剛經의 着語와 頌
⑤宋 豫章宗鏡의 金剛經提綱
위의 五家解本으로 永樂乙未(1415) 5월 刊本에는 ‘涵虛說誼’가 合編되지 않았으나, 永樂乙未 6월 涵虛堂守伊序本은 오가해에 함허설의가 편입한 것으로서 순서는 규봉, 육조, 부대사, 야부, 종경으로 되어 있다.
현재 한국에 유통되고 있는 오가해는 무착의 18住義와 천친의 27斷疑의 대의를 의용하였고, 또 梁 소명태자의 32分章도 응용하고, 함허설의를 합편하여 실로 九家의 論疏, 解義, 頌, 提 剛, 分科가 합해진 것이다.
이때가 중국의 梁, 唐, 宋의 3대에 걸쳐 오가해가 설해졌으므로 당시 중국불교 전체사상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금강경>에서 ‘無相爲宗, 無住位體, 妙有爲用’이라고 설파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空理, 空談이 아니며, 敎義, 敎相이 아닌 자기창조와 자아구현의 평범한 진리를 말한다.
이는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의 구절에 대해 ‘明月蘆花一樣秋’라고 하여 일상사를 통한 금강반야의 철저한 무상․ 무주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금강경>에서 “나의 설법을 물을 건널 때만 필요로 하는 뗏목으로 알라”고 말씀하셨다.
말법 중생들이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법대로, 四相을 멀리 여의고, 육바라밀을 실천함에 있어서 法이니 眞理니 하는 모든 相도 버려야 할 것이거늘 법이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것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은 생략하여 <금강경(金剛經)>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께서 40년 동안 소승경을 비롯한 많은 경을 설법하신 뒤에 말씀하신 중요한 최고의 경이다.
부처님께서는 본래 설법을 하실 적에 초등학교로부터 대학원 과정까지의 순서를 따라 불법의 깊은 진리를 체계 있게 설법하셨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마음의 법문을 49년간의 교육 기간을 통해 다 설파하시는 가운데 아함경은 국민하교 과정으로 12년간 걸렸고, 방등부는 중학교 과정으로 8년 걸렸으며 반야 육백부는 고등학교. 전문학교 과정으로 21년간이나 걸렸다. 그리고 마지막 8년 동안에는 법화열반부라고 하여 대학의 최고학부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금강경은 육백부의 반야사상뿐만 아니라 불교의 전체 사상의 골수가 되어 있다. 그래서 조사님들도 이 금강경을 특히 존중해 왔던 것이다. 말과 문자를 버리고 교 밖에서 직접 마음을 깨치려는 선종에서까지 존중하는 경전이 금강경이다.
부처님께서 49년동안 설법하시는 가운데 그 반이나 되는 시간을 기울여 반야경을 말씀하신 것은 이 반야사상이 불교 정신의 핵심이며 중심이 되기 때문인데, 특히 그 가운데 금강경은 반야경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대문으로서 반야육백부를 거의 다 말씀하신 577부째에 해당한다. 그래서 금강경은 반야사상의 핵심을 결론적으로 천명하신 경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깨치는 요체로서 중생이 이것을 의지하여 마침내 불타의 지혜인 반야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 물질․허공․에너지 등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우리의 생각, 감정까지도 다 변하지만 오직 우리의 마음자리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금강이라 하고 금강경(金剛經)이라 한 것이다.
세간의 지혜는 객관세계에 대한 지식, 논리와 개념에 의한 지식, 이런 것들을 분별하는 지혜를 말하지만, 반야의 지혜는 마음을 깨쳐서 육체가 “내”가 아니고 시간 공간이 벌어지기 이전, 주관 객관이 나누어지기 이전, 곧 마음의 근원에 돌아간 지혜를 말한다.
“마음”은 곧 “나”입니다. 가령 “금강경을 듣는다” 또 “경을 듣는 이걸로 해서 부처님 말씀을 배운다” 하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을 설명 듣는 것이 되고 내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듣는 것이 되는 데, 그래서 그 법문을 듣고 “나”를 확실히 깨쳐 “마음”이 열리면 이때는 전체가 “반야”의 지혜이다. 내 마음을 어떻게 깨칠는지 정신 바짝 차리고 금강경 법문의 핵심을 그대로 들어서 따라가 보면 결국 마음을 깨치게 되고 반야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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