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구동의 운곡 원천석 묘역입니다.
운곡 원천석 선생의 묘역은 원주시 행구동 산 37번지에 있으며 친구인 무학대사가 소점 해주었다고 한다.
운곡(耘谷) 선생의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이다. 정용별장을 지낸 열(悅)의 손자이며 종부시령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 말의 혼란한 정계를 개탄하여,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부모를 봉양하고 농사를 지으며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조선의 태종(太宗)이 된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 바 있어, 고려가 망하고 1400년 태종이 즉위한 뒤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원주의 치악산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조선3대 태종이 된 이방원이 그 곳까지 찾아갔지만 몸을 숨기고 만나주지 않았다.
치악산의 태종대는 그 때 태종이 원천석을 기다리면서 잠시 쉬었던 곳이라고 한다.
태종이 그를 찾아간 것은 스승에 대한 예우를 생각한 것도 있지만 뛰어난 학자를 새 왕조에 받아들임으로써 명분을 얻어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뜻도 있었다. 태종은 원천석의 아들 원형을 현감으로 등용함으로써 다소나마 뜻을 이루었다.
《운곡시사(耘谷詩史)》에 실려 있는 회고시 등을 통해서, 그가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년에 《야사(野史)》 6권을 저술하였으나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를 두려워한 증손이 불살랐다고 한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망한 고려를 회상하며 쓴 《회고가》가 있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五百年)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강원도 원주의 칠봉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묘갈(墓碣) 내용
선생은 원주 사람으로 성은 원(元)씨요. 이름은 천석(天錫)이고, 자는 자정(子正)이며, 고려국자진사이다. 고려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숨어살면서 호를 운곡(耘谷)이라 하였다. 선생은 고려가 망하자 치악산에 들어가 종신토록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태종이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라고 불렀으나 나오지 않자 태종이 그 절의를 높이 추앙하여 선생의 초막을 찾았을 때 선생은 이를 피하고 만나지 아니하였다. 태종이 계곡 바위에 올라 선생의 거처를 지키는 노파를 불러 후사하고 선생의 아들 형(泂)에게 기천현감(基川縣監)의 벼슬을 내렸다. 후인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고 하였는데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근방에 있고, 지금 원주시가지 동쪽 10리쯤 되는 거리인 석경(石鏡, 石經이라고도 쓰고 우리말로는 돌갱이라고 함)에 운곡선생의 묘가 있으며 선생의 묘 앞에 있는 묘가 부인의 묘라고 이르고 있다.
선생에게는 6권의 저서가 있었는데 이는 고려가 망할 때에 일을 기록한 것이라 자손들에게 함부로 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여러 대가 지난 뒤 어느 자손 한 사람이 하도 궁금하여 몰래 열어 보고는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 책은 우리 가족에게 관한 일"이라고 말하고 불살라 버려 지금은 이 책이 전하지 않고 다만 남아 있는 시집이 있었으니 이른바 이것이 시사(詩史)이다.
내가 듣기로는 군자는 은둔하여도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선생이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어살았으나 세상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며 도를 지킨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몸을 깨끗하게 함이다. 백이(伯夷)의 말에 "옛날에 선비들은 잘 다스려진 성세를 만나면 그 맡은 바 임무를 피하지 아니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면 구차하게 살지 않는다 하였으니 천하가 암울하니 이를 피하여 깨끗하게 내 지킬바를 지킴만 못하다." 하였다. 이런 탓으로 전에 이르기를 날이 추어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홀로 푸르름을 알게 되고 세상이 어지러워 뒤에야 맑은 선비를 알아보게 된다.
맹자에 이르기를 " 백이(伯夷)는 그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그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않고 잘 다스려진 세상에는 나아가고 어지러운 세상에는 물러났으니 백이는 성인으로 청백한 사람이다." 하였으니 선생은 백이에 견줄만한 사람이다.
부인 원씨는 선생과 같은 원씨가 아니니 원주에 두 원씨가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장남 지(沚)는 직장동정(直長同正)이고, 차남 형(泂)은 기천현감(基川縣監)이다. 선생의 후손들이 매우 많으나 기천현감의 후손이 더욱 많다.
찬(贊)하여 이르기를 뜻을 세워 암혈(巖穴)에서 사는 선비도 나아가고 물러날 때가 있고, 세상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뜻을 굽히지 않았도다. 그 몸이 욕되지 않았으니 후세에 모범이 되어 우직(禹稷)과 이제(夷齊)와도 같으니 선생은 과연 백대의 사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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