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무지역무득
無智亦無得
해석(解釋):지혜가 없으며, 또한 얻을 것도 없느니라.
강설(講說):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지혜란 본래 무소득의 체득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지혜도 없다”고 한다. 즉 무소득의 체득한 지혜조차도 초월한 것이 반야요, 공이며 中道라는 뜻입니다. 소득에 집착을 해도 안 되고 무소득에 집착해도 병이라는 것입니다. 가난에 집착해도 道와는 거리가 멀고, 富에 집착하더라도 역시 도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일생은 마치 다리를 건너가는 것과 같습니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로질린 다리, 그 다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 다리 밑은 물론이고, 다리 저 쪽 조차도 캄캄한 밤중과 같습니다. 그 불안한 다리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인생은 한 외나무다리이고 '인생 칠십 고희'라고 말합니다. 가령 인생을 60년이라고 보고, 일년을 한 칸으로 계산한다면, 인간의 삶은 즉 60칸의 다리를 건너가는 것입니다. 20살된 사람은 인생의 다리를 20칸 건너간 사람입니다. 30살된 사람은 인생의 다리를 30칸, 40살된 사람은 40칸, 59살된 사람은 다음 한 칸으로서 인생의 다리를 마저 건너 버리는 것입니다. 나머지 한 칸으로서 인생의 다리를 마지막을 건너 버린다고 생각 할 때에, 과연 어떠한 감상이 일어날까요. 다리 저편에 탄탄한 넓은 도로가 보인다면, 오히려 좋으련마는, 캄캄한 어둠 속이라면 어떠한 기분이 나겠습니까.
빅톨 위고는 <레․미제라블> “인간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다. 다만, 무기 집행유예일 뿐이다”고 했습니다. 무기 집행유예이니 언제 죽게 될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홍법대사는 <보약>이라는 책 속에 '인생은 나고, 나고, 나고, 나서, 나는 시초부터 어둡고 ,죽고, 죽고, 죽고, 죽어서 죽음의 끝도 어둡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다리를 건넌다고 생각 할 때에,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음미해 보게 됩니다. 모든 것은 인연의 법입니다, 인연으로 해서 생겨난 일시적인 존재라고 자각했을 때, 우리들은 '삶의 덧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또한 '삶은 귀하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니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무슨 일에나 이 인연을 죽이지 않고, 나아가서 이 인연을 살려 가는 마음의 각오가 중요한 것입니다. '인연을 죽인다'는 것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일생을 허송하는 것이 됩니다. 취생몽사하는 것입니다. 인연을 살린다'는 것은 우리들의 일생을 귀중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를 '영원의 하루'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는 날을 보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하루 하루를 이별할 때에 가치 있는 삶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성공의 비결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의 '분수'를 알아서 열심히 노력하는데 있습니다. 과거지사를 돌아보지 않고, 다가올 미래를 염려하지 않고, 그 날 그 날의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해 나가는 데 있습니다.
농부는 농사일을, 사무원은 사무를, 학생은 학업을 열심히 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분수대로 그 당시의 형편에 따라, 보다 성실하게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이 가장 출세의 첩경인 것입니다.
한 방울의 물, 한 장의 종이도 쓰기에 따라서는 크게 요긴하게 소용됩니다. 우주 만물이 필요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먼지가 저 아침나절과 저녁 석양에 곱게 물드는 노을이 된다고 과학자는 말합니다. '우주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늘고 작은 먼지가 무수히 있다. 그 먼지에 태양 광선이 반사해서 저 동천일출, 서천일몰의 그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가 보이는 것이다.'고 합니다.
이와 같으니 '먼지의 효용'이야 말로 극히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경(經)에 '주리반특'이라는 사람의 얘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주리반특이와 같은 어리석은 인간이라도-'하고 얘기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명하(茗荷)라는 풀이 있는데, 그가 죽은 뒤에 그 묘지위에 난 풀로써, 그 풀을 먹으면 기억력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어찌도 기억력이 나쁘든지, 그는 때때로 자기의 성명조차도 잊어버려서 마침내 이름표를 써서 등에 붙여 두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걸머지었다'고해서 이름 명자 위에 '초두'자를 붙여서 茗荷로 했다는 것입니다.
주리반특은 부처님 제자중에서도 제일 머리가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바보라고 할지, 천치라고 할지, 부처님께서 그를 보시고, '너는 어리석어서 아무래도 어려운 것을 가르치면 안 되니까'하시고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3업의 악을 짓지 말고, 유정을 해하지 말고, 정념(正念)으로 공을 관하면, 무익한 괴로움도 면하리라.” 이것은 극히 간단한 말입니다. “3업의 악을 짓지 말고”는 신(身), 구(口), 의(意), 즉 몸으로나 입으로나, 마음으로나 나쁜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정을 해하지 말고'는, 함부로 산목숨을 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념으로 공을 관하면'은, '정념'이란 일심 일념입니다. '공을 관합니다'는 것은,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익의 고를 멸하리라'는 즉 쓸 데 없는 괴로움은 없어지리라는 말입니다.
