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의 신들 속의 부처
힌두의 신들을 찬양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
인도를 여행하다보면 이런 글귀를 보게 된다.
"알라, 이슬람의 신, 여호와, 기독교의 신, 힌두의 신은 모두가 하나이다"
힌두는 신을 합일적인 절대적 존재의 여러 표현으로 본다. 힌두에도 신은 많다.
하지만 그 신들은 모두 합일성의 각각 다른 "표현"일 뿐이지 엄밀히 말하면 상대적으로 대립되는 그런 개별 신은 아니다. 창조신 브라흐마와 유지신 비슈누, 파괴신 시바는 삼위일체의 합일체이며 시바의 아내 우마는 파괴의 상징과 자애로운 어머니의 두가지 특성을 동시에 지닌다. 곧, 기독교적인 개별신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다차원적 존재인 신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힌두의 신관이라 하겠다.
시바 (Shiva / Har ) - 파괴의신 (파괴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게 된다!)
호랑이 가죽위에 올라앉아 코브라를 감고 명상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히말라야의 카이라사 산에 살고 있고 이마에는 제 3의 눈이 있으며 삼지창을 들고 있다.
시바의 사원에는 링가(남근석)가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생산/생식력을 상징하는 시바의 상징이다.시바신이 타고다니는 동물이 성스러운 소인 난디(Nandi) 인데 이 때문에 인도에서는 소를 성스러운 동물로 여겨 죽이거나 먹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지방도시로 갈수록 두드러져 거리와 골목 어디서나 소를 볼 수 있으나 대도시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소로 수레를 끌게 하는 등 잘 지켜지지 않는다.
시바 사원 앞에는 이 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비슈누 (Vishunu / Hari) -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신
비슈누(Visnu) 신은 우주의 유지자, 보존자이다.
항상 자애로우며, 진리를 수호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현시키는 자이다. 시바는 성격이 복잡한 반면, 비슈누는 언제나 쾌활하고 자애로운 단순한 성격이다. 비슈누는 하늘에 살면서 지상을 내려보다가 이의 질서가 흔들리게 되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여 바로 잡는다. 비슈누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는 푸나라에 무궁무진하고 흥미 롭게 전개되어 있다.
비슈누의 형상은 대개 검푸른색 얼굴에 네 개의 팔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 두 손에는 당당한 힘을 상징하는 철퇴(곤봉)와 원반을 각각 들고 있고 나머지 두 손에는 주술의 힘과 티없는 청정성을 상징하는 나팔 및 연꽃을 들고 있다. 머리에는 높다란 왕관을 쓰고 있다. 발은 푸른색이며, 황금색 옷을 입고 있다.
비슈누의 황홀하고 그윽한 눈은 수많은 인도인의 숭경심을 자아낸다. 휴식을 취할 때면 우주적인 뱀 셰샤(Sesa), 또는 아난타 (Ananta)에게 기댄다. 비슈누는 가루다(Garuda)라는 새(神鳥)를 타고 다니며, 물고기를 자신의 상징으로 한다. 인도의 신화 베다에서 비슈누는 태양의 신(수리야 Surya)으로 등장한다.
비슈누는 세상의 상황에 따라 10가지의 변화된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오는데 이를 비슈누의 화신이라 한다.
비슈누 신의 화신
비슈누 신의 화신으로는 전통적으로 열 가지가 꼽힌다. 그 열 가지 화신 가운데 아홉가지는 이미 있었던 것이지만, 한 가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열 가지를 차례로 알아보겠다.
1)마트스야(Matsya : 큰 물고기) :
비슈누의 첫번째 화신인 물고기의 기원은 브라흐마나의 홍 수 신화이다. 인류의 시조(Manu)가 물고기로부터 조만간 발생하게 될 대홍수에 대한 이랴기를 듣는다. 그 말대로 큰 홍수가 났다. 마누는 미리 준비한 배를 타고 큰 물고기의도움을 받아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착하였다. 세상을 삼켰던 물이 빠진 뒤에 마누는 산에서 내려와 제사를 지내고 다시 인류를 창조하기 시작 했다는 것이다.물고기가 마누를 구제한다는 이 홍수 신화는 서사시나 푸라나에 전수되어 결국 비슈누의 화신이 되었다.
