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脣亡齒寒)

難勝 2011. 4. 2. 07:00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

 

덧방나무와 수레바퀴는 서로 의지하며,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輔車相依, 脣亡齒寒)

 

'삼국지'에서 독자들이 가장 속시원해하는 장면은, 아마도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달아나던 조조(曹操)가 화용도에서 관우(關羽)를 만나 목숨을 구걸하는 대목일 것이다.

 

물론 어느 역사책에도 그 내용은 등장하지 않아 소설에서 지어낸 얘기라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었다면? 관우가 조조를 놓아주리라는 것을 뻔히 예측했을 제갈량(諸葛亮)이 왜 화용도에 관우를 배치했느냐에 대해 많은 사람은 의문을 가졌다. 빈손으로 돌아올 관우의 기를 꺾은 뒤 확고한 이인자로 자리 잡으려는 계책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중국 CCTV가 1994년 제작한 드라마 '삼국연의'에서는 좀 색다른 해석을 했다. 공명은 관우를 보낸 진짜 이유에 대해 나중에 유비(劉備)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조조가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계바늘을 적벽대전이 일어난 서기 208년에서 860여년을 거슬러 올라간 기원전 658년으로 돌려 보자. 때는 주(周)나라 왕의 권위가 추락하고 제후들의 군웅할거가 횡행하던 춘추시대였고, 진(晉)나라는 막 북방의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진 헌공(獻公)은 남쪽의 괵(膕)나라를 공격하려 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우(虞)나라의 영토를 통과해야만 했다. 헌공은 진나라의 보물로 유명한 명마와 옥을 우나라에 선물로 보냈다. 뇌물을 받은 우나라는 길을 빌려주는 것은 물론 진나라와 함께 괵나라를 공격해 큰 타격을 줬다.

 

3년 뒤에 진 헌공은 아예 괵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우나라에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 우나라 대부 궁지기(宮之奇)였다. '좌전(左傳)' 희공(僖公) 5년조는 그의 간언을 이렇게 기록했다. "괵나라는 우나라의 거죽[表]입니다. 괵이 망하면 우도 반드시 그 뒤를 따라갈 것입니다."

 

궁지기는 이어 당시의 속담을 언급한다. "덧방나무와 수레바퀴는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이 바로 우나라와 괵나라에 들어맞습니다." 덧방나무[輔]란 수레의 양쪽 가장자리에 덧대는 나무다. '보거상의'와 '순망치한'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진나라보다 군사력이 약한 소국이었던 괵나라와 우나라가 모두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나라가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킨다 해도 우나라가 길을 막거나, 괵·우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역공을 펼친다면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이 더 컸던 것이다.

 

키프로스를 양분(兩分)한 그리스와 터키가 그렇고 축구 때문에 전쟁까지 벌인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가 그렇듯, 인접한 두 나라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미 오랜 역사를 공유해 온 두 인접국은 부지불식간에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방면에서 뗄 수 없는 이해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 두 나라의 존재 자체가 세력균형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둘 중의 한 나라가 급격히 쇠락한다면 그것은 다른 쪽 나라에도 역시 재앙이 되는 것인데, 궁지기는 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역사에 이름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우나라 임금 우공(虞公)은 이렇게 변명한다.

 

"내가 올리는 제물은 풍성하고 깨끗하니 신은 반드시 나를 지켜줄 것이다(吾享祀豊潔, 神必據我)." "진나라는 우리와 같은 집안인데 어찌 우리를 해치겠는가(晉, 吾宗也, 豈害我哉)?" 이것은 '나는 지금껏 원칙대로 국내 정치를 해왔고 전통적인 우방국과의 외교에도 이상이 없다'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궁지기의 우려대로 우나라의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는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를 기습공격해 병탄하고 우공을 포로로 삼았다.

 

중국 드라마에서 제갈량이 '조조가 죽으면 안 된다'고 말했던 이유도 이와 비슷했다. 아무리 적대적인 관계였다고 해도 인접한 세력이 갑자기 무너진다면, 일거에 덧방나무 없는 수레바퀴나 입술 없는 이가 되기 때문이다. 이웃나라의 불행은 겉으로나 속으로나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조선일보 [유석재의 종횡무진(縱橫無盡)]

'사람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천국에 올려보낸 재료  (0) 2011.04.04
오불취(五不取)  (0) 2011.04.03
만우절이라네요.  (0) 2011.03.31
진혼곡(鎭魂曲)의 유래  (0) 2011.03.29
시치미  (0) 2011.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