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찾아 가는 길

수원 용주사 - 정조대왕의 효심

難勝 2009. 3. 26. 05:50

 

 

용주사(龍珠寺)는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에 위치한 사찰이다. 용주사가 세워진 자리는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창건된 갈양사(葛陽寺)터다. 안타깝게도 갈양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신라 말 염거화상(廉居和尙)이 창건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용주사범종에 새겨진 명문으로 통해 알 수 있다.

염거화상 이후 갈양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 광종(光宗) 때에 들어서다. 광종 21년(970), 혜거국사가 ‘수주부(水州府)의 갈양사가 산수가 빼어나 국가대만대의 복지(福地)를 위하여 국가의 영원한 축원도량으로 삼으라’고 주청을 올렸고, 광종이 이를 받아들여 갈양사를 고려왕조의 원찰(願刹)로 승격시켜 국가의 축원도량으로 삼았다. 이후 갈양사는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라진 갈양사 터에 용주사를 일으킨 인물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正祖)다. 정조는 당쟁에 휘말려 뒤주 속에서 목숨을 잃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화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 짓고, 1790년 갈양사 터에 능사(陵寺)로 용주사를 세워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보경(寶鏡)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해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어 4년간의 공사 끝에 용주사를 완성하였다. 낙성식 전날 밤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는데, 절 이름을 용주사라 지은 것이 이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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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용주사 창건 후 보경스님에게는 당시 최고의 승직(僧職)인 도총섭(都總攝)의 칭호를 주었고, 창사(創寺)와 동시에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도록 하였다. 유교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던 당시에 억압받던 불교 사찰을 국가가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하겠다.

일제시대에는 31본산(本山)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안성, 남양 등 경기도 동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60여개의 말사와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문화재

용주사의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용주사범종(龍珠寺梵鐘)을 꼽을 수 있다. 용주사범종은 높이 1.44m, 지름 0.87m, 무게 1.5톤의 범종으로 종 몸체에 갈양사 창건에 대한 명문이 새겨져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존 상태가 좋고 조각 수법이 뛰어나 1964년 국보 제120호로 지정되었다.

범종을 제외한 대부분의 문화재는 경기지방문화재와 문화재 자료로 지정돼 있는데,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龍珠寺 大雄殿 後佛幀畵, 경기유형문화재 16), 용주사 병풍(龍珠寺 屛風, 경기유형문화재 15), 용주사 상량문(龍珠寺 上樑文, 경기유형문화재 13), 용주사 대웅보전(龍珠寺 大雄寶殿, 경기문화재자료 35), 용주사 천보루(龍珠寺 天保樓, 경기문화재자료 36) 등이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국보 제120호 용주사 범종(龍珠寺 梵鐘)


대웅전 후불탱화는 대웅보전의 삼존불상 뒤에 있는 커다란 불화로, 용주사에 전해 내려오는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는 창건당시 정조의 명으로 김홍도(金弘道, 檀園)가 그렸다고 전해지지만 최근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에는 민관(旻寬) 등 25인이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뿐만 아니라 불화에 사용된 음영법이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며 비슷한 시기 경기지역에서 활동한 다른 화파(畵派)의 작품에서도 이런 표현기법이 발견된다. 또한 용주사 대웅전에는 같은 수법의 칠성탱화가 있는데, 후불탱화가 김홍도의 작품이 아닌 이를 모방한 다른 화승(畵僧)의 그림으로 추정케 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또한 용주사 내에는 회양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정조가 용주사를 중창할 때 손수 심은 기념수라고 전해진다. 정조는 용주사를 지을 때부터 아버지의 영혼이 편안히 잠들기를 바라며 많은 나무를 심어 푸른 숲을 이루게 하였다고 한다.

어느 초여름, 정조는 푸르러야 할 솔잎이 하나도 보이지 않자 내관들을 시켜 이유를 알아내게 하였다. 내관들은 송충이가 솔잎을 모두 갉아먹어서 그렇다며 용서를 빌었다. 정조는 그들을 탓하지 않고, ‘송충이가 어떤 벌레인지 보고싶다’고 말했다. 신하들이 송충이를 잡아 흰 종이에 받쳐 임금께 올리니 정조가 한참을 슬픈 눈으로 쳐다보고는

“아버님 잠드신 숲을 갉아먹느니 차라리 내 창자를 갉아 먹어라”

하며 송충이를 삼켜버렸다. 신하들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손을 쓸 수 없었다.

얼마 후 어디선가 새들이 몰려와 송충이를 흔적도 없이 먹어치우고, 현륭원은 다시 푸른 숲이 우거진 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사람들은 정조의 효심이 하늘에 닿아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며 정조의 효심을 높이 우러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