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간의 사랑으로
신라 십현 설총 얻어
고승 파계시킨
비련의 여인 비판도
요석(瑤石), 그녀를 떠올릴 때면 사랑이 죄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빌던 어느 시 구절이 생각난다. 한국이 낳은 최고의 고승 원효(元曉)대사. 그를 파계시킨 사연 많은 과부 요석공주.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원효대사 전기의 삽화에 등장한 그녀는 원효의 뒷모습을 보며 옷고름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후일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에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 역시 어린 시절 뇌리에 각인됐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후대인들의 기록에서는 요석과 원효의 관계를 ‘3일간의 사랑’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요석을 원효와 단 3일간을 함께하고 떠나보낸, 평생을 눈물로 살아간 비련의 여인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원효가 민중과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며 보살의 삶을 실천한 한국 최고의 고승이었으며, 한마음으로 생사(生死)와 진여(眞如)의 경계를 넘나든 무애자재(無碍自在)의 성현이었음을 공부하면서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원효의 사랑을 받았던 요석은 행복했을까, 행복하지 않았을까.’
삼국유사에는 요석의 목소리가 단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기에 그 주변 이야기들을 통해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수밖에 없다.
원효는 어느 날 비틀거리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는 “대사가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는 요석궁의 과부 공주에게 원효를 데려가라고 했다. 명을 받은 궁리(宮吏)가 원효를 찾으니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는 중이었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시고, 옷을 말리기 위해 요석궁을 찾아갔다. 3일간 요석궁에 머문 원효는 그 길로 궁을 나서고, 공주에게는 태기가 있더니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인 설총을 낳았다. <중략>
원효가 기거하는 혈사(穴寺) 바로 옆집에 설총이 살았으며, 원효가 죽은 후에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유골을 조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의 뜻을 표했는데, 어느 날 설총이 예배하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
설총이라는 존재는 원효와 요석의 관계를 유추하는데 커다란 실마리를 제공한다.
만약 원효가 요석공주와 그 아들을 평생토록 내팽개치고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으며, 후일 위대한 학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은 결코 아버지를 자신의 표상으로 삼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가 주석하는 절 바로 옆에 집을 짓고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설총은 불교학자가 아니라 신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유학자가 되었다. 위대한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평생 그 그림자를 좇은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우뚝 선 거목으로 자란 것이다. 이는 원효가 불교의 틀을 넘어선 대자유인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설총 또한 사자에게서 태어난 또 한 마리의 당당한 사자였음을 반증한다.
"한 뭉치의 흙을 던지면 개는 흙뭉치를 따라가 물지만, 사자는 던진 사람을 좇아가 문다"는 아함부 경전의 가르침처럼 원효에게서 배출된 아들은 아버지가 받아들인 불교를 배우는 대신 아버지가 불교를 통해 완성해낸 ‘걸림이 없는’ 삶의 방식을 배웠던 것이다. 그 가운데 요석이라는 존재가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을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분명 원효는 요석이나 설총만을 위해 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이상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았을 것도 짐작이 가능하다.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는 자는 한 길로 생사를 뛰어 넘는다’는 화엄경의 구절이 적힌 호리병을 들고 다녔던 방랑객에게 성욕도 장애가 되지 못했거늘, 하물며 처자식이 장애가 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요석은 원효로 하여금 아무 것에도 걸림 없는 삶을 열어준 최고의 도반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녀의 크고 넓은 품은 원효로 하여금 청정비구라는, 법력 높은 고승이라는, 또 신라 최고의 엘리트라는 모든 ‘멍에’를 훌훌 벗겨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요석을 한 남자에게 버림받아 눈물이나 흘리는 처량한 여인으로 해석하는 것은 결코 온당하다고 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효와 요석의 관계를 애초부터 서로의 완성과 성불을 위해 운명적으로 태어난 보살의 관계인 것처럼 애써 미화시킬 필요도 없다. 