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切唯心造, 마음을 아는 게 부처되는 길
부처님께서는 2500여년전 화사한 봄날 룸비니 꽃동산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천상 천하에 오직 나 홀로 위대하니(天上天下 唯我獨尊) 일체 고통받는 중생을 내가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一切皆苦 我當安之).” 여기에는 당신의 깨달음과 미래중생을 제도하려는 서원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위대한 존재인지를 알면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해 처절하게 수행할 것이고, 수행을 통해 스스로가 위대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고통받는 중생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 말씀에는 자리와 이타가 함께 합니다. 중생을 건지고자 하는 간절함이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성장하시면서 생로병사와 우주의 성주괴공에 대해 고민하십니다. 그러다가 결국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2월 8일, 마부 차익을 앞세워 거룩한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국왕을 포기하고 법왕이 되고자 첫발을 옮기신 것을 ‘설산수도’라고 합니다. 국왕으로는 아무리 정치를 잘한다 하여도 모든 백성을 궁극적 행복으로 인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법왕이 되어 모든 중생을 제도해 행복하게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설산으로 구도의 길을 떠나신 것입니다.
무상을 깨닫지 않고는 출가해서 수도를 할 수 없습니다. 철저히 무상을 깨달아야 수도가 됩니다. 육체만 출가했다고 한들 진정한 출가이겠습니까. 인생과 우주가 그대로 무상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출가해서 수도할 수 있습니다. 삶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수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미 무상을 처절하게 깨달아서 수도가 가능했던 겁니다. 출가는 위대한 포기이고, 수도는 처절한 전쟁입니다. 수도의 전제조건은 우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질질 끌려다니고서는 절대로 수도할 수 없습니다. 밖으로 맺어진 모든 인연을 지워버려야 됩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출가는 위대한 포기입니다. 왕위도 버리고, 아름다운 부인 아쇼다라도 버리고, 하나뿐인 아들 라훌라도 버렸습니다.
포기하지 않은 수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여야 출가 수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고, 소중한 것이 남아 있고 부인, 아들, 돈, 명예가 남아 있는데 출가해서 수도가 되겠습니까.
설사 수도를 한다 해도 도를 닦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는 처절한 것입니다. 민중을 위한 처절한 걸음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민중을 위한 처절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출가해 ‘박가바’ 칼라마, 라마풋다 등의 성자를 찾아다니면서 도를 닦아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고도의 선정삼매에 들어갑니다. 비상비비상처정을 얻으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삼계 안의 일이지 삼계를 초월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상비비상처정을 얻었다 하더라도 생사를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떤 성자나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고 보리수 아래에 앉아 고행의 길을 걷습니다.
부처님은 수자타 소녀에게 유미죽을 얻어 드시는 순간 함께 보리수 아래에서 수행하던 다섯 비구가 부처님을 떠나갑니다. 부처님은 그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선정에 들어 삼칠일동안 처절한 수행 끝에 12월 8일 새벽, 샛별을 보고 깨달으십니다.
이 순간 부처님은 일체가 유심조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 내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일어나고 내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모든 것은 유심의 조작이라는 겁니다.
행복도 불행도 마음 안에 있고 성공 실패, 지옥 극락, 중생 부처도 이 마음 안에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마음, 이 셋이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의 조작입니다. 이 마음을 한번 탁 돌리면 극락세계가 목전에 있고, 마음 한번 돌리면 부처님 세계가 눈앞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이 게송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가장 먼저 설파하신 「화엄경」의 요체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의 실체를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라. 법계의 일체는 오직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처절한 수행 끝에 ‘유심조’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결국 이 마음은 우주실체요,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알면 삼세 모든 부처님을 아는 것이 되고 그 부처님을 알았다는 것은 곧 부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도하는데 첫째 조건은 깨달을 수 있다는 확연한 믿음입니다. 둘째가 대 용맹심입니다. 용맹이 없는 전쟁은 승리할 수 없듯이 용맹심이 없는 수도는 제대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부단한 정진입니다. 확연한 믿음과 대용맹심으로 끝없이 정진하게 되면 결국 깨달음의 세계를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용맹심, 정진은 수도자의 3대 요건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춰지면 우리는 반드시 깨달음을 이루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세 명의 수행자가 삼십년 수도를 해도 진전이 없었습니다. 세 스님은 안거를 앞두고 안거에서 일대사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냥 죽기로 결의했어요. 그리고 3명 분의 한 철 식량과 칼 세 개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결제에 앞서 남루한 노인이 찾아와 함께 정진하겠다고 청을 했습니다. 식량이 3인분 밖에 없어 세 스님은 노스님을 쫓아내기로 작전을 짰습니다. 3개월 동안 장좌불와를 하기로 하고 수행 중에 졸면 사정없이 장군죽비로 내리치기로 했습니다. 결제가 시작되고 첫날부터 노스님의 몸은 동네북이 되었습니다. 노스님을 쫓아내기 위해 죽비를 내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반전이 됐습니다. 노스님이 세 스님을 때리느라 정신이 없는 겁니다. 세 스님은 노스님에게 얻어맞지 않으려고 억지로 잠을 참다보니 순식간에 한철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해제 당일 노스님이 걸망을 메고 떠나면서 세 스님에게 인사를 합니다. 식량도 모자라는데 함께 한철을 살겠노라고 해서 미안하고, 한철 공부 잘 했노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주장자를 한바퀴 휙 돌리고 떠나는데 그 주장자가 푸른 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세 스님이 탁 알아차립니다. 30년 수행의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사유와 관조가 부족합니다. 쉽게 행동하고 쉽게 말하고 쉽게 결정합니다. 인지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유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처절한 수행은 이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잠시요, 무상합니다. 영화도 영원히 보장받을 수 없고, 권력 돈 명예도 영원히 보장받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무상한 줄 알고 부처님께서 처절하게 수행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삶을 냉혹하게 진단하고 진지하게 살아간다면 인생의 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설산수도 모습은 처절한 수행으로, 깨달음을 성취하고 중생을 제도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쉽게만 얻으려는 현대인들에게 부처님의 처절한 수행을 보며 깊이 사유하고 성찰하는 삶을 당부드립니다.
부산 해인정사 주지 수진스님
수진스님은 1971년 부산 마하사에서 문성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6년 해인승가대학 졸업 후 1993년부터 1999년까지 해인승가대학장을 비롯한 조계종 종앙종회의원·전국승가대교직자협의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부산 해인정사 주지를 지내셨습니다.
위 법문은 빛고을 불교아카데미 ‘인간 붇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을 만나다’에서 설한 수진스님의 ‘설산수도상’ 법문 내용을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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