拈華茶室

7월의 茶詩 - 送童子下山

難勝 2011. 7. 1. 05:55

 

 

 

送童子下山

송동자하산

 

空門寂寞汝思家 禮別雲房下九華

공문적막여사가 예별운방하구화

 

愛向竹欄騎竹馬 懶於金地聚金沙

애향죽난기죽마 나어금지취금사

 

漆甁澗底休招月 烹茗遼中罷弄花

칠병간저유초월 팽명구중파농화

 

好玄不須頻下淚 老僧相伴有煙霞

호현불수빈하루 노승상반유연하

 

산을 내려가는가

 

불문이 쓸쓸해 먼 산 바라고 옛집 그리더니

정든 절 떠나 구화산을 내려가는가

 

난간에 뛰어올라 죽마 타던 아이야

이곳은 황금땅 부처님 나라, 금모래 모으는 일도 이제 싫으냐

 

칠병 속 시냇물엔 밝은 달 찾아올 일 없겠고

차 달인 단지에는 향긋한 꽃 필 일 없겠네

 

부처님 그리는 이는 자주 울 일 없나니

노승은 노을의 벗 노을은 노승의 벗

 

 

위대한 한국인은 많습니다.

 

그러나 중국땅에서 가장 존경받는 한국인 한사람을 꼽는다면 바로 신라왕자 김교각스님일 것이며 중국안에서 일고 있는 한국열풍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교각스님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지 1500년 되는 696년에 신라 성덕왕의 왕자로 태어나 스물네살에 출가하여 지장(地藏)이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스님은 신견(神犬) 선청(善廳)이라는 흰삽살개 한 마리와 오차송이라는 소나무종자, 황립도라는 볍씨와 금지차(金地茶)라는 신라차를 가지고 중국 구화산으로 건너가 구화산에 이르러 초인적인 고행과 뛰어난 법력으로 그곳사람들을 교화하다가 99세되는 794년 음력 7월 30일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내가 열반한 뒤 내 몸을 화장하지 말고 돌함에 넣어두었다가 세 해가 지난뒤 열어보아라. 만일 그대까지 썩지 않으면 그대로 개금하여라."

 

스님의 유언에 따라 세 해 뒤에 돌함을 여니, 얼굴은 살아 있는 듯하고 살갗은 부드럽고 향내음이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서기 797년 구화산 남대에 등신불을 모시고 그 위에 법당을 지으니, 오늘날 구화산의 육신보전(肉身寶殿)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라왕자 지장스님의 육신성도(肉身成道)를 통해 중국사람들은 스님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받들게 되었고 이로부터 중국불교에 육신보살의 전통이 생겨났으며 지장스님이 열반하신 음력7월30일에는 중국에서 가장 성대한 종교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중국 당시집(唐詩集)에는 김교각스님의 다시(茶詩)한편이 실려 있는데 호랑이한테서 구해준 고아 아이가 절에서 살다 적막함을 못 이기자 시 한수를 지어 마을로 돌려보내니, 이 시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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