拈華茶室

한국의 선차(禪茶) 문화

難勝 2011. 1. 22. 05:24

 

 

한국의 선차 문화

 

★ 선차의 유입

 

한국의 차는 자생설과 인도 유입설, 중국유입설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음다 풍속의 증가에 직접적인 동기는 선종의 유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겠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김해의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 온 차라고 한다.”고 하였고, 이규보(1168~1235)의 『남행일기』에 “사포 선인이 원효방의 원효스님(579~631)에게 차를 공양한 일화”는 모두 차의 유입(流入)과 음다 풍속의 확대가 불교와 관련이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삼국유사』 3권 <탑상편>에 “정신대왕의 태자 보천, 효명 두 태자가 매양 골짜기의 물을 길어와 차를 다려 공양했다”고 하는 것, 충담선사가 경덕왕(742~765)의 요청으로 차를 올린 일, 중삼중구일(重三重九日)에 삼화령 부처님께 차를 공양한 일은 이미 승려들이 수행 중 차를 마셨으며, 차를 부처님에게 올리는 의례가 일부 승려들 사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실과 수행승, 사대부들 사이에서 익숙한 음다 풍속이 있었다는 것은 차가 왕의 하사품이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음다 풍속이 일반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경과되었다. 선덕여왕 때부터 차가 있었다고 하나 일반화는 시기적으로 어려웠으며 선종의 유입과 함께 사원의 음다 풍속이 증가되어 사대부와 귀족층으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흥덕왕 3년(828) 공식 외교관 신분의 대렴이 차씨를 들여 온 일, 왕명으로 차씨를 지리산에 심게 한 것은 음다 풍속의 증가에 따른 수요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도되었을 가능성이 큰 듯하다. 도당 수행승들의 입국이 활발했던 이 당시 공식적인 차씨 유입은 그만큼 귀족층의 차에 대한 관심이 높았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당시 왕의 하사품과 귀족층이 선호한 차는 당에서 수입한 단차가 주류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략 음다 풍속의 증가는 선종의 유입과 관련이 깊거니와 차의 유입지역과 구법승들의 구법지역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 당시 신라 구법승들의 구법지역의 대부분은 양자강 하류인 강서, 사천, 양주 지역이었다. 특히 신라 말 구법승이 강서지역에 머무른 것은 마조도일(709~788)과 서당지장(735~814)이 이곳에서 선풍을 날렸고, 당말 오대 이래 북방 민족이 한족 정권을 위협하여 북방 항로로 가는 것이 용이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한반도에서 강절 연해(江浙沿海)로 이어지는 남방 항로가 본격 이용된 것도 한 요인이다.

 

신라 구산선문 중 실상산문 실상사 홍척, 가지산문 보림사 도의, 동림산 태안사 혜철(785~850)이 모두 서당의 심인(心印)을 받았고 남창 운거사에서 도응에게 심인을 받은 것은 향미이다.

 

이와 같이 구산선문을 개창했던 대부분의 승려들이 양자강 하류에 모였으며 자연스럽게 이 지역의 음다풍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며, 특히 마조와 서당이 주석했던 남창 지역의 다풍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차를 들여 올 때 한국의 풍토에 적당한 것을 선별해 왔을 가능성이 높다.

 

★ 선차의 정신

한국 선차의 정신은 담박(淡泊)하며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움, 소박성을 들 수 있고, 차품 또한 투명한 맑음과 시원함, 산뜻한 향과 맛 그리고 기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 선차의 특성이며 고결한 가치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한국적 특성은 우리의 자연환경과 풍토,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질적 취향이 만들어낸 총체적 문화유산이다.

