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행은 상관없다, 능력만 있다면 내 사람이다"
한때의 敵도 중용하는 실용주의적 인재등용
'삼국연의'는 세계적인 '역사소설'이다.
이 책은 촉한 때 활동한 군신을 지나치게 추앙하고, 조조(曹操)를 깎아내리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이 책은 오늘날 부녀자들이 모두 조조를 미워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마력을 엿볼 수 있다."
중국 지식인 호적(胡適)은 1917년 신문화운동을 이끌던 잡지 '신청년'에서 조조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자고 제안했다. "안타깝게도 중국인들은 너무 주희(朱熹) 같은 사람에게 중독돼 한결같이 조조를 미워하고 매도해왔다"는 것이다. 동시대 학자 장태염(章太炎)은 '속임수 명수'로 알려진 조조에 대해 "진실로 지혜와 계략이 출중했기에 비록 속임수를 썼을망정 정도(正道)에 가깝다"고 편들었다. 조조를 간웅(奸雄)의 전형이자 잔인하고, 속임수를 일삼는 악한으로 묘사해온 세평을 뒤집은 것이다.
조조가 악인으로 낙인찍힌 것은 남송(南宋) 때 주희가 편찬한 '자치통감강목'과 명나라 때 소설 '삼국연의'의 탓이 크다. 주희는 대의명분론에 입각, 유비가 세운 촉(蜀)을 정통으로 떠받들고, 조조를 나라를 찬탈한 도적으로 깎아내렸다. '삼국연의'는 오랫동안 세간을 떠돌며 전승된 작품으로 역사적 사실 못지않게 허구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두 책은 조선에서도 널리 읽혔다. 이 때문에 옛사람들은 주자학의 도덕주의적 역사관과 문학적 허구를 통해 삼국시대를 이해하면서 조조를 부정적으로 보게 됐다.
조조(155~220)는 입신(立身)부터 드라마틱하다.
후한(後漢) 말기에 환관의 양자로 들어간 조조는 권력자의 가문에서 자라 20세에 관직에 나갔다. 수도 낙양의 궐문을 지키는 변변찮은 자리였다. 조조는 "규정을 위반하는 자는 누구든 몽둥이로 때려죽인다"며 규율 엄수를 선언했다. 몇달 뒤 황제가 총애하는 환관의 숙부가 야간 통행금지 규정을 어기자 조조는 몽둥이로 그를 때려죽였다. 세도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조조를 세상은 다시 보게 됐다.
이런저런 관직을 지내고 낙향했던 조조가 다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한(漢) 황실을 전횡하는 동탁(董卓)을 토벌하는 군대를 일으키면서였다. 황건적을 토벌한 뒤 그 병졸 30만명을 거둬들여 '청주병(靑州兵)'으로 재편하면서 세력을 확대했다. 헌제(獻帝)를 옹립하면서 위세를 떨쳤다. 승상을 거쳐 위왕(魏王)에 오르면서 실권을 장악했으나 스스로 황제가 되는 것은 사양했다. 아직은 명분이 부족하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성공비결은 적절한 인재등용이다.
조조는 무엇보다 천하의 인재들을 중용하는 것이 패권을 얻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품행이 바른 인물이 반드시 진취적인 것은 아니며, 진취적인 인물이 반드시 품행이 바른 것은 아니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도덕적 잣대로 인재를 내치지 않고, 재능만을 보는 실용주의적 접근이 눈에 띈다. 조조는 제환공(齊桓公)을 도와 패업을 이룩한 관중이 청렴한 선비가 아니었고, 한 고조 유방이 그 형수와 정을 통한 혐의를 받은 진평(陳平)을 중용, 대업을 완수한 사실을 들어 재능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추천할 것을 밝혔다. 한때의 적도 귀순하면 중용했다. 순욱·곽가·가후 등 조조의 책사와 부하들은 원래 심복이 아니었으나, 귀순한 후에는 이들을 성의껏 대우하고 중책을 맡겼다.
조조의 용인술(用人術) 가운데 독특한 점은 등용할 수 있는 자는 정성껏 쓰고, 그럴 수 없거나 등용되기를 피하는 자는 제거해 버린 것이다. 위나라 건국에 둘도 없는 공을 세운 순욱(旬彧)을 자살로 이끌고, 책사 공융(孔融)은 불경하다 하여 대역죄로 몰아 본인은 물론 처자식까지 죽였다. 한때 사윗감으로 생각했던 열일곱살 주불의(周不疑)는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 조조가 아끼던 아들 창서가 죽자 어려서부터 재능이 남달랐던 그가 후계체제에 위협이 될까 봐 죽여버린 것이다.
조조는 낮에는 군사 전략을 강구하고 밤에는 유가 경전을 읽으며 사색에 잠겼으며 직접 뛰어난 시문을 지었던 문장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간교하다는 평가는 늘 따라다녔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에는 조조가 주변 사람들에게 올가미를 씌워 문제를 해결한 일화가 나온다. 군량미가 부족했던 조조가 담당자에게 대책을 물었다. 그는 "되를 작게 하면 된다"고 답했고, 조조는 "좋다"고 했다. 나중에 조조가 사람을 속였다는 비난이 일어나자 조조는 담당자에게 "자네를 죽여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조조는 담당자를 죽인 뒤 "되를 작게 해 관청의 곡식을 빼돌린 죄를 물어 참수했다"고 말했다. 교묘하게 책임을 떠넘기고 대중조작으로 분위기를 자기편으로 이끌어간 것이다.
중국 저작 특유의 장황한 서술과 중복 때문에 책이 두꺼운 것이 아쉽다. 그러나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 '자치통감' 등 1차 사료를 종횡무진 누비며 조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상당 부분 깨뜨리고 역사적 실체에 접근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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