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새재 자전거길 - 옛 유생들이 과거보러 다니던 길

難勝 2011. 12. 9. 20:11

 

▲ 경북 상주 영강 습지를 끼고 달리다 불현듯 마주친 태봉숲

 

옛 유생들이 과거보러 다니던 길목

500년전 역사가 한눈에

 

 

새재 자전거길

몸을 낮춘 평야와 습지 사이, 솔숲 홀로 겨울 빛을 튕겨내며 우뚝하다. 새것에서 기어코 벗어나려는 안간힘으로 길은 뻗어 있었다. 자전거를 밟아 나아가는 길은 서두름이 없었고, 그 곁으로 산하(山河)는 제 리듬을 끝없이 변주하며 출렁였다. 그 길 위에서, 옛것들이 하나씩 불려왔다. 그때마다 자전거 페달 밟는 발을 멈칫했다.

 

지난달 27일 개통한 '새재 자전거길'을 따라나선 여정이었다. 충북 충주에서 시작, 괴산과 경북 문경을 지나 상주에서 마감하는 연장 100㎞의 길이다. 충주와 상주를 잇는 3번 국도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터널로 산의 이편과 저편을 연결할 때, 새재 자전거길은 강변 따라 크게 에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온전히 제 몸의 힘으로 밀고 나가는 길은 천천히 가까워지고 천천히 멀어져서, 길을 달리는 몸은 목적지를 잊고 길을 길로서 체감했다. 그 길은 여행의 길이다. 목적지를 잊거나 잃은 길만큼 여행에 어울리는 길은 없는 까닭이다.

 

 

◇영남 유생이 한양 갔던 길

 

새재 자전거길은 충주 탄금대에서 시작한다.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이 남한강과 만나는 지점이다. 여기서 길은 달천을 거슬러 동남쪽을 향한다. 자전거길이 충주시내를 벗어나 팔봉향산길로 접어들며 풍경은 깊어진다. 처음으로 자전거를 멈추는 곳도 이 길 위에서다. 달천 옆으로 가늘고 긴 능선이 뻗어있다.

 

숲을 얹은 산줄기는 어느 순간 나무를 지워내고 8개의 암봉으로 이어진다. 암봉 옆으로 폭포가 흐른다. '수주팔봉'이다. 동행한 '새재 자전거길 지킴이' 고승호씨가 말했다. "워낙 자동차가 잘 다니지 않는 길 위에 있어 아는 사람만 아는 절경이다."

 

새재 자전거길은 교통량이 거의 없는 길을 골라 노선을 정했다. 국도 대신 마을길과 농로, 제방을 거친다. 강과 산, 마을이 길 위에서 끊임없이 교차한다. 이 풍경, 정겹다. 겨울 강가엔 남하 중인 철새떼가 날개를 퍼덕이고, 마을 집집마다 곶감과 메주가 걸렸다. 간혹 동네 개 짖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군데군데 보리밭이 벌써부터 봄을 예비하고 있다. 돌아갈 길 없어 국도를 탈 수밖에 없을 경우엔 가림막으로 자전거 전용차로를 냈다.

 

길은 충주 수안보를 거쳐 소조령으로 향한다. 지금은 찾는 이 드물되, 수안보와 소조령 모두 과거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간 영남 유생들이 꼭 거쳐간 길목이었다. 문경새재 대신 이화령을 넘는 것만 제외하면, 이 길은 조선 500년의 간선도로였던 영남대로의 재현이다.

 

과거 영남대로는 서울~충주~상주~부산을 이었다. 조선시대 8목이었던 상주와 충주는 각기 남과 북에서 뭍과 물이 만나는 교통 중심지로 기능했다.

 

상주는 낙동강의 시점이요, 충주는 한강의 시점이다. 그 사이 백두대간으로 강이 닿을 수 없는 뭍길을 문경과 괴산이 잇는다. 괴산 너머 문경으로 유입된 북방의 문물은 상주에 모여 낙동강을 타고 남쪽으로 퍼졌다. 과거 길에 오른 영남 유림은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 수안보를 지나 한양을 향했다.