이 몇 마디의 간단한 말도 그는 기억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사람이 없는 들판으로 나가서 '삼업의 악을 짓지말고, 유정을 해하지 말고 ...'의 말을 쉽사리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옆에서 양 치던 아이들이 듣고 먼저 외어 버렸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서글픈 모습으로 기원정사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를 보신 부처님께서는 조용한 걸음으로 그 앞에 가까이 가셔서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리반특이 대답하기를, “부처님이시여, 저는 어찌해서 이와 같이 어리석은 인간입니까. 저는 도저히 부처님의 제자 노릇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가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 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자니라. 너는 네가 어리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너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한 자루의 비를 주시고, 다시 다음 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띠끌을 털고 때를 씻으리라.” 정직한 주리반특은 충실하게 이 말을 외우면서 생각했습니다. 여러 비구들의 신발을 닦으면서 그는 열심히 이 한마디를 사색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어리석다고 비웃음을 받던 주리반특은 마침내 자기 마음의 때와 티끌을 없앴습니다. 번뇌의 티끌을 깨끗이 씻을 수가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신통설법제일'의 아라한이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여러 대중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도를 깨친다는 것은, 결코 많은 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사소하고도 적은 한 가지 일일지라도, 그것에 철저하면 되느니라. 주리반특을 보라, 빗자루로 청소에 철저해서 마침내 도를 깨치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이 말씀이야말로 바로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혜도 없고, 또한 얻는 것도 없으며 얻을 바가 없는 까닭에” 이 한 구절입니다. 말은 간단합니다. 그 지니고 있는 뜻이야말로 참으로 깊은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말해 본다면 이러한 뜻입니다.
“대체로 일체 만물은 모두가 공의 상태에 있는 것이니, 오온도 없고, 십이처도 없고, 십이계도 없고, 십이인연도 없고, 사제도 없다고 들었을 때, 과연 일체는 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을 공이라고 깨닫는 것이, 반야의 지혜를 체득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곧 우리는 그 지혜에 잡히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그러한 지혜라고 하는 것도 처음부터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지혜뿐만 아니라, 그러한 깨달음을 얻으면 무엇인가 반드시 소득이 있으리라. 어떠한 공덕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것도 결국은 없는 것이다.”고 하는 것이 '무지역무득'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되면, 여러분은 무엇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분간 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오히려 말할 수 없는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불교의 이상은 '미혹을 돌려서 깨달음의 길을 여는 것'입니다. 번뇌를 끊고 보리를 얻는 것입니다. 즉, 범부중생이 성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혹도 없다. 깨달음도 없다. 번뇌도 없으며, 보리도 없다고 하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하는 의문이 반드시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 생각해야 할 것은, 만물은 인연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인연생'인고로 모두가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병이 있으니 약이 필요합니다. 병 있고 약이 있습니다. 병에는 여러 가지 구별이 있으니, 약도 또한 여러 가지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병이 나으면 약도 자연 필요 없게 됩니다. 감기가 들었을 때는 감기약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번 감기가 나으면 언제까지나 감기약에 집착 할 필요는 없습니다. 몸이 건전한 사람에게는 약이 필요 없듯이, 일체 모든 사물을 올바르게 보아서, 마음이 건전한 사람이라면 애써서 마음의 약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가령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간다 하면, 기차가 무사히 부산에 닿았을 때, 기차의 덕분입니다. 기차는 참으로 고마운 것입니다, 하고 정작 볼일을 잊어버리고, 언제까지나 기차에게 생각이 머물러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차의 역할은 사람을 운반해 주는 데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태워 보내 주면 그것으로 일은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기차를 타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을 잊어버리고 기차 그 자체에 언제까지나 집착하게 된다면 아무런 의의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기차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옛날 도화에 “미혹하면 삼계가 다 성벽이요, 깨치면 시방이 공이라. 본래 동서가 없으니, 남북이 따로 있을 손가” 참으로 '본래 무동서'입니다. 동서가 있으니, 남북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동입니다, 이것이 서입니다 하고 언제까지나 구애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智도 없고, 또한 얻는 것도 없습니다”고 말씀했는가 하면 그것은 즉 “얻는 바가 없는 까닭에”입니다. 즉 “얻는 바가 없기 때문에”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무소득' 즉 , '얻는 바가 없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어느 시인이 쓴 수필에 <顔面問答>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입, 코, 눈, 눈썹'의 문답입니다. 서로 서로의 얼굴을 보면 잘 압니다. 대체로 사람 얼굴의 제일 밑에 있는 것이 입입니다.
그 위에 코, 그 위에 눈, 제일 위에 있는 것이 눈썹입니다.