 

한국인이 추구한 미적 가치로서의 “맑음”과 작품에 표현되어 나타난 “투명성”은 원천적으로 맑은 햇살과 상쾌한 공기의 한국적 자연에서 남다르게 체화된 정감 자체이듯이 차의 문화적 특성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그 나라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 특수성은 그 민족의 원형적 특질로써 예술품이나 삶의 정서 속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선차의 검박함이나 자유로움은 선차만이 가질 수 있는 사상과 문화적 배경이며, 이러한 것은 수행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심성을 교화할 수 있는 매개로써 충분한 유용성이 있다. 최 치원이 쓴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진감선사비명〉에 “한명(漢茗: 당나라 차)을 공양하는 자가 있으면 가루를 내지 않고 돌솥에 차를 다려 마신다. 나는 모르겠다. 이것이 무슨 맛인지 다만 배를 적실뿐이라 하니 참을 지키고 풍속을 거스름이 모두 이러하였다.”고 하여 선차의 특징인 검소, 소탈,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잘 드러나 있다.

 

진감국사 혜소는 당에서 귀국하여 옥천사에 주석하면서 범패로써 교화하였다. 그가 도당 구법할 때 차를 마시는 것이 일상화 되었던 점을 고려해 보면 신라로 돌아 온 뒤 그의 음다 생활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신라 말 선종의 유입 초기에는 당에서 수입한 차를 귀중하게 여기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고, 왕실의 차를 다리는 법도 단차(團茶)를 맷돌에 갈아서 가루를 낸 후 물에 끓이는 방법으로 당 대 귀족들의 일반적인 탕법이며, 일정한 격식과 절차가 있었다. 그가 번거로운 형식과 절차를 생략한 채 차를 마신 것은 잠을 적게 한다는 차의 이로움을 수행에 이용할 뿐이라는 것이다.

 

선림의 청빈을 드러낸 진각국사(1178~1234)의 차 살림은 “주둥이 일그러진 발우, 다리 부러진 솥, 죽 끓이고 차 다리며 날을 보낸다네”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빈과 자족은 수행자의 자유자재한 수행과 삶의 정형이다.

 

원감국사(1226~1293)는 <백운암중락시(白雲庵中樂詩)>에서

“산중의 즐거움이여

자적(自適)은 천전(天全: 천성)을 기른다네.

(중략)

봄 오고 가을이 가도 사람의 자취 끊어져

한 점 티끌에 인연이 없어라

한 바루의 밥과 나물

배고프면 먹고, 곤하거든 잠을 자네

물 한 병, 차 끓이는 솥

목마르면 스스로 차를 다린다.

죽장 하나, 부들방석

움직여도 선이요, 앉아도 선이라.

산 중에 이런 즐거움 진미가 있으니

시비와 즐겁고 괴로움 모두 잊었네”라 하였다.

 

물욕을 떠난 담백함은 천성적(天性的) 천연(天然)함을 목표하는 자들의 진정한 삶의 유형이 될 만 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수행자의 진면목은 삼세(三世)의 인연을 초월한 선의 최상승 경계이다.

 

밥과 차는 육신을 지탱하는 세상과의 최소 접점인지 모르겠다. 따라서 차는 물질이지만 가장 고상한 탈속적 의미인 선차의 심미적 관점은 아닐까. 이로 인해 오욕 칠정을 떠난 경계를 “옳고 그름, 즐거움과 괴로움 모두 잊었다”한 것이다. 선차의 경계와 격조를 알 수 있는 것은 초의선사(1786~1866)의 다도 정신과 다풍이다.

 

초의선사의 『동다송』이 지어질 당시 시대적 상황은 청의 문물과 고증학에 눈을 떴으며, 형이상학적인 사변에 치우친 학문이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실익(實益)을 주지 못했다는 반성이 일어났을 즈음이다. 지식인들의 자주적인 의식은 우리 문화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였다. 차 또한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따라 다시 조명되었다. 초의선사의 손수 만든 차는 사대부들과의 소통 통로가 되었으며, 격조 있는 상교(相敎)를 맺게 하였다.

