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강의(3)-1.法會因由分
1. 法會因由分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收衣鉢洗足已敷座而坐
해석(解釋): 법회가 열리게 된 원인(法會因由分)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천이백오십명의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공양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셨다. 성안에 있는 집들을 차례로 다니시며 밥 받기를 마치고 다시 본래 계신 곳으로 돌아와 공양을 끝내신 다음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강설(講說):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은 이 금강경을 부처님께서 설법(說法)하시게 된 동기(動機)를 아란존자(阿難尊者)께서 설명하신 대문(大文)입니다. 법회가 열리게 된 인유라 하여 법회인유(法會因由)라 했고, 과목(課目) 장절(章節)이란 뜻으로 분(分)이라 했고, 제일장(第一章) 또는 제일과(第一課)란 뜻으로 제일(第一)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사이 말로 고치면 ‘제일장 법회가 열리게 된 인연’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인도 고대 왕국인 코살라국의 사위성, 범어 이름 슈라바스티에 있던 기수급고독원이라는 절, 보통 기원정사라 하며 범어로는 제타바나(Jetavana)라 하는 절에 있을 때의 평상의 생활 모습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윈정사는 부처님이 가장 오랫동안 머무셨던 곳으로 이곳에서 25안거를 보냈습니다. 부처님의 모든 설법 중 약 3분의 2는 이 곳에서 설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부처님은 1,250명의 제자들과 함께 기원정사에 계시다가 사위성 시내에 나가 탁발을 하십니다. 밥을 얻어 다시 정사로 돌아온 부처님은 평소처럼 공양을 드시고 바리를 거둔 후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앉았습니다. 바로 이 장면이 금강경 무대의 서막입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일상사에서 깨달음을 발견하는 동기붙임이 있습니다 밥을 빌어와 먹고 자리를 정돈하여 앉으셨다는 누구에게나 있는 일상의 생활 모습이 지혜의 안목으로 보면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 깨달음의 진리는 내재해 있는 것이며, 모든 현실적 경계가 깨달음이 열리는 관문이며, 동시에 깨달음 자체의 구체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본문: 如是我聞 一時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해석(解釋):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천이백오십명의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강설(講說): 경전의 내용 구성은 육성취(六成就)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육성취는-누가(我) 언제(一時) 어디서(舍衛國祇樹給孤獨園) 무엇을(如是) 어떻게(佛在) 하였나(聞)로 되어 있습니다.
경전을 살펴보면 모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시작합니다. 『열반경』에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고 할 때 아난이 부처님께 여쭙니다. "이제 떠나시면 제가 그 동안 말씀했던 것을 기록하여 하는데, 다른 사람이 과연 믿겠습니까? 제가 조작 한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경전의 서두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붙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여기 금강경에서 말하는 나는(我) 아난존자입니다. 아난존자는 머리가 녹음기 같아서 말하는 것을 한자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해서 다문제일의 제자답게 "나는 들었다."고 밝히신 것입니다.
如是我聞의 如란 어떤 것인가 如란 如如不動의 如입니다. 여여부동은 불법의 경계입니다.
일시(一時)는 "그 때"라는 뜻입니다. 인도의 문화나 역사를 보면 시간을 중요시 않습니다. 시간적 관념과 역사적 관념이 뚜렷하지 않으며 숫자 관념이 치밀하지 못합니다. 팔만 사천이란 숫자는 흔히 접할 수 없는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경전에 나오는 "그 때"의 의미는 탁월합니다. 진정으로 도를 깨치면 시간 관념이 없어집니다.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것은 시간은 상대적인 것으로 진정한 시간은 만년이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만년이다. 고금에도 없고 과거와 미래도 없다는 뜻입니다. 바람과 달에는 옛과 지금이 없건만, 감정에는 절로 얕고 깊음이 있다(風月無古今 情懷自淺深)는 옛 시가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시간은 상대적이지만 불교의 시간은 유심적인 것으로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울때는 1초가 일백만년 같고 즐겁고 행복 할 때는 1시간이 1초 같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때”라는 것은 고금도 미래도 없습니다.