2)쿠르마(Kurma: 거북이) :
거북이의 화신도 그 기원은 프라자파티(생물의 主)가 거북이의 모습으로 세계 창조를 하였다는 브라흐마나의 신화이다. 푸라나에 의하면 세계가 파멸할 때, 큰 홍수가 나서 신들은 많은 보물을 잃어 버렸다. 이 때 비슈누는 거북이가 되어 바다 밑으로 잠수하여 그의 등에 만다라(Mandara) 산을 짊어지고 대지를 지탱하였다. 그리고 악마의 신들로 하여금 바다를 휘젓도록 하였다. 이처럼 비슈누는 거북이로 변신하여 신들이 우유의 바다로부터 만들어낸 아므리타(Amrta:불사약)등의 여러 귀한 물건을 휘젓는 일에 일조 했다.
3)바라하(Varaha: 멧돼지) :
악마 히란나약사(Hiranayaksa: 황금의 눈이란 뜻)가 대지를 바다 밑으로 침몰시겼을 때 1000년 동안의 끈질긴 싸움 끝에 대지를 그의이빨로 물고 다시 끌어 올렸다. 이처럼 대지를 지탱하여 인류를 구제했다고 한다. 이 멧돼지의 전설은 브라흐마나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원주민의 동물 숭배를 통하여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머리가 멧돼지로서 왼쪽 겨드랑이에 대지를 나타내는 여성을 끼고 있고, 양발로 용과 거북이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4)느리싱하(Nrsimha; 半人半獅子):
절반은 인간, 절반은 사자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악마 히란니야카시푸(Hiranyakasipu ; 히란나약사의 쌍둥이 동생)를 퇴치하는 비슈누를 나타낸다. 브라흐마의 은총에의해 신, 인간, 야생동물의 어느 것에도 살해되지 않는 힘을 부여받은 이 악마는 그의 아들 프라홀라다(Prahlada)가 비슈누를 신앙한다 하여 아들을 살해하려고 한다. 이 때 비슈누 신이 절반은 사람 절반은 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 악마를 가볍게 퇴치해 버렸다. 이 악마는 라바나(Ravana)로 재생했다고 한다.
10가지 화신 가운데 이들 네 동물의 화신은 소멸기(kali-yuga)인 우주가 파괴되는 시기에 나타나 다음에 오는 생성기(krta-yuga, sata-yuga)를 맞게 된다고 한다.
5)바마나(Vamana: 난장이) :
이것도 앞의 네 화신과 같이 우주의 창조와 관련이 있다. 우주의 창조와 관련이 있다. 우주의 제 2기 유지기(treta-yuga)에 악마 발리(Bali)가 삼계(三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때 비슈누는 난장이가 되어 나타나서 발리에게 세 걸음만큼의 땅을 달라고 요구 하였다. 자신의 힘을 과신한 발리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마자 왜소한 난장이는 거대한 모습으로 변하여 세 걸음(trivikrama)을 걸었다는 것은 이미 [리그베다]에 언급되어 있다. 그의 세 걸음으로 인해 우주의 삼계가 창조되었다. 이것이 브라흐마니를 거쳐 서사시와 푸라나에 이르러 그가 비슈누의 다섯 번째 화신이 된 것이다.
