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식, <의진홍수신선도(擬陳洪綬神仙圖)> 6폭 병풍, 1898년, 비단에 채색, 각 130×29.7cm,
불로장생의 염원이 깃들여진 신선도 병풍
인물화는 철학적 이념을 실었던 산수화와 달리 인간사의 다양한 모습이나 양상을 매개로 하였기 때문에 그림 읽기를 통해 옛 이야기나 그들의 의식세계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성현(聖賢)들의 역사적 일화를 주제로 하여 그린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와 불로장생이나 현실구복을 추구하는 신선사상을 근간으로 한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가 그러하다. 따라서 인물화를 감정할 때에는 다른 회화작품과 마찬가지로 먼저 재질, 그림의 화법이나 구도, 인장 등에 대한 검토를 거쳐 진위 여부를 확인한 다음, 감상 단계에서 하게 되는 것이 그림 속에 담겨진 이야기 읽어내기이다. 마지막으로는 화면 속의 인물을 통해 그림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유추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인물들의 이야기는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화면의 이곳저곳을 세심하게 읽어가다 보면 나이 지긋한 어르신으로부터 한 편의 옛날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는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자신을 순간적으로 동일시하거나 시공간을 이동하여 그들과 조우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로장생(不老長生)·부귀(富貴)·복록(福祿)에 대한 소망이나 염원은 시공을 초월해 어느 시대에나 공통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망이며 일종의 행복의 지표이기도 했다.
따라서 전통시대에 이러한 행복의 지표를 은유적으로 담아냈던 고사나 도석 인물화는 널리 선호되었다.
현재 선문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중식의 <의진홍수신선도(擬陳洪綬神仙圖)> 6폭 병풍은 1890년대에 조선의 인간 군상들이 마음 속 깊이 간직하였던 불로장생에의 염원을 담고 있다.
더구나 이 도석인물화 6폭 병풍은 주제나 화법에 있어서 1891년과 1899년 두 차례의 상해 방문을 통해 안중식이 접했던 해상화파(海上畵派: 1840년대 후반부터 1919년까지 上海에서 활동했던 직업화가들) 화풍이 반영되어 있어 당시로서는 신선한 미감으로 인해 더욱 주목받았을 것이다.
선문대학교박물관(『鮮文大學校博物館 名品圖錄 Ⅱ 회화편』, 선문대학교출판부, 2000에서 인용)
동양화는 화첩, 축, 병풍, 두루마리라 하더라도 항상 오른쪽 상단으로부터 왼쪽 하단으로 시선을 옮겨가며 그림을 보는 것이 올바른 감상법이다.
병풍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첫 번째 폭은 파도를 배경으로 표주박 위에 올라 선 유해(劉海)라는 신선이 두꺼비를 엽전으로 유인하고 있는 유해희섬(劉海戱蟾)이다. 유해는 후량(後梁) 연왕(燕王) 때 재상으로 도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속세의 영욕이 덧없음을 깨닫고는 관직을 버린 다음 道를 닦아 신선이 되었으며, 그에게는 어느 곳이든지 데려다 주는 세 발 달린 두꺼비가 있었다. 그런데 이 두꺼비는 심술이 나면 자주 우물 속으로 숨어버렸고, 좋아하는 엽전을 이용해 우물 밖으로 유인해야만 했다.
이처럼 재미있는 스토리를 지닌 유해와 두꺼비는 장수와 재물을 상징하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 이래 선호되었고, 간송미술관에 현전하는 심사정(沈師正)의 <하마선인도(蝦?仙人圖)>는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두 번째 폭은 계곡을 배경으로 신선이라 생각되는 백발 노인이 앉아 있고 동자가 복숭아를 들고 있다. 이 복숭아는 한 눈에 서왕모가 살았던 곤륜산에서 삼천년에 한 번 열렸다고 하는 선도복숭아를 연상시키며 불로장생의 상징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세 번째 폭의 두 인물은 발문을 통해 삼황오제(三皇五帝)에 속하는 염제(炎帝) 신농(神農)과 그의 신하로 비를 관장한 우사(雨師) 적송자(赤松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한(前漢)의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현전하는 중국 최초의 신선 설화집)에 의하면 적송자는 신농의 막내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나중에 함께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신농과 적송자에서 ‘불로장생’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른쪽 화단에 있는 신농은 거북이 위에 앉아 있고, 적송자는 나무를 배경으로 정면을 향해 서 있다. 이러한 도상과 인물화법은 상해에서 1883년 발간된 왕지(王?)의 개인 인물화보인 『육수당화전(毓秀堂畵傳)』에서 황안(黃安)과 적송자의 도상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어 해상화파 화풍의 수용도 알려준다.
네 번째 폭은 남성 두 명이 이야기를 나누며 바다 위에 있는데, 제발에 의하면 맨발을 한 앞쪽의 인물은 한나라 무제(武帝) 때 방사(方士) 이소군(李少君)이며, 등 뒤에 커다란 열매를 지고 있는 것은 진시황제 때 신선이 된 안기생(安期生)이라고 한다. 이처럼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인물이 동해(東海)에서 우연히 조우했다는 것 역시 불로장생을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섯 번째 폭에서 오른쪽의 여성은 춘추시대 진(秦) 목공(穆公)의 딸 농옥(弄玉)이며, 왼쪽에서 퉁소로 불고 있는 남성은 소사(蕭史)라는 청년이다. 농옥은 퉁소로 난새(鸞鳥)와 봉황(鳳凰)의 소리를 잘 내었던 평민 소사를 사모하여 그의 아내가 되었고, 나중에는 그녀도 퉁소를 잘 불게 되어 두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세 번째 폭과 마찬가지로 농옥과 소사의 도상도 해상화파 화풍을 수용한 것이다.
소사(蕭史), 『점석재총화(點石齋叢畵)』, 1885-1886년
임백년(任伯年), <취소인봉도(吹簫引鳳圖)>
1870년, 종이에 담채, 76.8×40.5cm,
천진인민미술출판사 (『海上畵派』, 天津人民美術出版社, 2002에서 인용)
퉁소를 부는 소사와 난새의 도상은 1876년 상해의 점석재서국(點石齋書局)에서 발간한 『점석재총화(點石齋叢畵)』 권3 명월전이(明月前耳)에 있는 것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농옥은 임백년(任伯年)이 1870년에 그린 <취소인봉도(吹簫引鳳圖)>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마지막 여섯 번째 폭에는 장과노(張果老)가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있는 장면이 전통적인 화법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김홍도(金弘道)의 <군선도(群仙圖)>를 통해 매우 친숙해졌으며 조선 후기 이래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도석인물화로 인식되어 왔다.
안중식은 6폭 병풍 안에 다양한 포즈를 취한 유해, 적송자, 안귀생, 이소군, 소사, 농옥, 장과노 등의 신선들을 힘이 넘치는 필법과 화려한 진채로 그려내며 자신의 뛰어난 인물화법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러한 화면 속 인물들은 그 자체로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신선이기 때문에, 이 병풍 그림을 통해 안중식은 장수에의 염원을 절절히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안중식에게 이 병풍을 그려 받았던 사람은 방 안에 이것을 펼쳐놓고 항시 바라보면서 눈으로는 여러 신선들의 모습을 익히고, 마음으로는 그들의 삶을 지향하며 자신의 삶에 강한 애정이나 애착을 배가시키지 않았을까.
[옛 그림에 담겨진 이야기]
-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최경현 감정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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