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제13대 명종 때였다.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내장산 내장사(당시는 영은사)에 기운이 장사인 희묵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스님의 힘은 산에 나무하러 가서 달려드는 호랑이를 한 손으로 꼼짝 못하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어느 날 스님이 아랫마을로 시주하러 갔을 때였다. 큰 황소 두 마리가 뿔을 맞대고 싸우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떼어 놓으려 했으나 오히려 황소의 싸움은 격렬해지기만 했다.
이때 이를 목격한 희묵 스님은 묵묵히 바라만 보다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황소 옆으로 다가갔다.
『스님, 저리 비키십시오. 가까이 가면 다치십니다.』
놀란 마을 사람들은 크게 소리치며 걱정했으나 스님은 태연스럽게 두 소의 뿔을 양쪽 손에 나누어 잡고는 간단히 떼어 놓았다. 이를 지켜본 마을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과연 천하장사로군요.』
희묵대사가 천하장사라는 소문은 널리 퍼졌다.
힘이 세기로 알려진 희천이란 젊은 스님도 이 소문을 들었다. 그는 혼자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내장사로 달려갔다.
『젊은 객승 문안이업니다. 희묵대사를 뵙고자 합니다.』
『웬일로 날 찾아오셨소?』
『외람된 청이오나 스님께서 천하장사라 하옵기 소승 문하에서 공부를 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희천 스님의 속셈은 말과는 달랐다. 문하에 들어가겠다는 것은 구실일 뿐 희묵대사를 눌러 민망케 한 후 자기가 제일 힘이 세다는 것을 천하에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희천 스님은 자신의 생각이 헛된 망상임을 곧 알게 됐다. 도저히 자신의 실력으로는 희묵대사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희천 스님은 진심으로 희묵대사의 제자가 되어 은사 스님이 어떻게 힘을 키우는지 배우기로 했다.
희묵대사는 힘을 키우기 위해 특별히 운동을 하는 일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희천 스님은 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기 시작했다. 희묵대사는 매일 새벽 예불을 끝내면 절 뒷산 중턱 바위틈에서 나오는 샘물을 감로수 마시듯 마시고는 아주 기분 좋게 하산하는 것이었다.
『혹시 저 샘물에 무슨….』
희묵 스님이 물 마시는 광경을 몇 차례 훔쳐본 희천 스님은 샘물을 맛보았다. 물맛이 하도 좋아 희천 스님은 아무래도 샘물에 무슨 조화가 있다고 생각했다.
희천 스님도 매일 샘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 마시기 1주일째 되던 날. 희천 스님은 자신의 힘이 세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곤 너무 좋아 다음날부터는 물을 더 많이씩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희묵대사는 아무래도 희천의 거동이 이상하여 살펴보니 혼자만 마시는 샘물을 희천이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네 이놈! 어찌 스승의 허락도 없이 네 맘대로 샘물을 마시느냐?』
희묵 스님은 제자를 시험하려는 듯 산봉우리에 올라 큰 돌을 아래로 던졌다. 희천 스님도 힘이 세어 스승이 던지는 돌을 받아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지금도 내장사에 가면 그때 희천대사가 쌓았다는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희묵대사는 희천 스님과 승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웠다. 그 후 사람들은 구 봉우리를 장군봉이라 불렀으며 샘물은 장군이 마셨다 하여 장군샘의 장군수라고 했다.
산정에는 희묵대사의 지휘대였다는 장군대(일명 용바위)가 있고 산북쪽 줄기 밑의 신선대 부근에는 성터의 흔적이 있어 스님들의 구국사상을 오늘에 전하고 있다.
또한 내장산 동구리에서 약 1km 거리에 백양사로 넘어가는 지름길 고개를 유군이재라고 하는데 이는 군대가 머물렀던 곳이란 뜻이다.
희묵대사와 희천 스님은 승병을 이끌고 이 고개에 머물면서 왜구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희묵대사와 희천 스님이 이곳을 지키고 있자 왜구들은 다른 길로 돌아 전주로 향했다. 전주에는 이태조의 사당 경기전이 있었으므로 위험을 느낀 두 스님은 사람을 보내 태조의 영정과 전적을 옮겨 오도록 즉각 대처했다.
밤길을 타서 모셔온 영정과 실록을 두 스님은 신선봉 밑에 있는 천연동굴 용굴암에 모셨다. 위기를 면한 이 전적과 유물들은 1년 1개월간 용굴암에 보전됐다가 조정의 명으로 함경도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 옮겨졌다.
그밖에도 내장산에는 불교와 관계된 명칭이 많이 있다.
서래봉(써래봉)은 달마조사의 서래설(西來說)에 연유한다. 서래봉 줄기의 서쪽 바위 봉우리 불출봉은 봉우리 바로 밑에 있는 불출암터인 커다란 석굴에서 부처님이 나왔다 하여 석굴에서 부처님이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불출암은 공부하기 좋은 곳으로 널리 알려져 유생들마저 자주 찾았던 곳이다. 이 석굴에는 신비스런 바늘구멍이 있어 끼니때마다 먹을 만큼의 쌀이 나오고 손님이 오면 접대하기에 알맞은 양의 쌀이 솟아 나왔다. 하루는 사미가 매 끼니마다 쌀푸기가 귀찮은 데다 욕심이 생겨 바위 구멍을 크게 넓혀 놓았다. 그 뒤부터 쌀은 한 톨도 안 나왔다고 한다.
내장사 대웅전 바로 뒷산 봉우리는 영취봉이라 하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인도의 영취산 이름을 본따 지은 이름이다.
이렇듯 불연이 깊은 내장사는 백제 제30대 무왕 37년(636) 영은조사가 창건하여 영은사라 칭했다.
고려 제15대 숙종 3년에 신안선사가 전각과 당주를 크개 고쳐 중창했고 조선조에 와서 희묵대사가 3창했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 그후 부용대사가 4창했고 영운대사가 5창했다.
1925년 백학명선사가 벽련사 위치로 옮겨 벽련사라 개명하고 옛 절터에는 영은암을 두었다.
그러나 1938년 매곡선사가 현재의 위치에 중창불사를 한 후 내장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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