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의(11)-열반의 언덕으로 가자
본문: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揭諦 揭諦 波羅揭諦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 아제 바라아제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해석(解釋):그러므로 이제 반야의 심오한 지혜로 평화로운 저 언덕에 이르러 사는 가르침을 설하리니, 지금까지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주문으로 말한다면 곧 이러하니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건너 갔네, 건너 갔네. 저 언덕에 건너 갔네. 저 언덕에 모두 다 건너 갔네. 깨달음을 성취 했네.
성취했네, 성취 했네. 모든 소망 성취했네. 만 중생들의 모든 소망 다 성취했네.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우리 모두 행복하여라. 이 세상 우리 모두 다 행복하여라.
지혜의 완성 - 삶의 완성, 성공적인 인생이란 모든 고난과 불행과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진정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삶을 말한다. 그 길은 오로지 위대한 지혜로써 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위대한 지혜로써 모든 고난과 문제를 해결하고 보람과 행복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강설(講說):여기에 반야심경의 최후의 구절입니다. 예로부터 비밀진언이라 해서 일반으로 번역되지 않고, 범어 그대로 독송되면서 대단히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어찌해서 번역되지 않았는가 하면, 대체로 번역이라고 하는 것이, 충분히 본 뜻을 나타내기는 지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어의 음을 그대로 옮겨 놓기만 한 것입니다. 번역을 하면 원어가 가진 바 그 가치를 잃어버린다고 해서 이 다섯 구절은 번역하지 않고, 한자음으로 원어의 음을 그대로 해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주문'이나 '진언'이나 '다라니'는 모두 글자 한 자에도 불법 전체의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고도 합니다. 실로 무량무변의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예로부터 무리한 번역을 하지 않고, 다라니는 다라니대로 하고, 진언은 진언대로, 주문은 주문대로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아멘'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널리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태여 그것을 알고자 원하는 분들을 위하여, 그 뜻을 잠시 풀어 보자면, '아제'란 즉, 건너간다는 뜻이다. '아제' '아제'라 함은 건너간다 건너간다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건너가는가 하면 다음 '바라아제'라는 구절이 그것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바라"는 바라밀다의 준말로 "평화로운 저 언덕으로 가자" 즉 '저편으로 건너간다'는 것입니다. '저 편으로 건너간다'는 어떠한 뜻인가 하면, 그것은 피안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미혹된 이편 언덕으로부터 깨달음의 저편 언덕으로 가는 것입니다. 즉, 범부의 세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다음에 '바라승아제'라는 것은 '바라'는 저 편이라는 뜻이며, 僧이란 사부대중으로 짜여진 불교의 교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구․비구니․우바새(淸信士)․우바이(淸信女)의 사부대중이 함께 가자는 보다 보편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승아제'라 함은 도달한다, 맺어진다,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라승아제'라 함은 범부 중생이 부처님의 세계에 도달해서 부처님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모지사바하'라는 것은, '모지'는 보리 즉 깨달음을 말합니다.
'사바하'는 행원을 의미하는데 속성취(빠른 성취)한다든가 만족한다든가 하는 뜻이다. 기독교의 아멘이란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독경을 하고 나서 마지막에 주문이나 진언이 나오는데 “사바하”로 끝맺음을 합니다. 그 부분이 바로 “속히 성취하여지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반야심경의 진언이야말로 진실로 불가사의 것입니다. 이것을 염송하면 무명의 번뇌는 사라지고 오도의 길이 열리는 신비가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呪)라는 것은 빈다는 뜻입니다. 짧은 구절을 진언(眞言) 또는 주(呪)라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을 다라니 또는 대주(大呪)라 합니다. 대승불교에서 밀교(密敎)가 발달되면서 진언(眞言)은 "모든 힘을 가진 불가사의 한 것 (總持)"으로 존승되어, 수행 방법으로 크게 권장되기도 하였습니다.
신주(神呪)란 총지(總持)의 뜻입니다.
그래서 주문의 뜻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면, '가는 이여, 가는 이여, 저 언덕으로 가는 이여, 저 언덕으로 온전히 가는 이여, 깨달음 이여, 영원하여라'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가세, 가세, 저 언덕에 가세, 우리 함께 저 언덕에 가세, 깨달음이여, 행복이 있어지이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주문으로《반야심경》의 마지막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이 주문 속의 '가는 이여'라는 말속에는 '당신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딘가를 향해 끊임없이 가고 있습니다. 한 살은 두 살을 향해. 학생은 학교를 향해, 어른은 돈과 명예를 향해 끊임없이 가고 있습니다.