입의 불평, 코의 불만, 눈의 不服은 이 눈썹 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눈썹의 존재 가치를 의심했던 것입니다. 입, 코, 눈들이 '어째서 너는 우리들 위에서 그처럼 거만을 부리고 있느냐. 대체 너는 무슨 역할을 한단 말이냐?'하고 눈썹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눈썹의 대답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과연 너희들은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식물을 먹고 호흡을 하고, 사물을 보고하는 그 수고스러움에는 정말 감사하고 있네. 그러나 이제 새삼스럽게도 너희들이 '네가 하는 역할은 무엇이냐?'하고 물어 보니,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되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고 있으니 대답 할 수가 없군. 다만 조상대대로, 여기 이렇게 있어서, 밤낮으로 미안하다”는 생각하면서, 그저 열심히 내가 있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네. 너희들은 자랑할 만한 그 무엇을 각기 다 가지고 있겠지만 나에게는 자랑 할만한 것이 없네. 그래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묻는 데 대답할 말이 없구만.”했습니다.
잘 음미해 볼만한 말입니다. 눈썹의 태도는 자각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의젓한 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각 없는 듯이 보이면서 역시 자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썹의 태도야말로 참으로 인연에 순종하면서, 無我에 사는 생활입니다. 거기에는 우리들이 다 같이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그 무엇이 있습니다. “총명한 지혜를 지키는 데 어리석음을 가지고 하라”고 옛 사람이 말했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운(運), 둔(鈍), 근(根)의 세가지라고 말합니다. 이 둔(鈍), 즉 우(愚)가 현대인에게는 특히 필요합니다. “대현(大賢)은 대우(大愚)에 가깝다”고 합니다. 물론 현대 사회생활에 있어 빈틈없는 지혜와 총명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또한 없어서 아니 될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즉 둔한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전연 없다면, 꾀 있는 사람에 불과한 것뿐입니다. 에디슨은 말했습니다. “천재란 99가 땀의 노력이요, 1만이 영감이라”고. 천재란 오랜 동안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어 나가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근기(根機)가 필요한 것입니다. 참고, 견디고, 노력하는 것이 천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오랜 동안을 참고 견디려면 둔한 것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비웃음도, 조롱하는 것도, 비난 공격하는 것도, 일체를 초월하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일을 할 수도 없고, 새로운 운동을 일으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즉 바보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면, 도저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이 처세해 가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사회가 복잡하게 되면, 경제문제가 어렵게 되고 '생활'이란 말이 극히 중요한 뜻을 가지고 옵니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국제적으로도 손득(損得)에 관한 경제적, 타산적인 생각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한 푼이라도 손해되지 않도록, 한 푼이라도 이득을 얻으려고, 손해도 이득도 되지 않는 일에는 되도록 상관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대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할 것인가, 인간 생활이 과연 계산기와 같이 그렇게 계산이 들어맞아야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겠는가. 현대인은 돈에 무섭다고 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경제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경제 문제는 물론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생활이 계속되어 나가는 한에 있어, 우리들은 도저히 '경제'에 무관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쌀값이 떨어졌다 하면 도시에서 사 먹는 사람은 좋아하고, 논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걱정을 합니다. 무역이 부진 상태에 있습니다. 공장이 문을 닫는다. 실업자가 늘었다 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어두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가 결코 생활의 전부는 될 수가 없습니다. 경제만으로 참으로 경제만으로 세상 모든 것이 살아 갈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먹어야 사는 동물입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먹기만 하여서는 인간은 결코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너무나도 경제의 중대성에 현혹되어 있어서, 마치 경제가 생활의 전부를 지배하고 있는 양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상의 파산을 마치 인간의 파산과 같이 생각해서, 마음의 파산의 중대성을 감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빈곤' 보다도 '마음의 빈곤'이 무서운 것입니다. 가령 경제적으로 파산했습니다 할지라도, 원래 사람은 빈 몸으로 태어난 것이니, 그리 당황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은 마음의 파산입니다. 마음이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한 번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쉽사리 다시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외면적인 빈곤 방지의 방법을 생각하는 동시에, 또한 보다 중대한 것은 마음의 빈곤을 극복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먹는 동물이다”고 한, 포이에르바하는 또 한 편으로 “인간은 인간에 있어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만 '損得'의 타산 즉, '有所得'의 마음으로 움직이지 않는, 때로는 타산을 넘어서서 '무소득'의 마음을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참다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흔히들 말하면서 “수지 맞는 일이냐”고 합니다. 즉 손해가 없고 이득이 있는 일이냐고 물어서, 계산을 재어서 일을 하는 것이 총명한 현대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모든 사물을 타산적으로 계산 할 때, 이 '반야심경'의 책을 읽는 것은 무슨 소득이 있겠습니까?
금전상으로는 한 푼의 이익도 없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경제생활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익지사'가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만, 경제인으로서 자기를 보지 않고, 때로는 종교인으로서의 자기, 아니, 참된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비로소 '무소득'의 깊은 뜻을 이해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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