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금강경(金剛經) 강의(9) - 7. 無得無說分

難勝 2008. 6. 22. 04:51

                             금강경(金剛經) 강의(9)


7. 無得無說分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所以者 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해석:얻음도 설함도 없는 깨달음(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가? 또한 여래가 설한 진리가 있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일정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여래께서는 일정한 법을 설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모두 들어서 취(取)할 수 없으며, 또 말해질 수 없고 법이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현인과 성인은 하염없는 진리(無爲法)로써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강설(講說):여기 제칠장에서는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곧 석가여래는 아무 법도 얻은 법이 없고 깨달은 법도 없으며 부처님께서 입으로 사십구년 설법을 하셨지만 꼭 해야 할 말씀은 하나도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고향으로 가는 길을 모르고 딴 길로 험한 길을 가느라고 땀만 흘리고 고생을 하고 있으니 그 사람을 위해 “이리 가는 것이 옳소. 이리 가시오”했지만 꼭 그 길이 참된 길도 아닙니다. 이 마음 깨치는데 여행하는 것 같은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팔만 사천가지 방편이 있지만 그것도 결정된 법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도 아무 것도 얻은 게 없고 누구를 얻도록 해 줄 방법도 없고 또 말할 수 있는 어떤 진리도 없고 석가여래 사십 구년동안 단 한마디도 말한 적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석가여래의 불법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아 이것을 불법이라고 남겨 놓았느냐”고 실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법은 이 금강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글자나 말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개념으로 규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하고 그것이 무상(無上) 최고의 정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 정법은 우주 어디에고 없는 데 없이 꽉 차 있고 그것이 내 마음이라 합니다. 정법이란 사실 그대로를 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그대로를 여여(如如)하게 보고 듣는 게 없습니다. 종소리 하나를 두고 보더라도 우리는 제대로 못 듣습니다. 누구나 똑같이 듣는 것 같고 똑바로 듣는 것 같지만 우리의 얼굴, 귀가 서로 다른 것만큼 이 오관(五官)의 조직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듣는 것도 다 각기 다르고 진실 그대로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일본사람은 ‘강강’, 미국사람은 ‘딩동댕’ 우리나라 사람은 ‘땡땡’ 그렇게 듣습니다. 일본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 종소리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실지로 종을 쳐봐도 ‘강강’하는데 한국 사람은 왜 땡땡한다 하는지 모르겠다. 하고 우리들은 종소리가 강강이 뭐냐고 일본사람들 참 우스운 사람들이라 그럽니다.

  그러니 저의 어머니에게 어려서 종소리는 땡땡이라고 한번 들어 놓으면 죽을 때까지 땡땡이고, 어머니한테 강강으로 들어 놓으면 평생 강강입니다. 또 가령 슬픈 마음으로 있을 때 어떤 노래를 처음 들으면 그 노래의 곡은 어찌됐든지 항상 아주 슬프게 들립니다. 그 자체의 음성이나 가사가 슬픈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고 설사 재미있는 노래라 하더라도 그렇게 됩니다. 어떤 물건을 처음 볼 때 인상은 평생 못 바꿉니다. 그것은 다 오관이 전부 불완전하게 인식하고 사실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깨끗한 마음을 깨닫고 나면 땡땡도 강강도 궁궁도 그게 한꺼번에 다 들리고 세계사람 소리가 한꺼번에 다 들립니다. 왜냐 하면 그 소리를 모두 초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실 그대로를 아무 조건 없는 마음으로 사물(事物)이나 사람을 보고 대할 때 이것이 정각(正覺)입니다.

