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신례(免新禮)
세상을 살아가면서 싫든 좋든 이런저런 신고식을 경험하게 마련이다.
대학에서 새내기가 겪는 신입생 환영회, 군에서 햇병아리인 신병의 신고식,
사회로 진출하는 신출내기가 직장이나 사회에서 통과의례가 그 예(例)이다.
여기에는 집단에 대한 일체감이나 소속감, 단합과 유대관계, 구성원 사이의 위계질서 확립,
엘리트 의식이나 기개를 키우는 것 같은 기틀을 다지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파생되는 역기능이나 본말이 뒤바뀌며 발생하는 악습으로 인해서 경제적 부담이 되는가 하면,
물리적 가혹행위나 존엄성 침해라는 비난의 여론이 비등(沸騰)하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런 관행은 언제부터 우리 주위에서 발을 붙였을까.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의 우왕(禑王 : 제32대) 무렵에 권문세족(權門勢族)의 자제가 가문의 권세를 등에 업고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선배관리가 신참의 드센 기세를 꺾고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한 길들이기 문화가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이런 관행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면신례(免新禮)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신임관료를 신래(新來), 기존의 선배관료를 선진자(先進者)라고 호칭했다.
그런데 면신례는 선진자에게 신래가 통과의례를 위해 행하는 접대였다.
한편 면신례는 기본적으로 허참례(許參禮)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허참(許參)은 '그 집단에 참여함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허참례는 '신래가 음식을 장만하여 선진자에게 접대'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며, 이를 징구(徵求)라고 한다.
징구의 진행과정은 숫자 3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면 청주(淸酒)가 세 병(甁)이면 어떤 고기 세 마리, 어떤 음식 세 가지, 과일과 나물을 각각 세 가지씩 준비하여 잔치를 벌이는데, 모두 백 가지 음식을 차렸다고 한다.
이런 잔치를 다섯 번을 연 다음에, 숫자 5를 기준으로 세 차례, 그 다음에는 숫자 7로 시작하여 9에 이른 뒤에 마쳤다고 하고 한다.
이런 지경이니 가난한 선비가 관직에 출사(出師)하는 경우 기둥뿌리가 휘청거릴 지경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곤고(困苦)한 살림에 빚을 얻어 치렀기 때문에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코 녹록치 않은 면신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신래들을 괴롭히는 침학(侵虐)과 기기묘묘한 희학(戱謔)이 자행되었던 흔적이 기록에 남아있다.
여기서 침학은 이미 언급한 징구와 같은 과도한 경제적 부담을 일컫고, 희학은 육체적이나 정신적 가학(加虐)이 따르는 희롱(戱弄)을 뜻한다.
희학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데 대표적인 몇 가지를 엿보기로 한다.
첫째로 장제로 열흘에서 한달 가량 연속적으로 숙직을 담당하도록 명(命)하는 초도(初度),
둘째로 거미를 잡는 자세로 시커먼 부엌 벽을 양손으로 더듬고 다니게 한 뒤에 손을 씻은 물을 마시도록 하는 거미 잡기,
셋째로 사모관대를 한 상태로 연못에 빠뜨리고 고기잡이 흉내내기,
넷째로 온 몸을 숯 검댕으로 만든 뒤 그 씻은 물 먹이기,
다섯째로 긴 서까래 크기의 나무를 들게 하는 경홀(擎忽),
여섯째로 미친 계집의 오줌 얼굴에 바르기,
일곱째로 즐거운 표정을 짓게 명하는 희색(喜色),
여덟째로 괴로운 표정을 짓게 강요하는 패색(悖色),
아홉째로 관련 있는 벼슬이름을 바로 읽는 순함(順銜)과 거꾸로 읽는 역함(逆銜),
열째로 별명을 붙이고 그에 해당하는 흉내내기,
열 한 번째로 아버지나 선조 혹은 본인의 이름을 쓴 종이를 태워 물에 타서 마시기 같은 폐습(弊習)이
암암리에 자행되었다.
당시에 '가혹한 신고식'이었던 면신례는 대부분 과도한 경제적 부담은 물론이고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경우 다양한 희학에다가 매질이 더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신래들은 찍소리 못하고 감내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왜냐하면 이 통과의례에서 삐끗하면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따돌림을 받기 쉽고
그로 인해서 말석(末席)도 차지하기 어렵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을까.
가끔 면신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신래가 목숨을 잃는 사고로 이어져 주모자로 지목된 선진자가
곤장을 맞거나 파직 당하는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명종(明宗 : 제13대) 시절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에 발령을 받았을 때 면신례 때문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그 폐풍(弊風)에 대해 상소를 올린 예가 있다.
이런 폐단(弊端)에도 불고하고 독야청청 성행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지천명(知天命) 이상의 남자들은 군대생활에서 신병시절 얼이 빠질 만큼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치렀던 전입 신고식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이들에 비해 최근 젊은이들은 대학의 햇병아리인 새내기 시절 신입생 환영회가 진저리 쳐지는 기억의
으뜸이 아닐까 싶다.
못 먹는 술잔에 정신을 잃기도 하고 아주 드문 경우지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사고로 얼룩지기도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오늘날 조직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다 보면 숱한 고갯길이나 갈림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현대판 면신례가 펼쳐진다.
거기에는 강압이나 굴종을 강요하는 타의보다는 상생이라는 슬기와 평등이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자발적 색채를 원칙으로 하는 문화적 뿌리가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다.
결국 그런 통과의례는 서로에게 공감하고 공존의 터전을 다지면서 가까이 다가가 공생의 문화를 창조할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런 연유에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동화되며 펼칠 새로운 세상의 도래와 만남과 사귐을 꿈꾸며 내일은 누가 누구에게 펼치는 면신례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까.
얼마전 강릉에서 한 대학생이 신입생 환영회 후에 사망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글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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