舍衛國은 부처님 49년 설법중 대부분을 사위국에서 설해졌습니다. 기원정사에서 반야부를 21을 설하셨고, 사위국은 중인도 지역에 자리잡은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국가입니다.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은 기타태자의 땅에 금을 깔면 땅을 주겠다말에 급고득장자가 실천함에 탄복하여 기타태자가 땅을 보시하여, 기타태자와 급고독장자의 두 힘으로 이 절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절을 두 사람의 이름을 합해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합니다. 給孤獨은 보시를 잘하는 사람으로, “고독한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누가 개인으로 절을 지으면 그 사람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선사도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고 다른 사찰도 창건주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많이 씁니다.
금강경과 경전에 흔히 나오는 1250명의 인원은 사실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리자(舍利子)는 부처님이 설법하기전에 이미 대스승으로 100명의 제자를 거느렸고, 삼가섭중 불(火)을 숭상하는 외도(事火外道)로서 맏형인 우루빈나가섭(優樓頻螺迦葉)은 5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둘째인 나제가섭(那堤迦葉)이 250명, 막내인 가야가섭(迦耶迦)이 250명과 신통력이 뛰어난 목건련이 100명의 제자와 야사비구(耶舍比丘)와 함께 출가한 사람이50명이 있었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설법을 듣는 기본 부처님의 제자가 그래서 1250의 비구가 됩니다.
비구(比丘)란 출가인으로써 걸사(乞士)라 합니다. 밥을 빌어먹는다는 뜻인데, 어떤 밥인가? 먹어 치울 한끼의 밥이 아니라 영원히 불생불멸하는 정신적 식량입니다. 위로는 부처의 밥을 빌고, 아래로는 일체중생에게 밥을 구걸하는 사람을 성불비구라고 합니다.
세존(世尊)이란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석가모니불은 삼천대천세계의 부처입니다.
삼천대천세계란 태양계를 하나의 보통세계라 합니다. 하나의 보통 세계에는 태양과 달 그리고 아홉 개의 행성이 있습니다. 과거 물리학이나 천문학에서는 태양을 항성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부처님은 지구상에서 사는 사람의 수명은 60세에서 100세정도라고 말합니다. 이 세계에서는 한 번의 주야가 하루지만 달의 표면에서는 반 달이 낮이고 단 달이 밤입니다. 부처님은 이 허공중에 태양계와 같이 많은 행성을 거느린 세계가 갠지스 강의 모래처럼 무수히 많다고 했습니다. 천개의 태양계를 합쳐 하나의 소천 세계라 하고, 천개의 소천세계를 중천세계라 하며, 다시 천개의 중천 세계를 합쳐 대천세계라 합니다. 부처님은 이 허공중에 삼천계의 대천세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삼천 개에 한정되지 않으며, 알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이 무한히 많다고 했습니다.
본문: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
해석(解釋): 그때 세존께서는 공양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셨다.
강설(講說): 부처님께서는 하루에 사시(巳時), 즉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에 한 때만 공양하셨습니다. 새벽에는 천인(天人)이 식사하는 시간이며, 정오는 사람이, 저녁은 귀신이 식사하는 시간입니다. 식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고의 양식을 먹는 사식(思食) 귀신이 먹는다는 촉식(觸食), 사람은 견식(見識), 부처님은 전식을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제자들과 같이 걸식을 나가셨습니다. 걸식하여 공양하시는 일상적인 일을 「금강경」의 서두에 올려놓고 이 경을 설하시는 동기로 삼았습니다.