  우리는 물건의 빛깔도 노란 것을 검게도 검은 것을 희게도 봅니다. 전기 불 밑에서 보면 누렇지만 태양 빛으로 보면 하얗게 보입니다. 그러니 빛깔이 뭐냐 광선의 빛깔과 물체가 조화된 빛깔이지 실제의 빛깔은 아닙니다. 태양 밑에서 희게 보인다 해서 그것이 옳은 게 아니고 태양 빛깔과 섞여서 희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만일 여기다 붉은 전등을 비추면 모든 것이 빨갛게 보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관이 제대로 보고 듣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중생들의 생각, 개념은 다 이렇게 불완전한 오관작용에 의지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모두 다 잘못된 것입니다. 중생의 이런 잘못된 착각을 떼어버린 마음자리만 드러난 부처님에게는 얻은 것도 설명할 법도 없습니다. 만일 얻은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으면 그것은 오관에 의한 착각일 뿐 마음자리가 아닙니다. 마음만 드러난 자리에서는 주관도 객관도 끊어지고 시간 공간이 벌어지기 이전의 자리이므로 얻은 법도 얻을 주관도 없습니다. 또 마음을 깨쳤다고 하여 새로운 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본래부터 있던 마음 그대로이므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얻을 것도 말할 것도 없는 도리를 말하는 절이란 뜻으로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라 한 것입니다.


본문: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해석(解釋):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가? 또한 여래가 설한 진리가 있겠는가?"


강설(講說):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일이 있느냐, 또한 여래가 어떤 법을 설명한 바가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제 2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번역하면 곧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인데 “이 깨달음을 여래께서 얻었느냐. 또 여래께서 무슨 법을 설한 게 있느냐.” 하는 말씀은 “네가 날 사십년 따라 다녔는데 부처님이 성불했느냐. 그래 내가 성불하는 방법을 얘기한 적이 있었느냐. 그런 설법을 한번이라도 들어 본 적이 있느냐.”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본문: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해석: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일정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설(講說):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 물으심에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서 이런 진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하고 사뢰었습니다. 정법(定法)은 정해진 법. 결정된 바 없는 법. 만약 성불하는 법이 정해져 있다면 그 불법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이 생겨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 어디 정해진 법이 없다.

  그런데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해석하는 데 시비가 있습니다. 보통으로는 “결정한 법이 없는 것 그것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입니다.” 그렇게 새깁니다. 이것을 달리 새기는 이는 “결정한 법이 있어서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맨 나중에 전체를 부정합니다. 뜻을 아는 사람은 이리 새기나 저리 새기나 그 뜻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처음 듣는 사람에게 차이 있게 들리기도 합니다. 첫 번째 새김은 어떻다고 결정할 수 없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했다는 것은 일정한 법이 없어서 동그라미라든지 그렇게 결정한 모양 내용이 없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 모양도 빛깔도 없는 것, 아무 것도 아닌 것,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렇게 되므로, 그러면 뜻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하고 생각하게도 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새기는 법은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 가지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없다.” 그렇게 하면 말로 할 수 없는 것 꼼짝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서 그것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새긴 것과는 표현 상 대조가 됩니다. 한문이니 그렇게 새길 수도 있고 또 이렇게 새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 부처님 얻은 법이 그것뿐이다. 그렇게 이름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렇게 새기는 경우에는 어떤 생각을 붙일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까딱해 볼 수도 없이 아주 앞뒤가 딱 끊어져 버리게 새긴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한 법이 없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새기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그건 것인가 보다 하고 꼬리가 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아무 것도 아닌 걸 깨달았나 보다 그렇게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결정된 법이 없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닌 것이 불법이란 뜻입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어떤 관념이 마음속에 남으면 나중에 참선이나 염불이나 하다 삼매가 나타날 때 제가 생각하던 것이 나타납니다. 자기 생각이 꿈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 처음부터 말씀하신 내용을 생각해 보면 설명할 수 있는 법을 깨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 것도 결정한 법이 있어 가지고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지은 법이 없느니라”하고 새긴 두 번째 새김이 더 분명합니다. 이것은 금강경뿐 아니라 일체 경전도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서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법이 애초에 없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새기지 않지만 이렇게 새겨야 좀 가깝게 새긴 것입니다.