6)파라슈라마(Parasrama: 勇士) :
파라슈라마는 도끼를 가진 라마라는 뜻이다. 그는 도끼를 휘둘러서 교만한 왕족을 넘어뜨리고 브라만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우주의 제2기 유지기(treta-yuga)에 비슈누는 브라만인 자마드아그니(Jamadagni)의 아들로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크샤트리아의 카르타비르야(Karttavirya)에게 아버지가 살해되자 그는 도끼를 휘둘러 아버지의 원스를 갚았다. 크샤트리아족을 완전히 멸한 파라슈라마는 마헨드라(Mahendra) 산의 숲으로 고행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는 아슈바메다(馬祀祭; 말의 공희제)를 거행하고 모든 땅을 카시야파(Kasyapa)에게 돌려준다. 이것은 아마도 인도 역사의 초기 단계에 있었던 종족간의 정치적, 경제적 다툼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7)라마(Rama ; 라마 왕자) :
라마는 2대 서사시의 하나인 [라마야나](Ramayana)의 주인공으로서 마왕 라바나(Ravana)를 죽인 영웅이다. 이 서사시에서는 라마의 출생 이야기를 통해 라마가 비슈누의 화신임을 분명히 나타낸다. 이에 따르면 아요디야(Ayodhya) 왕국의 다샤라타(dasaratha) 왕게게는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마땅치 않아서 자식의 탄생을 기원하는 말의 희생제를 지냈다. 이 때 천계(天界)에서는 온갖 나쁜 짓을 일삼고 있는 악마왕 라바나를 퇴치하는 일이 문제였다. 그래서 브라흐마 신의은총으로써 불사신이 된 라바나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비슈누는 다샤라타 왕의 아들 라마의 모습으로 이 지상에 나타난다.
라마는 인도 민중에게 예로부터 친숙한 영웅이란 점을 감안할 때 라마가 비슈누의 화신이 된 것은 일반 민중이 비슈누 신앙을 널리 수용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렇게 [라마야나]에서의 라마는 고난을 잘 이겨내고, 전쟁에서는 용맹스럽고,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성스러운 의무(옴금)에 충실함으로써 비슈누 신의 한 화신으로 간주되게 되엇다.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때대로 신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모든 힌두교도의 모범이 되고 있다.
라마의 부인 시타도 그와 함께 힌두교도들에게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라마에게 정절을 다하고 성스러운 의무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힌두교도 아내의 귀감이 되었다. 라마가 비슈누 신의 화신이듯이, 그녀도 비슈누 신의 부인 락슈미의 화신인 것이다.
현재 전 인도에는 [라마야나]의 각종 이본(異本)들이 혼재함으로써 라마에 대한 신봉도 각양 각생이다. 단순한 구원의 영웅 라마로서가 아니라 최고의 신으로 받드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와 같이 라마 신앙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비슈누의 화신인 한 영웅으로서의라망 대한 숭경이며, 또 하나는 라마를 최고의 신으로 받들고 라마에게만 봉헌하는 예배이다.
8)크리슈나(Krsn) :
힌두의 신들 중에서 가장 인도 대중에게 인기가 있고 친숙한 신이 바로 크리슈나(검다는 말에서 유래함) 신이다. 그리고 비슈누의 화신 중에서 크리슈나는 가장 중요하다. 라마도 널리 숭배되고 있지만, 크리슈나는 비슈누의 화신으로서 혹은 개별의 신으로서 라마 이상으로 널리 숭배된다.
근원을 달리하는 갖가지 토착 신앙이 크리슈나에 포함되어 크리슈나 신화는 더욱 더 풍요롭게 되었다. 그리고 갖가지 전설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크리슈나 신화가 완성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어린아이로서의 크리슈나, 소치는 여인과 즐기는 크리슈나,인드라 신과 싸워서 소를 지키는 목동 크리슈나,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영웅으로서의 크리슈나,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라다 (Radha)와의 사랑의 유희(LiLa)를 즐기는 쿠리슈나 등은 모두 그 근원을 달리하는 독립된 전승이며 민간신앙이었던 것이다.
[마하바라타]에서 크리슈나는 진지하고 용맹스런 전쟁영웅으로 등장한다. 그리하여 크리슈나는 비슈누의 화신인 자기에게 진정 한 박티(희생)를 무조건 바칠 것을 강요하고 있다.