가사는 복전의(福田衣)이라 합니다. 복을 증장 시킨다. 마치 밭처럼 중생의 복을 증장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또 스님들이 공양을 할 때 사용하는 식기를 바루라고 합니다. 바루는 와발(瓦鉢)과 목발(木鉢), 동발(銅鉢)이 있습니다. 남방에서는 탁발할 때 사용하는 큰 바루 하나이지만 우리 나라 스님들은 네 개로 된 바루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해석(解釋): 성안에 있는 집들을 차례로 다니시며 밥 받기를 마치고 다시 본래 계신 곳으로 돌아와 공양을 끝내신 다음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강설(講說):식사를 할 때는 또 큰 가사를 꼭 입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공양을 제공한 시주에게 복이 되라는 뜻입니다. 물 마시는 소리, 수저소리 하나 없이 해야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모두 벗어버리고 맨 몸뚱이 러닝 바람으로 모두 공양을 하고 있으니 시주한 사람에게 복이 안 갑니다.
그리고 대중들은 서로 음식을 똑같이 하고 의식주(衣食住)를 절대 평등하게 해야 합니다. 그 대신 지식과 수행은 어디까지나 계급을 찾아서 아는 것이 많고, 수행이 높은 사람 앞에서는 부처님같이 섬기고 절하고 그 지식 앞에 꼼짝 못하니 그것이 정말 이상적입니다.
차제걸이란(次第乞已)란 부잣집만 가고 가난한 집을 빼어 놓아서도 안되며 꼭 순서대로 다니며 일곱집만(七家食) 얻어 먹게 돼 있는 제도를 말합니다. 똑같이 일곱 집을 얻어 가지고 기원정사로 돌아와서(還至本處) 적게 얻어온 사람은 많이 얻어온 사람이 나누어주고 반찬이 좋은 것이 있으면 나이 많은 노장도 드리고 젊은이는 아무렇게나 먹는 것이 법도입니다.
그런데, 가섭존자는 가난한 집만 다니며 밥을 얻어 오고 아란존자는 부잣집만 다니며 밥을 얻어 오므로 부처님이 아란존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왜 부잣집만 다니며 밥을 얻느냐?”고 하니 부잣집에 가면 밥 얻기가 좋고 가난한 사람은 자기 먹을 것도 모자라니 딱해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가섭존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왜 가난한 집만 다녔느냐?” “가난한 집은 가난해서 복을 못 짓게 되므로 그래서 가난한 집을 골고루 다닙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마음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돈 없는 가난한 사람보다도 더 가난한 사람이다. 저 가난한 사람이 밥이 없다고 가난한 것이 아니고 불교를 믿고 곧 자기 마음을 믿으면 이것이 부자다. 장차 우주를 다 차지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잘 생겼다 못 생겼다 그것도 차별 말고 똑같이 불법에 인연 맺어주고 똑 같이 복을 짖도록 해 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남에게 무엇을 주고 좋은 일 한 것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니까 가난한 집일수록 빼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부터는 부잣집이나 가난한 집이나 골고루 평등하게 일곱집을 돌아서 탁발을 하였습니다.
공양을 끝내신 세존은 대중과 함께 가사를 벗어 놓고 발을 씻고 선상(禪床 : 앉는 자리)에 좌선(坐禪)을 하는 자세로 올라 앉으셨습니다. 그 당시 수행하는 비구들은 맨발로 다니게 돼 있었기 때문에 식사가 끝나면 발을 씻습니다. 이렇게 발을 씻고 선상에 올라앉아 참선(參禪)을 하는 데까지 말을 했으면 이것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한번 다 설명 한 것입니다. 이렇게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앉으면 이제부터는 일체 정진에 들어가는 것이 참선을 하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대중을 거느리고 계시다가 때가 되니 밥을 얻어와 가지고 선상에 올라와 앉으셨다" 부처님과 스님들의 하루생활은 밥 한끼 빌어서 먹는 생활이니 그 날 한끼 먹으면 하루 다 마쳤고 다른 일없으니 대소변 볼 것 제외하면 선상에 가만히 가부좌 틀고 앉아서 설법 듣고 하는 것으로 마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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