  앞에서 새긴 것처럼 “어떤 결정한 법이 없는 것이 이것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그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렇게 새기고 보면 삼보리의 이름지은 짐작이 남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 개념이 생기게 합니다. 처음부터 어떤 개념이 생길 수 없는 곳으로 몰고 들어가야 하는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보다’하는 개념이 생겨 놓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공부하다 그런 경계가 나타나면 ‘아! 이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 보다. 이것은 참 뭐라고 할 수 없구나. 부처도 중생도 아니고 별 보고 깨친 것도 아니고 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것뿐이구나.’하고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경계가 나타나면 공부가 다 된 줄 알고 거기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사실 그런 게 없다. 꼭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지적할 수 있는 법이 없다. 열반 생사도 불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은 공부를 해 보고 자꾸 들으면 짐작이 갑니다.


본문: 亦無有定法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해석(解釋):또한 여래께서는 일정한 법을 설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모두 들어서 취(取)할 수 없으며, 또 말해질 수 없고 법이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강설(講說):두번째 문제에 대해 수보리가 답합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실 만한 정해진 법 또한 없다.” 금강경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원각경에 저렇게 말씀하시고, 법화경에 다르게 말씀하시고, 화엄경에 독특하게 말씀하시니 어느 것이 정법입니까?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좋고, 다 좋다. 그래서 여래가 말 할 수 있는 정해진 법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결정된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그 법을 얻으신 것이 없으며, 따라서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결정된 법을 설명할 만한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을 저희들에게 그냥 말씀해 주신 것이오니 그것은 법을 설명하신 것이 아니옵니다. “이것만은 오직 석가여래인 내가 깨친 법이니 팔만사천 외도(外道)에게 다 물어 봐도 아무도 모르지만 여래만은 설명할 수 있는 법이다. 하고 말씀하신 그런 법은 없습니다.” 하고 수보리존자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팔만대장경은 뭐냐. 그건 달 보라고 가리킨 손가락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손가락만 봅니다. 어린아이니까 달 보라고 가리켜 줘도 손가락만 보는 소견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십 구년동안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말씀하신 것은 달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그게 불법의 골수가 아닌 줄을 알아야 하는데 아이가 달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듯이 팔만대장경에서 가리키는 마음을 깨치지 못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는가.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고 설명한 것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 그 글자이고 음성이지 그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말이고 종이에 먹칠한 것이지 그 글자 가지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찾다가는 안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손가락만 들여 다 보는 것처럼 백만년 들여다봐도 달은 못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사십구년 말씀하신 팔만사천대장경이 그 음성이고 글자 먹칠한 것이어서 아무 뜻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무상(無上)의 정법을 깨쳐서 성불했다고 한다든지, 최고의 묘법을 사십 구년동안 설법해 주셨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곧 달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께서 깨달아 얻은 법도 없고 중생에게 설법하신 말씀도 없다”고 하신 뒤에 계속해서 그 까닭을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새삼스럽게 성불하신 적이 없으며 부처님께서 사십년 설하신 말씀도 다 들어 두어야 할 건 한마디도 없습니다(不可取). 또 들었다 하여 누구에게 말해 줄 것 한 마디도 없고 확실히 얘기 안 하면 안 될 그런 법은 본래부터 없습니다(不可說). 또한 받아들일 만 하고 받아들여야 할 진짜 법은 하나도 없으며(非法) 더군다나 쓸데없는 것, 법 아닌 것, 아무 소용없는 법, 그런 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비법(非法)은 잘못된 법, 그릇된 법인데 또 그것조차도 아닙니다. 만일 비법이라도 된다면 그대로 법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가치가 있지만 이런 비법도 아니라는 것입니다(非非法). 왜냐하면 그것은 중생세계의 상대법(相對法)을 초월한 현성(賢聖)의 법이기 때문이라는 소이를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취할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은 모두 이차원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 일뿐이다. 진정한 그것은 말로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무리 맛있다고 설명을 한들, 그저 맛있겠구나 느끼는 정도이지 직접 먹어본 것이 아니라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이차원적이지 그 맛이 아닙니다. 불법도 그렇다. 말로 표현 될 수 없다. 표현 된 것은 이미 아니다. 그래서 여래의 설법은 모두 취할 수 없는 것이며, 말 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도 고정된 설법이란 없으며, 고정된 설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해석(解釋):왜냐하면 모든 현인과 성인은 하염없는 진리(無爲法)로써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강설(講說): 왜 그러냐 하면 “일체의 성현은 모두 무위로 법을 삼으나 차별이 있다” 불교의 이래서 위대합니다. 불교는 기타 종교처럼 자기 이외의 종교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불법은 일체의 종교, 일체의 스승을 인정합니다. 화엄경에 보면 창녀와 마왕까지 우리의 스승으로 섬깁니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가르치기만 하면 결국 좋은 것입니다.

