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사는 1,200년대 중반 고려때 서운산 기슭에 고려의 어떤 국사가 창건을 하고, 대장암
(大藏庵)이라는 괴이한 이름을 붙여 놓았다고 하는데, 그 후로부터 약 100년 후인 1,300년대
중반, 고려의 국운이 한창 기울어지고 있을 무렵인 공민왕 시절에 나옹화상이 다시 고쳐짓고
청룡사로 고쳐서 불렀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700여년전, 나옹화상이 산세를 딱 보아하니 산에는 서운이 서려 있었고,
그 서운 사이로 청룡이 내려 앉는 모습을 보고 이름을 청룡사로 새로 고쳐 지었다고 하는데,
그때 당시 나옹화상이 서운 사이로 청룡이 내려앉는 모습을 같이 본 사람들은 아마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후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니, 말이 많이 와전되어 청룡이 서운을 타고
내려와 서운산이란 지명이 붙었다고 전해지고, 또 청룡이 내려 앉은 자리라 해서 청룡사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 지는데, 어쩌면 나옹화상이 절을 중창하고 대장암이라는 이름을 가만히
들어보니, 더럽고, 매스껍고, 냄새나는것 같고, 혐오스러웠기 때문에 바꾸었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고려의 공민왕때까지는, 고려의 국사들이 왕림을 했을정도면 당시 이름있는 유명한
사찰로 통했을텐데, 지금 현재에 이르러서는 작고 아담하고 소박한 사찰로 남아 있었다
이곳 서운산 청룡사는 조계종 본사에서나 볼 수 있는 일주문 같은 것은 없고, 저 위에 보이는
문을 청룡사로 들어가는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문 양쪽 옆으로는 작은 쪽방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절집이라기 보다는 마치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가 사는집처럼 후덕한
느낌이여서 이 곳을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 곳이 바로 안성 남사당 패거리들이 몸을 의탁하여 살았던 남사당의 애환이 서려있는 흔적이
남아 있는곳이기도 하고, 여성 꼭두쇠인 바우덕이가 몸을 의탁하여 살다가 폐병으로 인하여
23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던 비운의 땅이기도 하다
어느 농가의 머슴집 딸로 태어 났다는 바우덕이는 다섯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무슨 지병으로
드러누워 더 이상 어린딸을 돌 볼수 없게되자, 남사당에게 맞겨 졌는데, 안성 서운산 청룡사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재주가 출충하여 열 다섯의 어린 나이로 여성 사당 패거리의
대빡격인 꼭두쇠가 되었다고 하는데, 본명은 김암덕이라고 하고 시대 배경은 1800년대
중반이었다고 한다
바우덕이를 사랑했던 사람은 김경화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는 바우덕이보다 나이가
20세나 더 많은 사람이였다고 하고, 또 어떤 일설에는 30세나 더 많은 사람이였다고 하는데,
중요한것은 바우덕이를 사랑했던 사람이 20세가 더 많은 사람이냐 ? 아니면 30세가 더 많은
사람이냐 ? 하는것 보다, 그 들이 안성땅에서 어떤 삶을 살다가 갔느냐 하는것이 중요한 것이다
바우덕이는 스무살 젊은 나이에 40~50여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거느린 남자들만의 세계인
남사당의 대빵격인 꼭두쇠 노릇을 했었다는데, 그 무리들중에 유일한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느곳에 살고 있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 후 바우덕이는 남사당 패거리들인 남자들 틈에 꼽살이끼어 소리, 줄타기 등등을 배워
칠팔세 되던 해 부터는 그 재주가 돋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남자들 패거리 속에 섞여서 소리와 기예 솜씨를 탄탄하게 다져가던 바우덕이는 날로
인기가 상승하고 있었으며, 뭇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데, 드디어 그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김경화라고 한다
한데 남사당 패거리중에서도 기예가 특출한 그는, 바우덕이 보다 나이가 20세가 더 많다고
하기도 하고, 30세가 더 많은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재능이 뛰어난 다른 젊은 남자들도 많은
상황에서 남 보란듯이 바우덕이를 사랑할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바우덕이와 함께 이장 저장을 떠돌아가면서 같이 소리와 기예를 하는것만으로도 행복해
하다가 그녀가 스무살인가 되던해에 병을 얻었다는데, 그 것이 폐병이였다는 것이다. 남사당의
대빵격인 꼭두쇠가 페병을 얻었다면 이제 바우덕이도 남사당으로서의 생명도 끝장인 동시에
무리를 떠나야만 했었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녀를 열렬히 사모했던 남사당 패거리인 남자들도 하나, 둘 바우덕이의
곁을 떠나게 되고, 드디어 바우덕이는 병든몸을 이끌고 청룡사 부근의 마을에서 정착을 했다
하는데, 이 때 바우덕이를 끝까지 지켜준 사람이 바로 이경화라는 사람이였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고 병들어 누운 바우덕이를 동냥을 하면서 끝까지 병 수발을 들어
주었다는 사람이 이경화라고 하는 사람인데, 하루 웬종일 코피를 쏟아가며 하루 하루 죽어가는
그녀를 끝까지 보살피다가, 스물 셋의 나이로 바우덕이가 죽게되자, 그녀를 청룡사 개울가
무덤에 묻어 주고는 어디론가 떠나갔다고 한다
억새풀 같은 잡초에 묻혀있던 바우덕이의 묘를, 요즈음의 안성 남사당 예술인들이, 바우덕이의
행적을 기리고자 수소문 끝에, 청룡사 부근의 불당골에서 찾아 깨끗하게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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