 

새재 자전거길 위에 서면 그 흐름이 또렷하다. 충주에서 괴산을 향해 나아갈 때 산세는 점점 크게 출렁이며 높아진다. 높아진 만큼 길의 양편을 압박하다 끝내 앞을 가로막으니, 그땐 산을 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고도 100m 안팎을 오르내리는 평탄한 자전거길에서 고도 300m를 넘는 지점이 딱 두 곳이다. 소조령(374m)과 이화령(548m). 소조령은 충주와 괴산의 경계요, 이화령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다.

 

 

 

◇고갯길·강변길 교차

 

소조령과 이화령을 자전거로 오를 때 시선은 앞을 향하지 못한다. 앞을 향한 시선은 그 까마득한 경사 길의 전망으로 페달을 밟으려는 몸의 의지를 꺾는다. 해서 시선을 내려 대신 땅과 페달을 구르는 제 발을 본다. 페달이 구르는 사이, 자전거 바퀴가 느려지며 바퀴의 결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풍경을 본다. 그 풍경의 시야는 좁되, 다만 한 걸음씩 나가 고갯마루에 닿겠다는 의지다.

 

대신 이화령 정상의 전망은 몸의 노고를 한순간에 보상한다. 이화령에서,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이 선명하다. 괴산 쪽으로는 5부 능선 따라 이어진 길이 굽이치고 문경 쪽으로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아슬하다.

 

그 내리막 따라 문경에 들어서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어디에 서든 하얗게 눈을 얹은 주흘산을 비롯, 남서쪽으로 흐르는 백두대간이 올려 보인다. 빛을 받은 정상이 반짝여 순간순간 원근감을 교란할 만큼 산세가 바싹 압박한다.

 

산세에 잘게 부서지며 흩어졌던 강은 문경읍에서 길과 다시 합류한다. 상주로 다가설수록 산은 멀어지고 강은 넓어진다. 조령천에서 영강으로, 영강에서 낙동강으로 강은 이름을 바꿔가며 이어지고, 넓어진 만큼 면적을 키워낸 평야를 품는다.

 

이 길 위에서도 한때 붐볐으나 지금은 잊힌 곳을 여럿 만났다. 경북팔경 중 하나인 진남교반(鎭南橋畔)과 한때 문경 석탄수송의 거점지였던 불정역이 그곳. 진남교반을 제대로 보려면 진남 휴게소 뒤편에 있는 고모산성에 오르는 편이 좋다. 영남대로 옛길과 국도, 철도, 고속도로가 한눈에 내려 보인다. 1993년 폐역이 된 불정역은 국내에 보기 드문 형태의 역사다. 하단부는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아 올렸고, 상층부 외벽은 영강 오석(烏石)을 이용했다.

 

충주와 괴산, 문경 사이 경계가 고개로 또렷한 것과 달리, 문경과 상주의 경계는 부지불식간에 넘는다. 다만 영강 습지를 따라 남하할 때, 백두대간 대신 겨울에도 풍족해 보이는 평야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마주치는 마을마다 정자를 품었으니, 쉬엄쉬엄 끝을 향해 페달 구르는 발이 가볍다.

 

 

◇더 달리고 싶다면

 

새재 자전거길은 북으로 남한강 자전거길을, 남으로 낙동강 자전거길을 잇는다. 남한강 자전거길은 지난 10월 개통했으며 낙동강 자전거길은 연말 개통될 예정이다. 다시 말해 연말이면 국토 종주 자전거길이 열린다.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고 갈 요량이라면, 한강변 자전거도로에서 출발해 남양주와 양평, 여주를 지나 충주에 있는 새재 자전거길과 만날 수 있다.

 

 

김우성 여행작가 loyco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