한편 방대한 민담에서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크리슈나는 쾌활한 아이이다. 인도인들은 어린 시절 창고에 드나들면서 버터를 훔쳐먹곤 하는 푸른색의 몸을 가진 통통하고 장난기스런 어린 크리슈나의모습을 사랑스럽게 여긴다. 많은 인도 여성들이 토실토실한 아기 크리슈나상을 보며 예배를 올린다. 그러나 크리슈나의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매력적인 목가의주인공으로 등장할 때이다. 대부분의 민담에서 크리슈나는 활달하고 호색적인 목동으로 묘사된다. 크리슈나가 소 떼사이를 거닐면서 아름다운 피리 소리로 황홀한 곡조를 실어 보내면 고피(Gopi)들은 사랑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그는 피리를 불어 여성을 매료시킨 것이다. 그러면 크리슈나는 이 처녀들과 열렬한 사랑의 놀이를 한다. 그 많은 처녀들 가운데에서도 크리슈나는 라다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가장 좋아한다. 12세기 이후에는 박티(bhakti) 신앙의 기반 위에서 크리슈나의 이러한 에로틱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는 사랑 이야기 묘사에 치중하고 있지만, 샥티즘(Shaktism)과 약간의 비슷한 점을 지니고 있다.
9)부다(Buddha):
아홉 번째 화신으로서 불교의 개조(開祖) 부다를 드는 것은 불교와 힌두교의 융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앞에서 본 대로 힌두교의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에 대한 푸라나의 설명은 모두 힌두교의 입장에 의한 것이다. 이는 불교의 사상적인 면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또한 비슈누가 부다가 되어 이 세상에 출현하여 악마와 악인을 파멸시켰다는 주장은 인도 정통파 측에서 보는 불교관이라고 생각된다. 부다가 비슈누신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흡수된 것은 힌두교 속에 투영된 불교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부다가 비슈누의 화신으로 간주되고 만 것은 불교가 힌두 세계에서 더 이상 특색 있는 종교로서의 근거를 상실하는 계기가 된다. 현재 힌두교도들은 부다를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이라 믿고 있어, 그들에게 있어 부다는 힌두교의 주신(主神) 비슈누 그 자체인 것이다.
10)칼키(Kalki) :
칼키는 암흑의 시대인 파괴기(kail-yuga)가 끝날 무렵에 손에는 빛나는 불칼을 든 채 백마를 타고 나타나는 미래의 화신이다. 그는 사악함을 물리치고 정의를 재건하여 생성기(krta-yuga)의 법(옴금)에 따르는 자를 구원한다고 한다. 결국 칼키는 현상태로서의 우주의 파괴기에 나타나 자신 속에 모든 선(善)을 거두어들인 후 다음 단계의 우주 생성기가 될 때 다시 선과 질서를 우주에 펼쳐 내는 임무를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칼키는 일반 민중으로부터 미래의 구세주로 추앙 받고 있다
힌두의 화신들을 찬양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해설>
1)마트스야(Matsya : 큰 물고기)
2)쿠르마(Kurma: 거북이)
3)바라하(Varaha: 멧돼지)
4)느리싱하(Nrsimha; 半人半獅子)
5)바마나(Vamana: 난장이)
6)파라슈라마(Parasrama: 勇士)
7)라마(Rama ; 라마 왕자)
8)크리슈나(Krsn)
9)부다(Buddha)
10)칼키(Kalki)
삼보님께 귀의 합니다.
거룩한 관세음보살님께 귀의 합니다.
위대한 존재이신 대비의 주님(大悲主) 께.
모든 공포에서 피난처를 베푸시는 님께.
님에게 귀의하고 나서
이 관세음에 대한 찬가를
목에 푸른빛을 띈, 그 마음을 노래합니다.
모든 요익을 성취하게 하고, 아름답고, 견줄 수없는 그 마음을
모든 뭇 삶들의 윤회의 길을 청정하게 하는 그 마음을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옴~빛이여! 지혜의 빛을 지닌 님이여! 세상을 뛰어넘은 님이시여!
오!오! 님이시여! 위대한 깨달음의 존재(大菩薩)이시여!
