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金剛經) 강의(11)
9. 一相無相分
須菩提於意云何須陀洹能作是念我得須陀洹果不須菩提言不也世尊 何以故須陀洹名爲入流而無所入不入色聲香味觸法是名須陀洹須菩 提於意云何斯陀含能作是念我得斯陀含果不須菩提言不也世尊何以 故斯陀含名一往來而實無往來是名斯陀含須菩提於意云何阿那含能 作是念我得阿那含果不須菩提言不也世尊何以故阿那含名爲不來而 實無不來是故名阿那含須菩提於意云何阿羅漢能作是念我得阿羅漢 道不須菩提言不也世尊何以故實無有法名阿羅漢世尊若阿羅漢作是 念我得阿羅漢道卽爲着我人衆生壽者世尊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最 爲第一是第一離欲阿羅漢世尊我不作是念我是離欲阿羅漢世尊我若 作是念我得阿羅漢道世尊則不說須菩提是樂阿蘭那行者以須菩提實 無所行而名須菩提是樂阿蘭那行
해석(解釋):무상(無相)의 가르침(一相無相分)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능히 이런 상각을 하되 내가 수다원의 지위률 얻었다 하겠는가? "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성인의 경지에 들어간 이들이지만 들어간 바가 없으니 눈에 보이는 대상인 물질적 형체와 귀에 들리는 대상인 소리, 코에 맡아지는 대상인 냄새, 혀에 느껴지는 맛, 피부에 닿는 촉감, 그리고 기억의 대상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이름하여 수다원이라 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사다함의 지위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한 번 갔다가 되돌아오는 이들이지만 실로 갔다가 되돌아옴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합니다."
"수보리야, 어떻께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나함의 지위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오지 않는 이들이지만 실로 오지 않음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나함이라 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의 지위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로 아라한이라 할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의 지위를 얻었다 하면 이는 자아, 인간, 중생 그리고 수명에 대한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다툼이 없는 고요한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가장 제일이라 욕망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라 하시나 저는 제가 욕망을 떠난 아라한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이렇게 생각하되 저가 아라한의 지위를 얻었다 하면 세존께서는 곧 수보리가 다툼이 없는 고요한 삼매의 수행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려니와, 수보리가 실로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수보리는 다툼이 없는 고요한 삼매의 수행을 좋아한다고 하십니다."
第九 一相無相分 전체내용:
강설(講說):<일상무상분>의 내용은 수행자가 수행을 이루어 가도 수행을 이루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부처님이 설한 법은 잡아낼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다 하였지만 불법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수행의 지위가 엄연히 달라 수다원을 얻은 지위가 있는가 하면 아라한을 얻은 지위도 있어 수행해 얻은 정도가 다른데 어째서 얻은 것이 없다 하는가에 대한 궁금을 풀어주기 위해 부처님이 사과(四果)성인의 예를 들어 하나 하나 물은 것입니다. 초기 불교의 전형적인 수행자들을 성문(聲聞)이라 불렀습니다. 이 성문이 번뇌를 끊어 생사를 벗어난 해탈의 경지를 얻는 궁극의 목적을 이루기까지 네 가지 지위를 얻어 수행의 성숙정도의 차별을 말했습니다. 이는 번뇌를 끊어 가는 과정이 선후의 단계가 있다고 보고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의 계위(階位)에서 끊는 번뇌를 구분한 것입니다. 견도(見道)는 도를 보는 지위 다시 말하면 도에 도달한 지위이며 수도는 뒤에 다시 구체적인 수련을 더해 가는 지위입니다. 견도와 수도를 합하여 유학(有學)이라 하고 이 과정을 지나 극과(極果)인 아라한에 이르면 무학(無學)이라 합니다. 견도위에서 끊는 번뇌를 견혹(見惑), 수도위에서 끊는 번뇌를 수혹(修惑) 혹은 사혹(思惑)이라 합니다. 수다원은 범어 스로타파나(Srotapana)를 음사한 말인데 견혹을 끊고 처음으로 성인의 류에 들어온 이들이라 입류(入流)라 번역합니다. 욕계와 색계, 무색계에서 사제(四諦 : 苦, 集, 滅, 道)를 닦아 16심을 성취하여 88가지 번뇌를 끊는다 합니다. 이리하여 육진을 벗어나 범부와 같은 미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다함은 스크다가민(Skdagamin)의 음사로 일왕래(一往來) 곧 한 번 왔다 가는 이라는 뜻입니다. 인간 세상에 한 번 더 왔다 가면 해탈을 얻어 생사를 면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다함부터는 삼계의 수혹을 끊습니다. 수혹은 도를 닦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번뇌로 감정이나 의식에 남아 있는 악습의 잔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도를 장애합니다. 