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 부석사
백두대간 광활한 바다만은 세월이 변해도 여전하구나
배흘림기둥으로 나날이 유명세 더해가…
흙길은 아스팔트로 진입부는 유원지로 자연스러운 멋 사라지니 안타까움에 한숨이…
제법 알려진 명소를 여행하는 것은 조금 고달프다. 이유는 대개 비슷하다.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 번잡하고, 그 사람들을 감당하기 위한 시설들은 풍경을 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면 다시 그곳으로 가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장소들이 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여러 번 가봤던 곳으로 다시 한 번 향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영주의 부석사가 그런 곳이다.
이미 많이 변해버린 것 같던 장소도 몇 해 지나 다시 가보면 더 많이 변해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주차장은 좀 더 번듯해져 있고 숙박시설과 음식점들은 빈 공간들을 채우고 있다. 각 지자체에서 '개선'을 명목으로 만들어놓은 시설물들도 종종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게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둘째로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 무량수전이 있는 부석사(경북 영주)도 마찬가지다. 배흘림기둥으로 더욱 유명세를 탄 덕에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예전부터 부석사에 드나들던 이들은 잘 알겠지만, 그곳 역시 시대의 변화에 온전하진 못했다.
부석사에서 많은 이들의 탄식을 자아냈던 큰 변화 중 하나는 입구에서부터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는 언덕길이었다. 흙길이었던 것이 노란 색깔의 아스팔트로 포장돼 버린 것이다. 원래는 사과나무 밭과 은행나무들이 자라며 멋진 운치를 일궈내던 길이었는데, 그게 어느 순간 샛노란 길로 바뀌어버렸다. 어이없게도 그게 은행나무를 상징한다고 했다. 10년 전쯤 벌어진 일이다. 그 시절, 진심으로 슬퍼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시간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눈이 익숙해져 버린 탓도 있지만, 몇 해 전부터는 그 인공적인 느낌으로 가득했던 길이 제법 색도 빠지고 닳고 하면서 어느덧 그 자리에 오래 있어 왔던 티를 내고 있다. 물론 예전의 자연스러운 느낌이야 되돌릴 수 없겠지만 적어도 길을 보며 한숨을 쉴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부석사 진입부가 유원지처럼 바뀌기도 했고, 사과나무가 많이 뽑혀 나가기도 했다. 경내에서도 이런저런 증축 공사들이 벌어지고 있다. 화엄사처럼 바이킹이 들어서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사실 부석사는 언제나 제 이름값을 한다. 그 어떤 주변의 변화도 침해할 수 없는 내공이 존재하는 것이다. 번잡해진 입구와 몰지각한 인파와 폭력적인 증축에도 불구하고 부석사는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자신의 매력을 잃지 않는다. 백두대간의 한 자락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터, 경사를 이용한 진입로의 긴장감, 건축적으로 동선을 유도하는 비틀린 축의 배치와 무량수전의 아름다움, 그리고 부석사의 하이라이트 격인 무량수전에 올라 내려다보는 백두대간의 광활한 바다…. 너그러이 보면 이것만으로도 부석사는 충분한 즐거움이다.
안양루를 거쳐 내려다보는 소맥산맥의 풍경은 사계절 언제 봐도 그윽하고 아름답다. 건축을 전공하던 대학생 시절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손에서 카메라를 놓을 수가 없었다. 구석구석이 건축적 언어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절제된 부재로 이루어진 건물들은 그 자체 스스로 과대포장하지 않으며 다른 건물과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존재감을 증명했다. 누각들은 단순히 경치를 바라보는 곳이 아닌, 다음 공간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유도장치였다. 모든 요소들의 배치와 형태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지니며, 한국의 전통건축이 사실은 치밀한 사고의 결과물이었음에 감동했다.
답사를 겸한 여행길에는 여전히 손에서 놓지 않는 책인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는 그 시절엔 거의 성서와도 같았다. 글에 담긴 모든 공간들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설픈 사진솜씨로 그 이야기들을 담으려 했던 것이다.
요즘엔 주머니 속에 소위 똑딱이라 불리는 작은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만 막상 전원을 켤 일은 많지 않다. 십수 년 동안 여러 번 다녀가며 이곳이 나에게 가르쳐준 교훈이다.
"담으려 하지 말고 담길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게 낫지 않겠니?"
이제는 부석사에서 머무는 시간이 예전만큼 길지 않다. 그저 느릿한 걸음으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석탑까지 올라가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다 다시 내려오곤 한다. 그리고 예전에 카메라를 열심히 들이댔던 공간을 지날 땐 잠시 멈칫하고 서 있는 순간을 즐긴다. 이 순례는 마음을 차분하게도 만들지만, 중간에 시끄럽게 떠드는 관광객이라도 있으면 다시 분노가 피어오르기도 해서 해탈의 경지는 쉬이 다가갈 수 없는 곳에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최근에는 영주에 거주하는 김승기 시인의 집을 설계하는 프로젝트가 있어 근처에 다녀올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일을 마치고 바로 서울로 오지 않고 슬그머니 부석사로 향했다. 종교는 없지만 수십 번 왕복했던 그 경사로를 오르며 허공에 대고 빌었다.
"좋은 그릇이 되게 해주세요." 부석사는 묵묵히 부족한 자의 푸념을 들어주는 넉넉함도 지녔다.
다른 유명세를 타는 문화재들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부석사를 방해 없이 즐기자면 오후 무렵 길을 나서는 게 좋다. 오후 5~6시 사이 정도에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으면 적당하다. 저녁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고, 시끄럽게 떠들던 몇몇 몰지각한 여행객들은 배가 고파 절을 떠나는 시간이다.
조금 불편한 잠자리를 감수하면서 밤을 부석사 앞에서 보내는 것도 좋다. 가격 대비 시설이 훌륭하다고 볼 수 없는 민박집들이긴 하지만, 아침의 부석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길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경사로를 다시 오른다. 이른 햇빛을 머금은 산사는 세상 모든 절이 그러하듯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하다. 입구의 유원지 같은 조경도, 빛을 바랜 아스팔트길도 그 시간엔 의미가 없어진다. 세상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감동적인 건축과 나만이 존재할 뿐이다. 긴 세월을 지켜와 준 것이 못내 고맙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루에 열두 가지 정도의 일을 고민해야 하는 현실 세계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깨닫는다. 부석사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순흥 읍내의 순흥전통묵집(054-634-4614)에 들러 묵밥 한 그릇을 먹으며 보통 짧은 여행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잠시나마 현실에서 떨어져 있었음으로 위안을 삼는다.
[오영욱의 여행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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