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역사와 허구를 섞어 넣은 소설류인 ‘팩션’이 인기를 끌고 있다. 팩션을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나 영화도 늘어나고 있다. 이와 관련, 1976년 4월부터 1977년 3월까지 T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별당아씨’라는 드라마가 있다. 홍세미와 김세윤이 주연으로 나온 이 드라마는 원작이 있다. 작자 미상, 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박씨전’이다. 박씨전은 한국판 잔다르크나 신데렐라에 비유되는 소설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박씨전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한양의 이득춘이 늦게 낳은 아들 시백은 총명하고 비범하였다. 금강산의 도사 박 처사가 자신의 딸과 시백의 혼인을 청하자 득춘이 허락한다. 시백은 신부의 얼굴이 박색임에 실망하여 부인을 돌보지 않는다. 박씨는 후원에 피화당을 짓고 홀로 지내면서도 부덕(婦德)과 신묘한 도술로 가정을 풍족하게 하고 남편을 장원급제 하게 한다.
어느 날 박 처사가 와서 액운이 끝났다며 딸의 허물을 벗겨 주니 박씨는 절세미인으로 변하고 시백을 비롯한 가족들이 박씨를 사랑하게 된다. 시백은 병조 판서가 된다. 청 태종이 조선 침공에 앞서 시백과 임경업을 죽이려고 첩자를 보내지만, 박씨가 이 첩자를 쫓아버린다. 청 태종이 침입하자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란했다가 항복하고 많은 사람이 화를 당한다. 적장 용골대의 아우가 피화당에 침입했다가 박씨에게 죽고 복수하러 온 용골대도 박씨의 도술에 혼난다.’
박씨전도 독창적인 작품은 아니다. 박씨도 모델이 있다. 삼국지의 주역 중 한 명인 제갈량의 부인 황씨가 주인공이다. 황 부인(黃夫人)은 이름은 전하지 않지만 용모가 박색이었던 반면 재주가 비범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제갈량은 보기 드문 천재였을 뿐만 아니라 외모도 수려했다. 전도양양한 일등 신랑감인 제갈량이 추녀와 결혼하자 일찍부터 항간에서는 정략결혼설이 나돌았다. 제갈량이 명문가인 황씨 집안의 덕을 보기 위해 외모를 고려하지 않고 이 집안의 사위가 됐다는 것이다. 제갈량과 경쟁하던 오나라의 군사 주유가 손권의 이모인 절세미녀 소교와 결혼한 것과 대조되면서 제갈량의 결혼은 더욱 세간의 시선을 끌었다.
‘제갈량 정략결혼설’은 조선시대 우리 사회에서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용도실기(華容道實記)’라는 작품을 보자. 국한문 소설인 이 작품은 제갈량이 비록 추한 외모이지만 현명했던 아내 황 부인의 도움을 받는 내용을 적은 것이다. 박씨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황부인전(黃夫人傳)’도 있다.
이 작품은 박색의 황 부인이 뒤에 경국지색으로 환탈하고 뛰어난 신술을 지녀 남편인 제갈량을 돕는다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황 부인은 뛰어난 엔지니어였던 듯하다.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는 지난 1월 인터넷 과학신문 ‘사이언스 타임즈’에 기고한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고안한 군량수송차 목우유마(木牛流馬)는 아내 황씨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또 송나라 시인 범성대는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에서 공명이 훗날 목우유마를 만든 것은 아내 황씨의 재주를 전수받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제갈량과 황 부인의 고사가 박씨전으로 이어져 현대에 TV드라마로 제작된 것은 고전이 고전에 그치지 않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주간조선 2066호에서 퍼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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