견혹을 후천적인 악습이라면 수혹은 선천적인 악습입니다. 탐(貪), 진(嗔), 치(痴), 만(慢)의 사혹이 중심이 되어 삼계에 9품 수혹이 있는데 사다함은 이 중 6품까지를 6생에 걸쳐 닦아 끊는다 합니다. 아나함은 아나가민(Anagamin)의 음사로 불래(不來) 곧 오지 않는 이라는 뜻입니다 사다함이 한 번 왔다 가는 반면 아나함은 인간세상으로 오지 않고 색계의 제4선천 안에 있는 나함천(무번천에서 색구경천까지)에 태어납니다. 아라한(Arahan)은 성문의 마지막 지위로 7생 60겁의 수행을 완성하여 완전히 생사를 벗어나 해탈을 누리는 성자입니다 불생(不生), 무적(無賊), 응공(應供)이라 번역합니다. 금강경이 대승을 시작하는 법문이므로 초기 불교의 성문사과(聲聞四果)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과(四果)의 성자들이 모두 자기 수행의 지위를 얻었지만 한 사람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장을 <일상무상분>이라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존재를 밖으로 표현하려는 자아의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관념의 형성을 통한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고로 능소(能所)가 끊어졌다고 말해 왔습니다. 이러한 경지가 무위 (無爲)입니다. 하염없는 그 속에 들어갔을 때 도에 계합되는 것입니다. 무쟁 삼매란 주객의 대립이 없어 갈등이 일어나지 않으며 욕심의 번뇌가 다하여 고요히 스스로가 공(空)의 진리에 머무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란나행이란 고요함을 즐기는 선정의 수행으로 공의 원리를 알고 법을 관하는 수행법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 수보리가 이 수행을 가장 잘 했다 합니다.
一相無相分-절대의 하나인 상
강설(講說):일상(一相)이란 하나로 됐다는 뜻으로 물질과 정신이 하나가 되어 부처님과 중생이 하나입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하나로 된 때는 아무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다고 하지만 실은 모양이 없어진 그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느 때를 말하느냐. 마음이 객관을 상대하지 않는 때를 말합니다(無相). 마음이란 성품자리(品: 性根本實在)이고 불성자리(佛性: 깨달음의 본바탕)인데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이 마음이 아무것도 상대하지 않고 부처도 사바도 상대하지 않으며, 있고 없는 것도 상대하지 않으며 심지어 좋고 싫은 것도 상대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고 내가 모든 기분을 내기 이전인 때를 가리킵니다.
이런 지경에 들어서면 나 자신마저 없는 무아(無我) 지경이 됩니다. 내가 없으니까 모든 상대를 초월해서 마음만 오로지 있는 때이므로 이것은 아무 모양이 아닙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이란 허공을 가리킵니다. 모든 현상은 있는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물질로 만들어진 건 크나 작으나 다 있는 모양이고 없는 모양은 허공입니다. 그런데 공기도 없는 진공은 없는 것으로 확실히 있는 것이나 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무상(無相)이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란 말이 아니고, 마음이 객관 상대를 두지 않는 것, 일체 잠재의식까지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잠재의식까지 다 끊어지고 난 그것은 빈 허공이 아닙니다. 허공은 뭘 생각할 줄 모르고 알 줄 아는 능력이 없지만 허공까지 끊어서 초월했는데 순수한 본래 면목 그대로 살아 있는 이 마음은 있는 모양도 아니고 없는 모양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로 되었을 때, 상대가 없을 때, 오로지 이 마음만 살아 있을 때는 그때는 있다 없다가 아니며 허공 모양도 아니고 물질 모양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일상(一相)이란 구공지경(俱空地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생각하다 저 생각하다 일분 동안에도 백천만 가지의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니 이것은 일상이 아니라 다상(多相)이고 복잡상(複雜相)입니다. 이런 번뇌, 망상이 아공(我空)이 되고 법공(法空)이 돼서 공했다는 생각까지 다 놓아 버리어 ‘구공(俱空)’이 된 것을 ‘일상’이라 한 것입니다. 그러니 ‘구공’이라 하는 그것도 마음의 별명이고 뭐라 그래도 제 이름이 아니므로 이것은 ‘구공’이라 하는 그것도 마음의 별명이고 뭐라 그래도 제 이름이 아니므로 이것은 구공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텅 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삼라만상이 그대로 다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일체상을 다 떠나서 범소유상이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하니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해서 그 상을 다 초월하고 있는 것이 일상(一相)이고 무상(無相)입니다.
