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임진왜란 포로 강항의 '간양록'

難勝 2011. 1. 11. 20:14

 

 

임진왜란 포로 강항의 '간양록'

 

수은 강항(睡隱 姜沆,1567-1618)은 임진왜란때 일본에 끌려갔던 전쟁포로로, 덕천(德川) 일본에 처음으로 유교를 가르친 사람이며, 죽살이치는 포로 생활을 <간양록>으로 남겼다.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으로 호조랑(戶曹郞)이었던 그는 정유재란을 만나 군량미를 독려하는 직책으로 고향에 내려왔다가 왜군에 포로가 되었다. 정유(丁酉,1597)년 9월 14일에 가족과 함께 영광(靈光) 앞바다에 피난의 배를 띄우고 23일 왜적에 잡혔는데, 이 때 무안 앞 바다를 메운 600~700척의 거의 절반이 포로로 잡힌 우리나라 남녀를 실은 배였다고 한다.(<적중봉소(敵中封疏)>)

 

문벌이 높은 문인학자였던 강항은 왜(倭)의 땅에서도 지방 토호의 보호 속에 일본에 퇴계학(退溪學)을 전한 유학의 스승이 되었고, 그 옛날 백제의 왕인(王人) 박사가 천자문을 전했던 뱃길로 그는 다시 조선 유학의 씨를 뿌린 제2의 왕인박사였다.

 

그러나 4년이나 이어진 포로 생활 속에서 당연히 고국을 향한 망향(望鄕)과 도망할 노력이 이어졌고,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잡혀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보내졌다는 무관 이엽(李曄)이 도망하다 잡혀 자결하며 남긴 한 편의 절명사(絶命辭)에 큰 감명을 받았다. 

 

봄이 금방 동으로 오니 한(恨)이 금방 길어지고

바람 절로 서쪽으로 부니 생각도 절로 바쁘구나.

밤 지팡이 잃은 어버이는 새벽달에 부르짖고

아내는 낮 촛불처럼 아침볕에 곡을 하리.

물려받은 옛 동산에 꽃은 응당 졌을 게고

대대로 지킨 선영(先塋)에는 풀이 정녕 묵었으리.

모두 다 삼한(三韓)이라 양반집 후손인데,

어찌 쉽게 이역에서 우양(牛羊)과 섞이리.

(원문은 한문,<국역 해행총재>)

   

전라 좌병영(左兵營)의 종3품 우후(虞侯) 벼슬로 포로 된 이엽은 고국 동포들과 결탁하여 배를 사서 하관(下關)까지 가서 왜적의 추적을 받자, 칼을 빼서 자결하며 이 시를 남겼다고 했다.

 

강항은 이 시를 얻어 보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이렇게 차운(次韻)했다.

만권의 책을 읽은 서생이 면목 없네

두 해나 궁발(窮髮)에서 숫양(羝羊)을 먹이다니

인의(仁義)를 이루고 의를 취하는 것은 우리의 가훈(家訓)인데

아이들까지 개와 양에게 절하는 것 부끄럽네”

(원 한문)

 

‘궁발’은 초목이 나지 않는 모진 땅, 이 땅에 포로 된 동포들에게 그는 격문을 보내 귀국을 독려하고, <적중봉소(敵中封疏)>로 비밀문서를 조선 임금에게 보냈다. 물론 스스로 귀국을 감행했다. 이 정유년에 포로 되었던 정희득(鄭希得)은 이때 일본에 끌려 간 조선 사람이 10만 이상이리라고 했는데(《月峯海上錄》), 고국으로 쇄환(刷還)된 수는 7,5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內藤雋輔;<文祿慶長役被擄人の硏究>,東京大學出版會).

 

<간양록>은 같은 이름의 방송극과 조용필의 애끓는 주제곡으로도 널리 알려진 임진란 실기문학이며, 강항의 자취는 그가 머물렀던 일본 땅 애원현대주시(愛媛縣大洲市)에 지금껏 역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