曉意(효의) 새벽정취
昨夜山中雨 (작야산중우) 지난 밤 산 속에 비가 내리더니
今聞石上泉 (금문석상천) 이제 돌 위에 샘물소리 들리네.
窓明天欲曙 (창명천욕서) 창 밝아 하늘은 밝으려 하고
鳥刮客猶珉 (조괄객유민) 새소리 시끄러워도 손님은 아직 잠자고 있네.
室小虛生白 (실소허생백) 방은 작아도 비어 햇빛이 밝게 일고
雲收月在天 (운수월재천) 구름 걷히니 달은 하늘에 있네.
廚人具炊黍 (주인구치서) 요리하는 사람은 기장밥 짓기에 여념이 없고
報我欄茶煎 (보아란차전) 나에게 차 다리는 일 게으르다 하네.
- 金時習(김시습) -
[金時習(김시습)]
본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 법호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총애를 받았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매월당 김시습하면 생육신(生六臣)과 방랑과 차를 떠 올린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분개해 책을 불사르고 한평생을 방랑으로 지낸 인물이다.
조선조의 기존체제를 뿌리째 부정했던 영원한 방외인(方外人) 매월당은 방랑자답게 전국 곳곳에 무수한 발자취를 남겨 두고 있다. 미친 듯 취해있는가 하면 어느새 차나무심고 한잔 차에 심취해 있다가는 또 취하여 방랑하던 매월당이 파란많은 일생을 닫은지도 어언 5백여년......
무수한 세월이 흘렀지만 날이 갈수록 그가 남기고 간 발자취마다 새로운 체취를 풍기고 있음은 왜일까?
소시적 학업의 정열을 불사르던 서울 삼각산 중흥사터, 파란 많은 일생을 닫았던 홍산의 무량사, 그리고 매월당의 영정이 모셔진 경주 기림사, 홍산의 청일사. 또 장년의 한때를 보내며 정사수도(精思修道)하던 경주 금오산의 용장사터(茸長寺址).
최근에는 한때 몸을 숨겨 지냈다는 철원군 서면의 매월동(梅月洞)에 있는 매월대와 매월폭포, 매월굴, 매월천이 발견되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천재인 그가 여덟달 만에 글을 알았고 세 살 때 漢詩를 지었다. 다섯 살 때 중용과 대학을 통달했고 소문을 들은 궁중에서 세종대왕의 지시로 시험을 받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세종대왕은 감탄하여 선물로 비단 50필을 내리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비단끝마다 명주실을 이어 끌고 나갔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신동 김오세(神童 金五歲)라고 불렀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학문을 닦고 있던 김시습은 어릴 때 은고를 입은 세종대왕의 장손 단종(端宗)의 비보를 듣고 비분 강개한다. 대성통곡하며 책을 불사르고 삭발하여 스님이 된 뒤 정처없는 유랑길을 나서게 된다. 59세로 일생을 마칠 때 까지 잠깐 환속하여 장가를 들었을 때(47세)와 서울에 몇차례 올라 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방랑생활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