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의 美 - 연꽃
더러운 진흙 속에서 깨끗한 꽃 피우듯 부처님 상징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꽃 가운데 연꽃만큼 내밀(內密)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 꽃도 드물다. 유교에서는 군자의 청빈과 고고함의 상징이고, 도교에서는 팔신선(八神仙) 중의 하나인 하선고(何仙姑)가 지니는 선계(仙界)의 꽃으로 사랑을 받아 왔다.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꽃 장식은 시각적으로만 반응하는 현대인들에겐 단순한 치레정도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실로 그것은 불교의 정신세계와 부처님을 향한 중생들의 신앙심이 짙게 투영된 신비로운 상징물이다. 연꽃이 불교의 꽃이 된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에 의해서다. 먼저 더러운 펄 흙에 자라지만 항상 맑고 깨끗하고 향기롭다는 것, 개화와 동시에 열매[蓮果]를 맺는 것이 인과(因果)의 도리를 보여 준다는 것, 그리고 연꽃 봉오리 모양이 부처님을 향해 합장한 불자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연꽃은 불.보살의 연화좌를 비롯, 불전(佛殿)을 구성하는 불단(佛壇), 천장, 문살, 공포는 물론 탑, 부도, 심지어는 암.수막새 기와에 이르기까지 장식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연꽃은 인도의 고대 신화에서부터 등장한다.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 고대 인도 바라문교의 신비적 상징주의 가운데에 혼돈의 물밑에 잠자는 영원한 정령 나라야나(비슈누신의 화신)의 배꼽에서 연꽃이 솟아났다고 하는 내용의 신화가 있다. 이로부터 ‘세계연화(世界蓮花)’ 사상이 성립되었고, 연꽃은 창조.생성의 의미를 지닌 꽃으로 인식됐다. ‘세계연화’사상은 불교에서는 연화화생(蓮華化生)의 의미로 연결된다. 모든 불.보살의 정토를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라 하는 것도 ‘세계연화’와 관련이 깊다. 〈연종보감(蓮宗寶鑑)〉 권8에 “정토에 나서 그 연태(蓮胎)에 들어가 모든 쾌락을 얻는다”고 했는데, 연꽃을 연태라고 한 것은 염불로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는 사람이 모두 연꽃 속에서 화생하는 것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과 흡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연꽃 속에서 화생’ 염원
부처님이 마야부인의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태어나 일곱 발자국을 걸을 때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났다고 하는 것은 연꽃이 화생의 상징물로 간주된 예이며, 사찰 벽화나 불단 장식 중에 동자가 연꽃 위에 앉아 있거나 연 밭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 또한 연꽃이 화생의 상징형임을 말해 주는 예다. 티베트 스님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의 이름의 의미는 ‘연꽃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그것은 그가 연꽃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
파주 보광사 대웅전 뒤쪽 판벽(板璧)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 수십 송이의 만개한 연꽃마다 보살과 동자가 앉아 있다. 연꽃을 연화화생의 상징형으로 표현한 좋은 예다. 그밖에 극락왕생을 주제로 하는 아미타내영도와 같은 불화에서도 연화화생의 장면을 묘사한 부분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연꽃 문양 가운데서 여덟 장의 꽃잎을 가진 팔엽(八葉) 연꽃은 불교의 교의와 신앙체계를 나타내는 상징형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多羅 : 모든 불.보살 등을 그 지위에 따라 배열하여 그린 도형의 일종)를 보면, 중심에 팔엽의 연꽃이 그려져 있는데, 이 부분을 중대팔엽원(中臺八葉院)이라 한다. 연꽃 중앙에 대일여래(비로자나불)를, 그 주변의 팔엽의 꽃잎에 각각 사불(四佛)과 사보살(四菩薩)을 배치하고 있다. 네 부처(보당여래, 개부화왕여래, 무량수여래, 천고뇌음여래)는 곧 네 가지 지혜를 상징하며, 네 보살(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 미륵보살)은 곧 사섭(四攝 : 중생을 부처님 가르침에 끌어들이는 네 가지 방편)을 의미한다.
