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들의 사랑법
원효나 의상같은 신라의 높은 스님들이
젊었을 때 연애한 얘기는 후세 대중의 갈채를 받고 있다
선묘는 젊은 구도자 의상을 연모했던
중국 산동반도의 바닷가 여자다
중국으로 유학간 의상이 상륙 첫날 묵었던 집의 딸이다
선묘는 의상의 여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분을 발랐다
선묘의 소망은 이 멋진 구도자를 파계시켜서 살림을 차리는 것이었다
선묘는 의상의 공부를 뒷바라지 하면서 온갖 일용잡화를 구해 바쳤다
의상은 공부를 마치고 한마디 말도 없이 신라로 돌아갔다
선묘는 의상을 태운 배가 떠난 부둣가에서 바다에 빠져죽었다
의상은 돌아와서 부석사를 세웠는데
이 절의 전설에 따르면 선묘의 넋은 용이 되어서
지금 부석사 무량수전 밑 땅속에서 이 웅장한 화엄 종찰을 떠받치고 있다
부석사는 선묘를 위한 제각을 세웠다
젊은 날의 원효와 의상은 친한 친구였고
진리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도반이었지만
그들의 삶의 자취는 정반대다
원효는 인간의 구체적 실존 속으로 나아갔고
의상은 화엄의 사유 체계를 건설했다
당나라로 가는 부두에서 두 청년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 한잔 나누어 마시고 헤어졌다
자신에게 절실한 길은 따로따로인데
청춘은 아름답다는 말은 이런 대목에서나 써야 한다
의상이 낙산사에서 바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원효는 설악산 영혈암에서 산을 바라보고 있다
의상은 정치적이다
의상은 언제나 임금에게 직접 보고 할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하고 있었다
부석사를 지은 재물도 임금한테 받은 것인 듯 싶다
원효는 대궐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백성들 틈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뒹굴었다
의상은 명문가의 아들인데
원효의 아버지는 하위직 관리였다
의상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이었으므로
명문가의 딸을 만날 듯 싶지만
산둥 바닷가의 여염집 딸한테 걸려들었다
어떤 사람은 선묘가 7세기 산둥반도의 바닷가에서
외항선 선원들을 기다리며 바람 속을 서성이던
수많은 여자 중의 한명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원효의 애인은 요석공주다
출신 계급이나 이념적 지향성을 떠난 인연이다
스님들의 사랑은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갈채를 받아 마땅하다
선묘는 처녀고 요석은 과부다
의상은 여자로부터 도망치고 외면하지만
원효는 밤중에 제 발로 애인 집을 찾아간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았고 거침이 없었다"라고 쓰여 있지만
여자 앞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원효는 사랑의 깃발을 당당히 내세우면서 여자한테 가지 못하고
여자 집 앞에서 일부러 개울에 빠져서 옷을 적시고
옷 좀 말려달라는 구실로 여자한테 접근했다
이것은 속세 대중이 하는 수작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설총은 그날 밤에 잉태되었다
의상이 한 사내로서, 그리고 한 구도자로서
선묘라는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대목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이 잘못한 일인 듯 싶다
중요한 기사를 빠트렸다. 낙종이다
의상이 중국에서 공부할 때
선묘가 가져다 바치는 일용잡화를 다 받아서 쓴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니 의상은 선묘라는 여자의 존재를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언반구 말을 걸지 않고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갈채는 끝난다
원효는 살아있는 여자의 몸에서 아들을 낳았고
의상은 죽은 여자의 넋 위에 절을 지었다
살아있는 여자의 몸에서 아들도 낳고 절도 지을 수 없는 모양이다
높은 스님들도 이 두가지 사업을 한꺼번에 해내지는 못했다
선묘의 꿈은 살아서 솥단지를 들여앉히고
밥상을 차리고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가엾은 선묘는 죽어서 용이 되었고
지금도 아득히 높은 애인의 절을 지키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 나라의 사랑법이라고 해도
선묘의 넋은 여전히 가엾다
용이 되었기로,
밥상을 차리고 싶었던 젊은 날의 꿈을 버릴 수가 있었을까?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불법의 바다는 넓고, 슬픔의 바다도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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