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덕여왕 원년(647)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백담사. 비취빛 계곡이 아름다운 내설악 자락에 자리 잡은 산사에는 객진번뇌를 털어내고 설악영봉의 푸른 구름을 벗 삼아 출격장부의 기상을 다듬는 선불장 무금선원(無今禪院)이 있다.
무금선원은 갓 출가한 예비스님들의 초발심을 굳건히 할 기본선원과 법랍 20년 이상의 구참 납자들이 용맹정진하는 무문관이 공존한다. 그러나 구경경지를 향한 선객들의 정진 열기는 신․구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때문에 무금선원 곳곳에는 대자유인을 꿈꾸는 납자들의 서슬 퍼런 선기로 가득하다.
기축년 동안거 결제일을 하루 앞둔 11월 30일. 생사해탈의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해 해탈교를 건너는 납자들의 발길을 따라 산문에 들어섰다. 무설전 뒤편에 이르니 ‘출입을 통제한다’는 표지판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 넘어 세간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무문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문관은 3채의 목조건물이 ‘ㄷ’자 모양으로 배치됐고, 각각의 건물은 면벽참선을 하듯 산이나 계곡을 향해 서로 등진 채 납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곁눈으로 들여다본 무문관은 동안거 3개월 동안 내설악의 혹독한 겨울 추위에 대비하기 위해 건물 전체를 비닐로 감싸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올 동안거 이곳에서는 무금선원장 신룡 스님을 비롯해 11명의 스님이 문 없는 문을 열기 위한 화두를 든다.
무문관에서는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6년간 스스로를 가두고 산다. 그리고 ‘깨닫지 못한다면 문밖의 세상에 나서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바깥세상과 절연하고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다. 때문에 폐문정진(閉門精進)으로 불리기도 한다.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 무문관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는 하루 한 끼 공양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작은 공양구 뿐이다.
묵언정진은 기본이고 편지와 소포, 전화도 금하며 독서조차 할 수 없다. 오직 자신의 마음자리를 찾기 위해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만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눕지 않고 참선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잠자지 않고 수행하는 용맹정진과 더불어 가장 어려운 수행법의 하나로 꼽힌다.
영락없는 감옥이지만 무문관을 찾는 스님들의 정진 열기는 날이 갈수록 더해 올해도 1년 전부터 예약(?)한 스님들이 겨우 방부를 들일 수 있었다. 1년여를 기다려 방부를 들인 화암사 주지 동선(조계종 전 기획실장) 스님은 “대분심을 내려고 들어왔다”며 짧은 한 마디로 무문관에 들어가는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납자들 사이의 매력이 없는 게 아니다. 파계사 한주 지수 스님은 중국 당나라 고승 황벽 선사의 시를 빌어 무문관의 매력을 털어놓았다.
“뼈를 깎는 추위를 겪지 않았던들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무문관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24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스런 삶입니다. 큰 뜻을 품은 대장부라면 한 번 해 볼만 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이 바로 오늘, 동안거에 무문관을 찾은 납자들은 물론 제방의 선원에 들어선 모든 선객들의 마음이 아닐까.
무금선원장 신룡 스님은 “어려운 시기에 큰스님들이 많이 나왔듯이 어려움 속에서 가풍이 살아 있으면 그 집안이 크는 법이기에 무문관 수행과 같은 고행이 필요하다”며 “자연합일적이고 엄격하며 청빈한 두타수행인 무문관은 명안납승이 나올 든든한 토대”라고 말했다.
일대사 해결을 목표로 선방에 좌복을 펼친 스님들의 모습과 겹쳐서 들여오는 백담사 계곡의 물소리가 더없이 청명하고 힘차기만 하다.
한편 12월 1일 기축년 동안거 결제를 맞아 전국 100여 개 선원에서는 2300여 명의 수좌 스님들이 일제히 3개월간의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동안거 입제 하루 전인 11월 30일 각자의 소임을 정하는 용상방(龍象榜)을 작성한 결제 대중은 12월 1일 사찰별로 방장 스님 등 큰스님의 결제 법문을 청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안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