 

초의선사의 선사상은 마음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마음을 본질의 근원 경지로 삼아 체득을 이루고자 하였고 일체의 차별을 부정하는 불이법(不二法)이다. 그가 일미선생에게 “오직 모든 법은 다 일심이요 법은 마음을 떠날 수 없습니다. 다만 깨달음과 미혹은 스스로 나눈 것 뿐 이라” 하였다. 그가 인식한 차의 의미는 “차는 군자와 같아서 삿됨이 없다. 그러므로 성현이 모두 차를 사랑하였다”라는 것이다. 성현은 본성을 해치지 않으며 삿된 것을 멀리한다. 맑으며, 옮겨 살 수 없는 점도 차와 성현의 기질이 같다는 것이다.

 

초의선사가 파악한 차는 천연지성(天然之性)을 가지고 있으며 바라밀이라 여겼으며, 인간의 생활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의 법은 세상 사이에 있으니 세상을 떠나서는 깨침이 아니다”라고 한 그의 선사상과 차 정신은 상통한다. 차는 사람을 떠나서 그 가치를 부여 받을 수 없다. 사람에 의해 차는 그 진면목이 들어나고 발휘된다는 것이다. 그가 몸소 차를 연구하고 만든 것은 마치 선 수행을 통해 피차(彼此)의 간격 없이 중도(中道)로 보고자 함이다.

 

차의 오묘한 이치는 시비의 간격이 없는 무아(無我)한 상태에서 드러난다. 결국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치밀한 집중성 즉 부동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차의 은밀한 이치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차의 심미안적 미감은 차의 향이나 색에서도 절제된 균등미를 가지고 있다. 차 잎이 가지고 있는 녹빛의 탁함을 절제하여 황금빛 바탕에 연한 연두 빛 차색은 극미한 차색이다. 이 속에 들어난 칼칼한 시원함, 맑음, 활활한 기운의 조화는 한국의 풍토성과 맑음의 체화된 정감이 빗어낸 한국차의 특성이요 보편성이다.

 

중국차가 주는 농후한 장식성, 무겁고 화려한 맛과 향에 치중된 면이나, 일본차에서 느끼는 단층적 단절이 주는 불안한 긴장감, 기교, 가미성이 강한 차색과 맛은 그 지층의 겹이 다르다. 화려함과 짙푸른 녹색을 과감히 조절하여 보일 듯, 느껴질 듯 시원한 통풍의 공간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국 차의 멋이요 기품이며 맛이다. 그러므로 한국 차에는 은근한 느낌이 마음과 입 안에 여리게 감겨 온다. 그러나 차의 기운만은 넘치지 않게 온 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온기와 편안함이 있다.

 

★ 선차문화의 계승 발전

바쁜 현대 생활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중압감은 매우 크다. 끝없는 경쟁이 그렇고, 물질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의 초라한 모습에서 유일한 안식처는 자연이다. 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태반은 자연이 주는 안정감, 터진 공간이 주는 통쾌함, 감수성을 유발하는 바람결과 빛들이 주는 포근함과 자유 때문이다. 산업화는 생활의 편리성과 얼마간의 부를 축척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손 치더라도 이에 따른 공해, 환경 문제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감을 주었다.

 

차 문화 운동은 이러한 사회 변혁과 함께 태동되었다. 경제 개혁이후 자본의 축적은 우리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공해 문제에 따른 위기의식은 생활의 패턴 즉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반성을 고조시켰다. 차 문화 운동의 선발 그룹인 일 세대 차인들은 한국 차 문화의 정체성을 고민할 겨를도 없이 차를 하나의 시민운동 차원으로 전개한 일면이 많았다.