여덟개 꽃잎은 4부처님.4보살 의미
이와 관련하여 사자빈신사지삼층석탑을 보면 기단부에 네 마리의 사자가 있고, 그 중앙에 지권인을 결한 대일여래가 앉아 있다. 대일여래의 머리 바로 위 갑석 밑면에 만개한 팔엽의 커다란 연꽃이 새겨져 있는데, 대일여래의 위치는 그 연꽃의 중심 부분에 해당된다. 이것은 태장계만다라의 중대팔엽원에서 보이는 대일여래의 위치와 같다.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에서도 팔엽 연꽃을 볼 수 있다. 탑신부를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 머리 위에 팔엽 연꽃이 있고, 탑 중앙의 승상 머리 위쪽 갑석 밑면에도 팔엽 연꽃이 부조되어 있다. 이 팔엽 연꽃도 사자빈신사지삼층석탑의 경우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팔엽 연꽃에 있어서 그 중심에 있는 대일여래는 근본 진리를 드러내는 법신(法身)에 해당하고, 주변의 팔엽은 부처님의 대비(大悲)를 뜻하는 네 부처와 네 보살에 해당한다. 여덟 개의 연꽃잎이 각기 분리되어 있지만 연꽃의 중심에 붙어 있는 것과 같이 네 부처님과 네 보살은 결국 하나의 법으로 귀결됨을 팔엽 연꽃은 상징한다. 〈종경록〉은 팔엽 연꽃을 사람의 심장에 비유하며,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묻기를 어찌하여 연은 오직 팔엽 뿐인가. 일체의 범부는 비록 마음이 있는 자리를 스스로 알지 못하나 심장에 자연히 팔판(八瓣)이 있어 연꽃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주관 객관의 모든 사물이 서로 응하여 융합하는 이치를 알고, 손에 인을 맺고 입으로 진언을 외고 마음으로는 본존을 생각하는 수행을 하여 마음의 연꽃을 피게 하면 그것은 곧 삼매(三昧)의 열매이므로, 이 팔엽 연꽃을 본다면 곧 득(得)과 이(理)가 상응한다.”
〈화엄경탐현기〉에 의하면 연꽃은 네 가지 덕을 가지고 있는데, 향(香).결(潔).청(淸).정(淨)이 그것이다. 불.보살이 앉아 있는 자리를 연꽃으로 만들고 연화좌(蓮華座) 또는 연대(連臺)라 부르는 것은 사바세계에 있으면서도 고결하고 청정함을 잃지 않는 불.보살을 연꽃의 속성에 비유한 것이다. 부처님이 연꽃 위에 앉은 의미를 〈대지도론〉은 이렇게 말한다. “묘법의 자리를 장엄하게 하는 까닭이며, 또 다른 꽃은 모두 작고 연꽃같이 향기가 깨끗하고 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천상의 연꽃은 이보다 크다. 이것은 결가부좌하기에 족하다. 부처님이 앉은 꽃은 이보다 크기가 백 천 만 배이다. 또 이와 같은 연화대는 깨끗하고 향기가 있어 앉을 만하다.”
‘묘법연화경’이라는 이름은, 경전이 가진 결백하고 미묘한 뜻을 연꽃에 비유한 것이다. 한글 〈묘법연화경〉 권제1에 이 경의 이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주석이 있다. “꽃과 동시에 곧 열매가 맺고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깨끗하니 이것은 연꽃의 실상이요, 중생과 부처가 근본이 있어 윤회를 거듭해도 달라지지 아니하니 이것은 마음의 실상이요, 그 모양은 허망하지만 그 정기는 지극히 진실하니 이것은 경계의 실상이로다. 이른바 묘법은 추를 버리고 묘를 취한 것이 아니고 추(醜)에서 곧 묘(妙)를 나타내심이다. 추에서 곧 묘를 나타내심은 연꽃이 더러운 곳에서도 항상 깨끗함과 같다.”
경전을 넣은 책장을 돌리면 경을 읽는 것과 똑같은 공덕이 있다고 하는 윤장대가 예천 용문사 대장전에 있다. 팽이처럼 생긴 하대에 연꽃을 조각했고, 몸체의 난간에도 24엽의 연잎을 새겼다. 옥개부에는 닫집과 비슷한 짧은 기둥을 달고 연꽃봉오리로 장식했다.
특히 연꽃 문양을 투각한 꽃살창은 모양도 아름답거니와 경전의 미묘함을 연꽃이 펄에서 자라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모습으로 잘 표현해 냈다. 사찰의 연꽃 문양에는 살아서는 자기의 본성을 깨닫고, 죽어서는 극락정토에 가서 연꽃 속에 다시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중생들의 열망과 신앙심이 담겨 있으며,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숭모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연꽃 문양은 부처님 가르침과 내용을 선(善)과 미(美)로 도상화한 기호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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