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사
ㆍ 지정번호 : 비지정
ㆍ 소재지 :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충효사는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에 있으며 출천지효로 알려진 황무진의 사당이다.
황무진은 원주 봉산1동 무진고개 너머에서 나서 자랐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골무내기 마을 (문막읍 반계리)로 옮겨서 평생을 살았다. 아버님을 일찍이 여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효성이 지극하여 출천지 효자(出天之 孝子)라는 칭송을 받으며 살다가 정묘호란(丁卯胡亂)때 김창일, 허후등과 같이 의병활동을 하여 그 공으로 절충장군 용양위에 봉해졌다. 그 후 1634년 인조 12년(仁祖12年 )에 나라에서 명하여 효자 정문(旌門)을 그의 집앞에 세우게 하였으며 효종(孝宗)원년에는 특히 일중추(逸中樞)를 재수하고 자룡(子龍)이라는 이름까지 내렸다. 85세 까지 장수하고 효종 34년에 별세하니 시호를 충효공(忠孝公)이라 하고 그 이듬해 다시 효자정문을 세우게 하며 살아서는 청살문, 죽어서는 홍살문 하면서 사람들이 두 번씩이나 효자정문을 나라에서 세우게한 황효자를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칭송하였다. 황효자의 묘소는 충효사에서 약200m 올라간 산 능선에 있으며 묘에는 상석과 망주석이 있고 묘비가 있다. 사당 현판은 충효사라 했고 그 아래는 충효사라 했고 그 아래는 충신효자절충장군행 용양위부사과황무진지문(忠臣孝子折衝將軍行 龍釀衛副司果黃戊辰之門)이라 쓰여져 있다.
사당 안에는 충효황무신위『忠孝黃公神位』라고 쓴 위패가 있는데 이 위패는 효종(孝宗)이 내려준 것이다. 사당인 충효사 옆에 있는 충호비(忠虎碑)는 황효자가 생전에 타고다니던 호랑이의 영신을 뜻한것이다. 본래 이 사당은 향교내에 건립되었던 것을 1965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사당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익공집이다.
문막 반계리에 있는 충효사입니다.
10월 어느 따스한 날 찾았는데, 소식이 늦었습니다.
문막 반계리 골무내기 마을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충효사.
子龍이라고도 불리는 효자 황무진의 위패를 모신 충효사의 旌門입니다.
생시에 내리면 청살문, 사후에 내리면 홍살문이라고 하는데. 충효사에는 특이하게 청살문과 홍살문이 모두 있습니다.
이곳에는 홍살문이 있고, 마을 입구인 국도변의 입구에는 청살문이 하나 더 따로 있습니다.
충효사 대문에는 景賢門이라는 편액이 따로 걸려 있지요.
황효자를 태우고 다녔다는 호랑이의 덕을 기린 虎碑를 모신 비각입니다.
탑비에는 황효자에 얽힌 이야기가 빼곡이 새겨져 있고...
골무내기 마을의 가을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충효사를 향토유적으로 지정한 과정은 아래에 소개하고, 황효자의 효성을 다룬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별도로 올리겠습니다.
충효사 향토유적 지정
강원도 원주시는 2009년 11월 11일자로,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에 소재하고 있는 충효사(忠孝祠) 사당을 원주시 향토유적 제2009-3호로 지정했다.
원주시는 국가나 강원도 차원의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못했으나, 원주 향토의 역사와 관련된 유적․유물 등을 지속적으로 보호·관리하기 위해 지난 2007년 12월14일 ‘원주시 향토유적 보호조례(조례 제765호)’를 제정했다.
이후 2008년 3월, 중앙문화재위원과 강원도문화재위원 및 전문학자 등으로 ‘원주시 향토유적 보호위원회’를 구성해 2008년 4월 23일자로 경순왕 영정을 모신 경천묘(敬天廟)와 운곡 원천석 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창의사(彰義祠)를, 2009년 4월 30일자로 충렬사(忠烈祠)와 생육신 원호(元昊) 묘역(墓域)을 원주시 향토유적으로 지정한 바 있다.
충효사(忠孝祠)는 황무진(黃戊辰, 1568~1652), 일명 황자룡(黃子龍)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으로, 아버지 황징(黃澄)과 어머니 원주(原州) 이씨(李氏) 사이에서 1568년 음력 3월 23일에 태어났고, 무진년(戊辰年)에 낳았다고 하여 이름을 무진(戊辰)이라고 했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어서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겼고 기골이 장대했다.
임진왜란 때 군문(軍問)에 들어가 왜적의 장수를 사로잡은 공이 있어 황장사(黃壯士)라 불려졌고, 이러한 공으로 원주목사(原州牧使) 한준겸(韓浚謙)에 의해 병방(兵房)으로 발탁됐다. 효성이 지극하여 50리 길을 매일 어버이께 장국밥을 봉양했고, 100일째부터는 호랑이가 그를 태우고 다녔으니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 하늘이 낸 효자라고 칭송했다.
1608년 선조(宣祖)가 승하하시니 부모의 상사(喪事)와 같이 삼년상(三年喪)을 입었고, 이원익(李元翼), 임숙영(任叔英), 김세렴(金世濂)이 이러한 충의(忠義)를 찬양했다.
1610년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드렸고 5년을 더 살다가 돌아가자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섬겼다고 한다. 한준겸이 크게 감탄해 시를 지어 읊으니 김상용(金尙容), 김창일(金昌一), 이식(李植)이 차례로 공의 효행을 화답하였고, 이로부터 명현(名賢)들이 신분과 지위의 고하(高下)를 가리지 않고 교유했다.
1634년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1635년 중국 황제에게 알려져 소련(少連), 대련(大連), 황향(黃香)과 함께 사효(四孝)라 해 이련(二連), 이황(二黃)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1650년 효종(孝宗)은 황효자의 이름을 자룡(子龍)이라 지어주고 절충장군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龍驤衛副司果) 벼슬을 하사했다. 이해에 양만고(楊萬古)와 오대산(五臺山), 설악산(雪嶽山), 금강산(金剛山) 등을 유람하고 돌아오니 사람들이 용담도인(龍潭道人)이라 불렀다. 1652년 음력 4월 22일 자녀와 친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천한 사람의 예로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고 돌아가니 85세였고 4남 4녀를 두었다. 시호를 충효(忠孝)라 내리고, 1653년 나라에서 다시 홍색(紅色)의 정문을 세우니 세상 사람들이, “살아서는 청정문이고 죽어서는 홍정문이다”하여 생청사홍(生靑死紅)이라고 칭송했다.
황효자를 봉안한 충효사(忠孝祠)는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골무내기 마을에 있다. 1704년에 건립됐고, 현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과 1994년 김충렬 박사가 글을 지은 ‘충효공(忠孝公) 황자룡(黃子龍) 정려비(旌閭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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