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전의 비밀
아이에게 전래동화를 읽어 주다가 매우 곤혹스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토끼전'이다. 육지에 올라선 토끼가 "속았지"라고 외치며 도망가는 마지막 장면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까.
'세상은 남을 잘 속여먹는 토끼 같은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고, 매사 원칙대로만 하는 바보 같은 거북이들은 낙오되는 거란다….' 뭐 이렇게 얘기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전래동화'는 한국사에서 무척 이른 시기에 등장한다.
서기 642년, 백제의 대야성 함락으로 딸과 사위를 잃은 신라 김춘추(金春秋)는 원병을 청하러 직접 고구려로 달려갔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신라가 진흥왕 때 빼앗은 조령과 죽령 이북의 영토를 내놓으라는 무리한 요구 끝에 김춘추를 감금했다.
사지(死地)에 빠진 김춘추는 고구려 벼슬아치 선도해(先道解)에게 뇌물을 주고 계책을 구했다. 선도해는 술을 마시다 "그대는 거북과 토끼 이야기도 모르시는가?"라며 말을 꺼냈다. 그것이 바로 토끼의 간 이야기였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김춘추가 고구려 왕에게 "돌아가면 그 땅을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왕이 그제야 기뻐했다는 것이다.
토끼는 김춘추, 용왕은 보장왕, 거북이는 연개소문이고 '토끼의 간'은 한강 유역이 되는 셈인가. 하지만 아무리 보장왕이 쿠데타로 옹립된 허수아비 임금이라 해도 이 정도 속임수에 넘어간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그보다는 김춘추를 한 번 겁준 뒤에 돌려보낼 구실을 만들었다는 편이 정확하다.
선도해가 '왕의 총신(寵臣)'이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볼 때 이 이야기를 통해 김춘추에게 탈출과 관련한 정보를 흘린 것은 보장왕과 연개소문의 정치적 술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때는 안시성 전투가 있기 불과 3년 전으로, 고구려는 당나라의 대규모 침략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김춘추 감금 직후 신라는 김유신(金庾信) 이하 결사대 1만 명을 고구려로 출병시켰다. 백제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신라로서는 국운을 건 모험이었고, 고구려로서도 양쪽에 전선을 만드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토끼 이야기'였던 셈이다.
이 이야기의 원전은 인도 설화였다. 악어가 원숭이의 심장을 먹으려고 하자 원숭이가 꾀를 내서 도망간다는 얘기였는데, 교훈적인 이야기로 불경에 삽입돼 한반도에 전래된 뒤 토착화된 풍자설화로 변하게 됐다.
토끼는 언제나 약자(弱者)였다. 도입에서부터 약자인 신라의 '국제관계적' 생존법을 대변했던 이 이야기는 조선 후기인 17~18세기에 이르러 '사회계층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는 시각이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병든 용왕은 자기만 살겠다는 욕심으로 백성을 희생시키는 통치자인 동시에 조선왕조 지배체제의 위기를 상징한다. 어전에서 싸움만 일삼는 용궁 대신들은 '부패한 지배층'이고, 최후의 승리를 얻는 토끼는 서민이자 '피지배 농민층'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렇게 지나치게 도식적인 해석을 하다 보면 '거북(자라·별주부)'의 정체가 대단히 모호해진다. 그는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강직한 충신이자 올곧은 원칙의 수호자가 아닌가. 판본에 따라서 거북은 육지에서 죽거나 용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은거하기도 하고, 심지어 토끼에게 자기 아내를 빼앗기는 수난도 겪는다.
그런데 어떤 판본은 마지막에 이런 장면을 넣는다. 토끼가 달아난 뒤 "불충(不忠)한 신하가 되었구나!"라며 탄식하던 거북은 스스로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하려 한다.
바로 그때 숲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난다. "거북은 경거망동하지 말라! 내 너의 충성에 감복하여 이 약을 줄 터이니 속히 가서 용왕께 전하라." 그 노인은 '도사'이거나 삼국지에 나오는 명의 '화타(華駝)'로서 등장한다.
신묘년이 시작됐다.
잘난 토끼의 길을 걸을 것인가, 우직한 거북이의 길을 갈 것인가.
[유석재의 타임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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