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 작 '밀희투전'. 종이에 담채, 22.4×27.0㎝, 조선시대
창문이 희붐한 새벽녘. 투전으로 밤을 지새운 듯 네 명의 사내가 투전에 빠져 있다. 정적인 가운데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아마 적지 않은 판돈이 걸렸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후기의 어두운 사회상을 그린, 긍재 김득신(1754~1822)의 '밀희투전'은 투전 중인 사람들의 심리를 포착한 그림이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함께 조선 3대 풍속화가로 통하는 긍재는 도화서 화원으로 초도첨사까지 지낸 스타급 화가다. 단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긍재의 풍속화는 단원과 차이가 있다. 주변 경관이나 분위기 설정으로 내용에 활력을 불어넣거나 일상의 단면을 익살스럽게 포착하여 자신만의 화풍을 구사했다.
18세기 투전판의 주연과 조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옛 그림을 감상하는 방식을 따라 '밀희투전'을 보면, 먼저 오른쪽 구석에 도박판의 분위기 메이커인 술상이 눈에 띈다. 그리고 시간을 절약하게 해주는 요강과 가래를 뱉는 타구가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바로 옆에는 술기운 탓인지 얼굴이 불콰해진 사내가 있고, 왼쪽에는 안경 쓴 사내가 앉아 있다. 그 앞에 허리춤에 돈주머니를 찬 사내 둘이 투전에 몰입 중이다.
이들은 흥미롭게도 주연과 조연으로 나눌 수 있다. 인물의 크기와 얼굴의 각도가 배역의 비중을 말한다. 뒤쪽의 두 사내가 주연이고, 앞쪽의 두 사내는 조연이다. 뒤쪽의 안경잡이와 얼굴이 불콰한 사내는 앞의 두 인물에 비해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체구가 크다. 그리고 당시에 흔치 않았던 안경과 살이 두툼한 얼굴은, 이들이 돈푼깨나 가진 인물임을 알려준다. 반면에 앞의 두 사내는 자세도 측면인데다가 덩치도 작고, 외모도 평범하다. 영화로 치면 무명의 '등장인물 1, 2' 정도 되겠다. 이 그림은 뒤쪽의 두 사내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조선 후기, 중국에서 들어온 투전은 길고 두꺼운 종이쪽지 80장 내지 60장으로 하는 도박이다. 종이쪽지 한 면에 인물 새 물고기 짐승 벌레 등의 그림이나 글귀를 적어 끗수를 표시한다. 놀이 방식은 여럿이라 전하지만 지금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화투에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 화투 용어로 알려진 '땡'이나 '족보', '타짜'는 원래 투전 용어였다. 중인 이하의 계층에서 시작된 투전은 나중에는 양반 계층에까지 확산된다. 점차 사기도박에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속출하면서 사회문제로 번진다. 이에 따라 투전 금지조치가 내려지고, 사람들은 투전을 몰래 즐겼다.
손동작으로 표현된 치열한 심리전
'밀희투전'은 투전판의 미묘한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투전꾼들의 심리가 두드러진 부위는 어디일까? 바로 뒤쪽 사내들의 손동작이다. 얼굴이 불콰한 남자는 시선이 왼쪽을 향해 있지만 투전 쪽을 뭉쳐 쥔 두 손은 오른쪽 아래로 가 있다. 자기 쪽을 숨긴 채 상대방에게 신경을 쓰는 중이다.
여기서 상대방이란 안경잡이 사내다. 이 사내가 지금 투전 쪽 하나를 내미는 중이다. 왼손에 잡은 투전 쪽은 남이 볼까봐 가슴팍으로 바짝 당겨 잡았다. 조심스러운 폼을 보아하니 우유부단한 '소심남'이다. 얼굴 붉은 사내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이 안경잡이가 내미는 쪽과 왼손의 쪽들이다. 안경잡이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하다. 소심한 안경잡이와 얼굴이 붉은 사내의 눈치 보기가 재미있다. 혹시 이들의 패가 별로 좋지 않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돈을 딴 사내는 두 조연이란 뜻인가? 그래서 주연들이 쫀쫀하게 심리전을 펴는 게 아닐까? 그림에 감정을 이입하고 보면, 상황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투전꾼의 심리를 그린 그림
일반적으로 등장 인물의 시선이 집중된 곳이 그림의 중심이 된다. 단원의 '씨름도'의 경우는 구경꾼의 시선이 집중된 씨름꾼이 그림의 중심이다. 그런데 '밀희투전'은 그렇지 않다. 사내들의 관심은 안경잡이의 오른손에 가 있지만, 정작 오른손은 존재감이 별로 없다. 내미는 손이, 배경인 무릎과 함께 그려지는 바람에 묻혀 버렸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림이 투전판의 상황보다 투전꾼들의 심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뜻 같다. 관심의 초점인 안경잡이의 오른손이 확실히 부각되지 않음으로써, 감상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흩어진다. 등장 인물의 손동작과 얼굴 등을 살피며, 그곳에 나타난 투전꾼들의 미묘한 심리상태를 미소 짓게 된다. 사내들은 한사코 마음을 숨기려 하지만 무심한 손은 천상 '청개구리 심보'다. '수화(手話)'를 하듯이 각자의 속내를 은근히 드러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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