메텔링크<공간의 일생>에
“인간의 일생은 한 권의 책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매일 그 책의 한 페이지를 반드시 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쁨의 미소로써 쓰고, 어떤 사람은 또한 슬픔의 눈물로 쓰고 있습니다. 하여간 인간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무언지 모르지만 날마다 한 페이지씩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날 그 날의 한 페이지씩이 모여, 결국 귀중한 인생의 책으로 되는 것입니다.
희곡가 체흡은 “인생이 두 번 되풀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한 번은 연습, 한번은 청서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진짜 책에서는 미스 프린트가 되면 정오표를 붙여 고칠 수 있지만 인생의 책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롱펠러가 “쓸데없이 과거를 후회하지 말라. 달콤한 미래에 희망을 걸지 말라. 살라, 힘써라. 이 현재에”라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우리는 이 순간을 진솔하게 잘 살아야 합니다.
또 <쇼켄황태후>의 시에
“머리 모양 매만질 때마다 우선 생각하라.
각자의 마음의 모양은 어떠한가 하고”라는 명구가 있듯이 우리는 얼굴과 자기 옷차림새와 외형에는 신경을 쓰고 시간을 투자하면서 마음의 화장하는데 시간을 10분도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자신의 마음에 화장하는데 10분이라도 투자를 해야 합니다. 정말 예쁘게 화장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마음이 예쁘면 외형은 저절로 향기가 납니다.
'인간은 먹는 동물이다'고 한, 포이에르바하는 또 한 편으로 '인간은 인간에 있어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만 '損得'의 타산 즉, '有所得'의 마음으로 움직이지 않는, 때로는 타산을 넘어서서 '무소득'의 마음을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수지 맞는 일이냐'고 합니다. 즉 손해가 없고 이득이 있는 일이냐고 물어서, 계산을 재어서 일을 하는 것이 총명한 현대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모든 사물을 타산적으로 계산 할 때, 이 '반야심경'의 책을 읽는 것은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할 때 금전상으로는 한 푼의 이익도 없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경제생활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익지사'가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만, 경제인으로서 자기를 보지 않고, 때로는 종교인으로서의 자기, 아니, 참된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그리하면 비로소 '무소득'의 깊은 뜻을 이해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병은 마음으로부터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건강한 정신으로 몸의 병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어느 고승의 말씀이 '앓아야 할 시기가 오면 앓는 것이 좋고, 죽어야 할 시기가 오면 죽는 것이 좋다. 이것이 재난을 모면하는 유일의 묘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재난을 모면하는 길은 재난을 겁내고 피해 갈 것이 아니라, 그 재난에 맞부딪쳐서 이겨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병에 걸렸을 때에 공연히 빨리 나으려고 애쓰고 조바심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각오를 가지고 서서히 병과 대결할 마음의 여유를 가질 때에는, 이미 병에서 이겨 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는 순전히 우리들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무엇이냐? 싸우는 것입니다. 내일의 문제는 무엇이냐? 이기는 것입니다.
모든 날의 문제는 무엇이냐? 죽음인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입니다. 모든 재난과 싸우는 것입니다. 맑고 올바른 마음이 끝없는 육체의 욕망과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결국, 정신과 물질의 투쟁입니다. 그리해서 내일의 과제는 마음으로 육체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지혜로서 미혹의 번뇌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날의 문제는 죽음이라고 하는 이 엄숙한 말을 우리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죽음을 각오한다, 목숨을 걸어 놓고 한다, 이 말처럼 세상에서 강하고 무서운 말은 없습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일은 결국 진실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지 않는 자가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죽을 시기에는 죽는 것이 좋다'함은 이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신수대사는
“몸은 한 그루의 보리수요, 마음은 면경대와 같도다. 때때로 부지런히 쓸고 닦아서 때 끼지 않도록 하라” 라고 했습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이 반야의 지혜로서, 진실한 정각을 얻으셨으니, 우리들도 또한 반야의 지혜를 닦음으로써, 참 보리의 세계로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상으로《반야심경》의 강설을 모두 마칩니다.《반야심경》의 공 도리를 체득함으로써 그 오묘한 이치가 생활 속의 지혜로 완성되길 기원하며, 맨 마지막의 주문인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우리는 가슴에 담고 진솔하게 나 자신과 마주 앉아 보십시오. 정말 나 자신과 진솔하게 대화를 할 때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 연꽃이 활짝 피어오르고 향기가 진동 할 것입니다. 행복한 시간을 나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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