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해설사 자료실

의병장 이은찬 公 추모비에서

難勝 2011. 4. 13. 21:20

 

 

 

一枝李樹 오얏나무 한가지로/ 作爲船 배를만들어

慾濟蒼生 만백성건지고자/ 泊海邊 바다에 떳다가

寸公未就 품은 뜻 못이루고/ 身先溺 내몸이 번저 빠지니

誰算東洋 뉘라서 동양의 평화를/ 樂萬年 보존한단 말인가

 

이 시는 원주 태생의 의병대장 이은찬공이 마지막길에 남긴 사세시(辭世詩)로서 그 뜻을 풀이 하면 다음과 같이 된 것이다.

‘오얏나무 한가지로 배를 만들어 만백성 건지고서 바다에 떳다가 품은 뜻 못이루고 내몸이 먼저 빠지니 뉘라서 동양의 평화를 보존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 시에서 오얏나무 한가지라 함은 자신의 성 오얏이(李)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된다.

 

의병장 이은찬공은 종실 덕천군(德泉구)의 후예로서 고종 14년9월21일 이석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마음이 넓을뿐더러 지략이 뛰어났던 사람이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는데 그가 아우인 이은호씨와 같이 원주 문막면 포진리 낡은 터에 와있을 때, 이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된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갔던 것이다.

신식훈련을 받은 진위대와 연합하여 이은찬 의병장은 군세를2천여명으로 확장 하고나서, 이인영씨를 문경(聞慶)으로 찾아가 의병대장이 되어 달라 간청하였다.

이인영대장이  쾌이 승락하자 그를 원주로 모셔 온 후 자신은 중군대장이되어 의병의 기치를 높이 세우니 인근에서 모여오는 장정이 많아 군세는 더욱 확장되었다.

또한 의병부대는  각도에 격문을 띄우니 이에 호응하여 모여드는 의병이 1만여명이나 되어 한때 원주 벌판이 온통 의병으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 후 원주에서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양주로 이동하여13도의병 총대장에 이인영, 중군대장에 이은찬, 호서(湖西)지방대장에 이강년, 황해지방대장에 권익희, 관북대장 정봉준, 관동대장 민긍호, 영남대장 박정무, 관서대장 방인관, 군사장에 허위를 정하여 부서 개편을 끝내고  서울에 의병을 보내어 각국 영사관을 찾아가서 통고문을 전달케했다.

대병력을 24개진으로 편성하고 북상하던 이인영 의병대는 대소 38회의 전투 끝에 서울로 육박하였으나 후방부대가 도착하지  않아 300명의 부대원으로 1천여명의 일본군 공격은 중과부적이랄 수 밖에 없어 의병부대는 이곳에서 전멸하였고, 군사장 즉 참모장 허위는 잡혀서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고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의 부음을 듣고 문경으로 돌아갔다가 1909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이은찬 의병장도 하는 수 없이 휘하의 남은 병력 5백을 거느라고 양주로 퇴진하여 2년동안을 머물면서 경기도와 황해도 각지에서 일본수비대와 싸웠다 그의 대표적인 전투는 1908년 7월 7일의 계평리 싸움, 1909년 3월 27일의 양주북방 석우리 전투이다.

그러나 역부족인 이은찬 의병장은 후일을 기약하고 북간도에  들어가서 다시 많은 군사를 양병할 것을 계획하고 친구인 김모씨에게 그 뜻을 말했다.

말을 들은 김모씨는 내가 충분한 군자금을 마련해주겠으니 몇일 후 용산역전에서 만나자고 하고  그 길로 일본 헌병에게 밀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용산역전에 나갔던 이은찬 의병장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문숙공 이은찬 의병대장의  처벌이 민심에 미칠 영향을 생각한 일본인판사 와다나베는 감언이설로 그의 전향을 권했다. 이 말에 대해 이은찬 의병대장은 대갈일성으로 이를 물리치고 사형을 받으니 때는 1909년 5월 10일 이었고 장소는 용산에 있는 일본군 병영안이었다.

 

이렇게 33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친 의병장의 유해를 이은찬의병장의 심복부하였던 박찬문씨가 거두어 원주로 와서 원주시 봉산동 소재 현 천주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해방후 정부는 문숙공에게 대한민국 건국 훈장을 내리기로 결정했으나 이은찬 의병장의 후예가 나타나지 않아 전달을 못하다가 원주문화원(원장; 황주익)이 수소문 끝에  문숙공의 아우인 이은호씨의 둘째아들 이한주씨를 찾아내서 문숙공의 사후양자(死後養子)로 입적 시킨 후, 문숙공의 추모비 건립을 추진했다.

 

문숙공에 대한 건국훈장은 1969년 3월 1일 원주 공설운동장에서 박건주(朴建周)원주시장의 손으로 전달되었고 추모비는 이보다 앞선 1968년 10월 27일 제 1군사령부의 지원과 원주지구중장비공장의 석재운반지원 등을 얻어 원주 학성동에 세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