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파혼(破婚) - 사랑방 야화

難勝 2011. 9. 17. 20:07

 

 

사랑방 야화(파혼)

 

나주 고을 훈장이 부인과 무남독녀 예진이를 남겨 두고 이승을 하직했다.

예진이 열일곱이 되자 몇 군데서 혼처가 들어왔다.

살림은 보잘것없으나, 예진은 뼈대 있는 집안에 얼굴은 옥골이고 글은 사서삼경을 통달했다.

 

이웃 동네 이참봉네 맏아들과 시월상달에 혼례를 올리기로 하고 사주단자까지 받았는데 갑자기 신랑집에서 파혼 통지가 왔다.

모녀는 털썩 주저앉았다.

 

이튿날 매파가 찾아와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예진 아씨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이 골목 저 골목 떠돌아다닌다오.”

 

모녀가 무슨 소문이냐고 따지자 주저하던 매파가 입을 열었다.

“예진 아씨가 옛적부터 딴 남자와 놀아났다는 거야, 글쎄.”

 

그날 밤, 술에 취한 팔목이 예진네 집 대문을 걷어차고 들어와 예진 어미를 불렀다.

“장모님, 예진이와 나는 몸을 섞은 사인데 저도 모르게 딴 곳에 시집보내려고 하다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팔목이 행패를 부리고 떠난 뒤 예진은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팔목이는 훈장 생전에 서당에 다니던 학동으로 온갖 못된 짓을 도맡아 했다.

훈장 쌈짓돈을 훔치고, 소금장수에게 사기 치고, 술집에 외상 깔고, 손윗사람하고 싸우고…

이 녀석이 예진을 차지하려고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예진 어미는 화병이 나 드러누웠지만 예진은 입을 꼭 다물고 관아에 가 소장을 냈다.

사또는 망설이다가 팔목이를 불러 문초했다.

“사또 나리, 분명히 소인은 예진 아씨와 합의 하에 통정을 했습니다.”

 

팔목이는 몇월 며칠, 장소까지 대며 예진의 소장이 거짓임을 주장했다.

일단 사또는 팔목이를 감방에 넣었다.

팔목 애비가 찾아와 외당숙이 의금부에 있다며 사또를 은근히 협박했다.

 

사또는 이방을 보내 원고인 예진을 동헌으로 데려왔다.

이방이 예진에게

“팔목이와 혼례를 올리지 않으면 평생 시집 못 간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예진은 맹세코 팔목이와의 동침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침묵이 흐르다가 동헌 마당의 예진이 이방을 불러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방 나리, 제 배꼽 아래에 검은 사마귀점이 하나 있습니다. 팔목에게 제 몸의 특징을 말해 보라 해 주십시오.”

 

이방이 계단을 올라 사또에게 귓속말로 아뢰었고, 사또는 이방을 시켜 감방에 있는 팔목이를 불러냈다.

“네가 예진이와 살을 섞었다면 처녀 몸의 특징을 알고 있으렷다.”

 

팔목이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배꼽 밑에 검은 사마귀점이 있습니다.”

사또가 고함쳤다.

“저 발칙한 년을 형틀에 묶어라.”

그때 예진이 한마디 했다.

“사또, 안방마님을 한번만 뵙게 해 주십시오.”

나졸이 예진이를 데리고 동헌 뒤 사또 관저로 갔다.

 

한참 후, 사또의 안방마님이 예진이를 데리고 나왔다.

“이 규수의 배꼽 밑엔 검은 사마귀점이 없습니다.”

 

팔목 애비가 이방을 매수해 놓았다는 걸 예진이는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던 것이다.

팔목이는 곤장 스무대를 맞고 옥에 갇히고, 이방은 파직되고 예진은 사또의 맏며느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