 

운동적 성격이 다 그러하듯이, 보여 주는 양식적 규모가 있어야하고, 사람들을 유도할 매개물이 필요하다. 이로 인해 차 문화는 형식이 강조되었으며, 예와 접목되어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했다. 행다례(行茶禮)라는 새로운 차 문화 양태는 형식이 과장되고, 화려한 무대 예술의 테마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다양한 다예법이 양산되었으며, 고증이 되지 않은 다례가 성행되는 결과를 가져 왔으며, 일본 다도를 모방했을 뿐 한국적인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여론이 일기도 하였다. 다례에 치중된 차 문화의 단점은 허식과 사치, 지나친 형식에 빠지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차의 가치인 맑음, 검소, 수수함, 자연스러움과 같은 가치 추구에 소홀했으며, 한국 차품의 수승한 이용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폐단을 가지고 왔다. ‘다선일미(茶禪一味)’가 주는 핵심적 사상은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와 피차(彼此)의 간격 없는 불이(不二)사상이다. 피물(彼物)에 대한 정견(正見) 정사(正思) 등 팔정도(八正道)의 중도의(中道義)에서 사물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차의 투명한 맑음은 이렇게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드러나서 유익한 반신(反身)의 거울이 된다.

 

우리나라 선차 문화는 대흥사를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까지도 이어졌으며, 초의선사의 선사상과 차풍을 이어 차를 탐구하고 증득한 차품을 만들었던 선차의 다풍이 응송 박영희(1893~1990)까지 전승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풍토성이 가져온 정감이 배어 있는 차품, 뜨거운 물에 우리는 탕법이 역사적 침잠을 거쳐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 결 론

차는 인류에게 실용(實用)과 정신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영향을 미쳐 왔다. 차의 약리성을 수행과 융합하여 정신적인 측면으로 심화시킨 것은 불교 특히 선종이었다. 신라 말 입당구법승(入唐求法僧)들은 이미 음다(飮茶)가 선 수행의 일부로 자리 잡았던 사원에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림(禪林)의 수행생활 중 익숙해진 음다 풍속을 귀국하면서 신라로 들여 올 수 있었다.

 

따라서 음차에 익숙했던 입당구법승들이 귀국 후 개산(開山)하면서 선문의 수행에 음다가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귀족들의 음다 풍속에도 영향을 주었다. 고려시대의 차 문화가 융성기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 초기 차 문화의 쇠퇴의 원인은 고려시대 차 문화의 사치와 허례허식 그리고 방만한 음다 행사로 과다해진 차품의 수요에 따른 백성들의 노역과 지나친 공납품 납세,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등이 차 문화 쇠퇴의 결정타가 되었으며, 도시에 있었던 사원이 철폐 되고 승려의 출가가 국법으로 금지되면서부터 불교 교세는 점점 약화되었다.

 

기실 차가 약용의 차원을 넘어서 선의 경지와 동일하게 인식된 것은 조주의 ‘끽다거’ 이래 ‘다선일미’에서 다도의 극치를 이루었다. 선림의 차 정신은 차가 도식화됨을 피하여 다만 순선(順善)으로 가고자 하는 차 정신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후대까지 영향을 주었던 선림의 음다풍이기도 하였다.

 

우리의 차문화는 풍토성과 정서성의 독특한 특징으로 기(氣)의 문제를 천착(穿鑿)하여 차의 생리적인 활성(活性)을 기로 인식하였으며 차의 생명성을 기에 두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이 특별히 맑음에 대한 취향성(趣向性)과도 관련이 깊다. 여명(黎明)의 맑은 기운은 한국인이 느낄 수 있는 선천적인 미감이다.

 

초의선사는 선종의 음다 풍속인 담백하고 검소하며 허례와 허식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실천 불교 정신을 이어 실제 차를 만들고 연구하였다. 그의 다도사상은 중(中)과 정(正)에 두었고 자연합일(自然合一)로 피차의 분별없는 달관된 경지에 이르렀다.

 

현대에서 차가 예와 접목되어 의례화 되는 과정에서 허례허식과 사치로 빠지는 경향이 생겼고, 건강식품으로 인식되는 현실에서는 차의 순선한 정신인 소박성과 맑음, 그리고 탈속의 상징적인 의미를 등한시 하기 쉽다.

 

우리의 차 문화는 충분한 고증과 연구를 통해 담론하고, 현재의 모순을 노정해야 한다. 선차의 정신을 살리고 삶에 유익한 차의 정신을 회복하여 선차의 보편적 가치를 담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