원효가 그랬듯이 요석 또한 중생의 몸으로 태어났고, 중생의 숱한 희로애락을 짊어진 채 살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석도 여인인 이상, 정인(情人)을 그리워하며 때로는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로 밤을 지새웠을 것이며, 때로는 절망이 불길처럼 번져 가슴을 새까맣게 태우기도 했을 것이다. 그토록 사랑한 사람인데 어찌 마음 한구석에 조금의 원망과 설움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흔들림 없는 사랑 앞에선 혼란의 폭이 조금씩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 바위 같은 사랑! 그 사랑이 비록 자신이 바라는 애착의 형태가 아닐 지라도 그 마음에 추호의 흔들림이 없다는 그 확신이 들어서는 경계에 이르면 그 사랑은 상대를 독점하겠다는 소유욕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원력의 에너지로 승화하게 된다. 그래서 좋은 남자는 좋은 여자를, 훌륭한 여자는 훌륭한 남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석공주는 자신만을 위해 주저앉지 않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간 원효를 원망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원효라는 나룻배마저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린 채 저 언덕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이따금씩 멀리서 전해오는 정인의 소식을 들으며 요석은 아마도 우주와 맞닿은 남자가 왜 자신의 품을 찾아왔었는지를 깨달았을 것이리라.
원효가 살았던 시절은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이상을 위해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젊은이들의 자신의 피를 제물로 바쳐야했던 혼란의 시기였다. 자식과 지아비를 잃은 신라인들에게 어찌 승리감만 가득했겠으며, 나라를 잃고 노예의 처지로 전락한 백제와 고구려인들에게 어찌 이해와 자비의 마음을 기대할 수 있었으랴. 이 혼란의 시기에 스스로 파계승이 된 원효는 주정뱅이들과 저자거리에서 노닐고 거지와 도적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가르치며 한마음으로 생사를 뛰어넘는 대자유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일승사상은 작게 본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크게 본다면 범부의 삶과 부처의 삶이 다르지 않음의 설파이다.
삼국통일이라는 혼란의 시기는 원효라는 위대한 고승을 배출했고, 그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자신의 역할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깨끗한 비구승의 모습으로 후대의 사표가 되는 대신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보살의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요석은 원효를 사자좌에서 끌어내 민중 속으로 보낸 인도자에 다름 아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통해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던 용기 있는 사나이, 원효. 그를 향한 그리움에 고통이 끊이질 않았다 해도 그녀는 커다란 그 기둥을 자신의 의지처로 삼았을 것이며, 그를 통해 보살도를 향한 구도의 열정을 불태웠을 것이다.
사실 원효는 그 누구보다 계율을 중시한 스님이었다. 그는 『보살계본지법요기』를 지을 정도로 계율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계는 작은 구절에 연연하는 소승의 계가 아니라 그 계 또한 많은 인연에 의탁해서 생겨난 유동적인 대상이었다. 욕망에 집착하면 그 사랑은 죄가 되지만, 고요한 마음으로 성찰하는 욕망은 진리로 가는 해탈문이 된다.
‘마음이 고요해진 자리’에서 피어나는 사랑. 원효와 요석의 사랑은 ‘사랑으로 진정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의심하는 이들에게는 밤바다 위에 뜬 등대와 같은 커다란 이상향이다. 몸은 멀리 있어도 항상 가까이에 함께 머무는,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그런 이가 진정한 사랑이라면 원효야말로 최고의 연인인 셈이다.
사랑 때문에 극락에도 갈 수 있고, 지옥에도 떨어질 수 있다. 중생들의 사랑이야 그 극락과 지옥을 하루에도 수천 번 씩 오르내리는 과정이지만, 위대한 성사 원효의 사랑은 자신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한 여인과 더불어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는 보살도였으며, 성과 속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대자유의 길이었다. 그런 원효의 금란가사를 벗기고 민중으로 인도한 대보살이 바로 요석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