예수의 도, 부처의 도, 마호메트의 도, 공자의 도, 노자의 도중에서 어느 것이 진정한 도일까요? 어떤 도가 가장 보다 크며, 어떤 도가 가장 작을 까요? 진리는 단지 하나입니다. 경전에 비유하듯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는 것처럼 가기 한 면만을 고집합니다. 귀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둥글다고 하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길다고 할 것입니다. 장님이 코끼리 더듬듯 한 면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개인의 주관적인 인식입니다. 그것을 모두 도라 말하지만 그것은 도가 아닙니다. 불교를 배우는 사람은 이런 착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말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불법은 일체를 포함할 수 있으며 일체의 성현은 모두 무위를 법으로 삼아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진리는 단지 하나 둘이 아닙니다. 진리의 한 측면만 보고 그것이 옳고 다른 것이 그르다고 한다면 그것이 다로 틀린 것입니다. 진정으로 부처님의 경계에 들었다면 만상을 포용하고, 부정하기도 하며, 세우기도 합니다. 이것이 부처의 경계입니다.

여기서 수보리 존자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所以者何). 일체현성(一切賢聖)이란 곧 모든 불보살님들과 독성(獨聖)이나 나한님들의 세계를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깨달아 성인이 된 지위에 나아간 분들을 부처님과 보살님들이나 조사님 나한님들이라 하며, 이분들은 다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는 무위법(無爲法), 텅 빈 경지, 아무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는 마음자리에 들어선 분들입니다(無爲法).

  정말 마음의 본 자세에 들어가서 나와 남이 없고, 이해득실(利害得失)이 없고, 생노병사가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경지인데, 그러나 이와 같이 하는 게 없는 법 거기에도 보면 초지(初地)보살이지, (二地)보살, 삼지(三地), 십지(十地)보살도 있고 五二위(位)의 보살경계를 넘어야 부처님이 됩니다. 이 보살님들은 다 하는 것 없는데 들어가서 이렇게 등급(等級)이 있고 차별(差別)이 있습니다. 마치 서울대학에 입학했다 하면 일학년도 서울대학생이고 삼학년, 사학년도 서울대학생이지만, 그러나 공부하는 내용을 보면 일학년, 사학년의 차이가 있고 대학원, 박사과정 이상의 더욱 깊은 내용을 공부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나 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참선(參禪)을 해서 견성(見性)을 했다 해도 처음 깨친 초견성(初見性)을 가지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부터 무위법(無爲法)에 들어선 것이므로 비로소 깊은 공부를 하게 되고 보임(保任)을 하여 참 수행을 하게 됩니다. 그래야만 초지(初地)에서부터 五二위의 보살경계(菩薩境界)를 닦아 올라가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위법(無爲法)의 현성(賢聖)의 경계는 하는 것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닦는 것 없이 닦고 무심(無心)으로 하는 수행이어서 차별 없는 가운데 있는 차별이므로 중생세계의 분별심(分別心)으로 있는 차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별입니다(而有差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