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반야심경 강의(10) - 무고집멸도

難勝 2008. 5. 24. 04:27

본문: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강설(講說):사람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입으로는 아주 훌륭히 단념했습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쉽게 단념해 지지 않는 것입니다. 남에게는 '지나간 일을 무엇 생각하느냐, 단념해 버려라'고 하지만 정작 자기의 일일 때에는 단념했습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쉽게 단념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인정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단념 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어느덧 단념해 버리는 일도 많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세상에 나온 이상은 죽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제행무상'이니 '생자필멸'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과연 그렇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지만, 그렇지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딸을 잃어버린 어머니를 보고 위로하는 말, '극락으로 시집 보낸 셈 치라'합니다. 그러나 남의 일이기에 그러한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친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야말로 기가 막히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쉽사리 단념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내 딸만이 그렇게 되었는가, 왜 죽어야 했는가, 이러한 감정만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어 가는 동물입니다'하고 태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정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출가해 흘리는 어머니의 눈물은 기쁨의 눈물만 아니라 또한 슬픔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기뻐야 하겠지마는 역시 그것은 '사랑하는 자와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이별이란 슬픈 세계의 일입니다. 단념해 버릴 것 같아도 단념해 지지 않는 것, 단념 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어느덧 인간은 망각이라는 것으로 해서 단념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라고 니체는 말했습니다.

참으로 인간이란 묘한 존재입니다. 그 묘한 존재인 인간이 모여 있는 이 사회도 또한 복잡해서, 그렇게 간단히는 해석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도 사회도 이와 같이 복잡 미묘하게 되어 있으니 또한 그것이 묘미라고 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이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사를 단념할 수 있는 것도 자기요, 단념 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필경은 자기 자신입니다. 인간은 모순의 존재입니다.

어느 철학자는 '인간은 불만과 권태로움의 사이를 동요하는 시계추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구해서 얻지 못하면 웬 일인지 불만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구하던 것을 얻었다 해도 거기에는 반드시 권태로움이 따르는 것입니다. '만족의 비애'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하간 불만의 반대는 권태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불만과 권태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시계의 추로 비교해 놓은 그 철학자의 말속에는 음미 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인간은 가지가지의 많은 모순을 가진 동물입니다. 모순의 존재, 그것이 인간입니다. 여기에 네 가지의 진리가 있습니다. 즉, '四諦'로서, 심경의 본문에는 '고 , 집 , 멸 , 도 도 없느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제의 '제(諦)'라는 글자는 '尋(편자주;찾을 심)'이라던가 '明(편자주;밝을명)'이라는 글자와 똑 같이 쓰이는 것으로, '분명하게 본다'는 뜻이며 '잘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단념합니다는 것은 '諦觀'하는 것으로, 즉, 사물의 참 모습을 보는 것, 즉, 진실을 잘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세존께서 단념하신 세계, 정확하게 속속들이 보신 인생의 세계를 설해 오신 것이 즉, 불교입니다. 그런데 그 불교의 근본은 결국 이 '사제' 즉, 네 가지 단념하는 것에 있습니다. 즉, 네 가지 진리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네 가지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와 '집'과 '멸'과 '도'의 네 가지로서, 이것을 '4제'라고 합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인생은 괴롭다고 하는 것과, 그 괴로움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하는 그 '고'의 원인과 '그 고를 해탈한 세계'와 '그 고를 해탈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 즉 사제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고, 집, 멸, 도도 없습니다'고 하는 심경의 이 일절은 이미 '12인연'에서 말한 것과 같이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제'의 진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일체개공'의 이치로 본다면, '迷(편자주;미혹할 미)'와 '悟(편자주;깨달을 오)'와의 인과를 설해 놓은 이 사제의 법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고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인생은 괴롭다' '인생살이 고해와 같다'하는 것은 참으로 진리다. 인생은 괴로움과 번뇌 덩어리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마침내 죽습니다. 세상에 나와서 죽어 갈 때까지의 인간의 일생, 그것이 필경은 괴로운 일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나서 고생하다가 죽는다' 얼마나 심각한 말입니까? 고뇌가 없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번민이 없다고 하는 것은 반성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괴로운 번민이 있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아니, 그 괴로움에 부딪히기 싫어서 겁내어서 비켜가고 있는 것뿐입니다.

“세상은 물거품이요

 인생은 풀잎의 이슬이건만

 모태에 있을 그 때부터

 묘지로 가는 그 순간까지

 인생은 고생의 연속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이며

 어머님 고우시던 이마에는 주름만 남고

 가다가는 중간에 꺽이는 목숨도 있네

 차례차례 시달림 벗어나면

 전쟁이네 이별이네 슬픔은 다시 오고

 평화로운 웃음은 몇 번이나 될까

 마지막 남는 것이 무엇 있는가

 나는 것부터 죽는 것 모두가 허무 하도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은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생각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