마음을 새기고 또 새기소서
일하고 또 일하시고, 이루어 주시고 또 이루어 주소서.
승리하고 승리하소서, 승리하는 님이시여 ! 위대한 승리의 님이시여 !
수호하고 수호하소서, 번개를 수호하는 주님이시여!
운행하고 운행하소서, 티끌속에서 티끌을 떠난 님이시여! 청정해탈의 님이시여!
오소서,오소서, 세계의 주님이시여!
탐욕의 독을 없애주소서
분노의 독을 없애주소서
어리석음으로 얽힌 독을 없애주소서
아!아! 님이시여! 오!오! 주님이시여! 단전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님이시여!
물은 흐르고 또 흐르니, 깨달음으로 깨달음으로, 깨닫고 또 깨닫게 하소서!
목에 푸른빛을 띈, 자비의 님이시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부숴버린 쁘라흘라다의 마음을 위하여, 쓰와하
성취자를 위해서 쓰와하, 위대한 성취자를 위해서 쓰와하,
성취자인 요가의 주님을 위해서, 쓰와하
목에 푸른빛을 띈 님을 위하여. 쓰와하
멧돼지 형상의 님과 사자형상의 님을 위하여, 쓰와하
손에 연꽃을 든 님을 위하여, 쓰와하
보륜을 사용하는 님을 위하여, 쓰와하
소라고동에서 소리가 울릴 때 깨어난 님을 위하여, 쓰와하
위대한 금강저를 지닌 님을 위하여, 쓰와하
왼쪽 어깨쪽에 서 있는 승리의 크리슈나님을 위하여, 쓰와하
호랑이 가죽 위에서 명상하는 님을 위하여
삼보님께 귀의 합니다
거룩한 관세음보살님께 귀의 합니다
붓다 예불문이 힌두신들이나 찬양하고 있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도하면 가장먼저 떠올리는 것이 불교다.
그도 그럴 것이 인도는 불교의 발상지이다. 한국이나 주변 동아시아 국가에서 불교가 그동안 차지했던 위상에 비하면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인도에서는 불교신자가 600~700만 사이이다. 10억 인구에 비하면 1퍼센 트도 되지 않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도에서도 불교가 번성했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가 잘아는 마우리아 왕조는 불교가 국교였던 국가였고, 우리 한국인이 여행하면서 그나마 이질적이지 않게 접하는 대부분의 인도유적은 불교유적지이다. 북인도의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 불교유적지가 여기저기 박혀있다. 그런데 현재의 인도에서는 외국인이 아닌 인도인이 운영하는 절은 커녕 불교신자 구경하기도 하늘의 별따기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수많은 설을 제시하는데,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불교가 힌두교와 차이가 없어지면서 힌두교에 흡수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불교의 창시자 인 붓다가 힌두교의 신으로 편입된 것을 꼽고 있다.
사실 무신론에 가까운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시작한 불교가 북방불교(대승불교)로 변하면서 등장하는 수많은 신의 개념(많은 수의 신은 힌두 교에서 차용)이 힌두교의 그것과 차이가 없어지고, 결국에는 불교는 자신의 독자성을 잃어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근거로 많은 학자들은 불교가 인도에서 '자연사'했음을 얘기한다.
인도 건국후 초기 법무부 장관은 지낸 천민 출신의 암베드카르 박사가 수십만의 천민을 데리고 불교로 개종을 하면서 현대에 들어 불교는 그전의 것보다는 조금더 많은 신도수를 거느리게 된다. 자신 역시 불가촉 천민 출신이면서 계급타파 운동을 벌이던 암베드카르로써는 계급의 존재를 인정하는 힌두교안에서의 계급타파에 한계를 느끼고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로 개종을 하게 된 것이다. 암베드카르를 따라 불교로 개종한 천민들은 그래도 그중에 엘리트들이 많았는지는 모르지만 인도 공직자들 중에는 불교신자가 10퍼센트나 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불교신자들이 파워 엘리트로 행세함은 또다른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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