본문: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須菩提言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해석(解釋):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다원은 자신이 능히 수다원의 과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다원은 영원한 평화의 흐름에 들었지만 영원한 평화의 흐름에 들었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형태(色)를 얻은 것도 아니며, 소리(聲), 냄새(香), 맛(味), 느낌(觸), 마음의 대상(法)에 이르기까지 얻었다고 생각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불리웁니다."
강설(講說):“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네 뜻에는 어떠하냐. 네 마음에 어떻게 생각이 드느냐.? 그런 뜻입니다. “수다원(須陀洹)이 능작시념(能作是念)하되, 수다원이 이런 생각을 하겠느냐. 다음과 같이 마음을 먹겠느냐. ‘내가 이제 수다원과를 얻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부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에 수보리존자 말씀이, “아니옵니다. 부처님, 어째서 그러냐 하면 수다원은 ‘흐름에 들어간다’는 말인데 색, 성, 향, 미, 촉, 법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을 수다원이라 했기 때문입니다.”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수다원(srdtapanna)이란 본래 인도 말이지만 그 뜻은 흐름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곧 본문에 입류(入流)했다고 하는 유(流)란 말은 성류(聖流)라는 말이니 성인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말입니다. 범부가 아니고 이제부터는 성인이 됐다는 뜻입니다. 소승불교의 계급에 四급이 있는데, 학교에 일학년, 이학년 올라가서 사학년이면 졸업하는 것과 같은데, 수다원은 소승불교 일학년에 입학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학년인 사다함에 진급하려면 마음 가운데 일체의 색, 성, 향, 미, 촉, 법(色聲香味觸法)에 걸리지 말아서 진리니 비진리니 외도니 사도니 정도니 불법이니 하는 그런 망상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깊지 못하고 도(道)가 얕기 때문에 초과(初果)라 한 것입니다. 맨 처음으로 번뇌 망상이 쉬고 조용해져서 해탈했기 때문에 성류(聖流)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여태 산보고 높다 물보고 깊다 이렇게 생각하고 초등학교에서 대학 졸업하기까지 배운 온갖 것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살다가 부처님 덕분에 구공에 대한 법문을 듣고 보니까 참말로 그게 가질 바 참된 지식이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불교에서 대승과 소승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소승을 성문(聲聞)이라 하고, 성문보다 조금 높은 것을 독각(獨覺) 또는 연각(緣覺)이라 합니다. 아난(阿難)이나 수보리 등 부처 제자들은 성문이라 할 수 있고, 이 보다 좀 더 높은 단계가 바로 독각불(獨覺佛)입니다. 독각불은 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합니다.
독각(獨覺)은 부처가 없거나 문화가 없는 시대, 심지어 불교가 없는 세계에 태어나더라도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독각으로서, 연각이라고도 하는데 소승입니다.
소승은 사과나한(四果羅漢)으로 나뉘어집니다. 초과나한은 수다원(須陀洹), 이과나한은 사다원(斯陀洹)이고, 삼과나한은 아나함(阿那含)이며, 사과나한은 아라한(阿羅漢)입니다.
어떻게 수행하면 사과(四果)에 이를 수 있을까요? 반드시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끊어 없애야 합니다.
견혹(見惑)은 다섯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견해상의 학문상의, 관념상의 문제입니다. 바로 신견(身見), 변견(邊見), 견취견(見取見), 사견(邪見), 계금취견(戒禁取見)입니다. 종교인, 철학자, 대학자는 모두 견혹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혹자는 식견(識見)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자는 변견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견해와 학문이 높을수록 오견(五見)은 더욱 심합니다. 사견과 계굽취견은 대부분 종교나 신앙의 측면과 관계가 있습니다. 초하루 보름은 절에 가야한다든지 주일은 교회나 성당에 꼭 가야 한다는 식의 어기면 계율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계금취견입니다. 견취견은 자신이 마음으로 얻은 수양을 말합니다. 좌선을 하다가 빛을 본다든지 어떤 경계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견해와 관념상의 문제입니다.
사혹(思惑)에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옵니다. 무엇을 탐할까요? 이름을 탐하고, 이익을 탐내거나, 감정을 탐내어 놓아버리지 못합니다. 세상 일체의 것에 대한 탐냄은 모두 탐입니다.
초과나한인 사다원(斯陀洹)은 다섯 견혹(見惑)을 끊었으나 사혹(思惑)은 아직 근본적으로 해탈하지 못했습니다. 남아 있는 습(習)을 아직 끊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 인간세계로 다시 와야합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감정은 일곱 번 인간으로 와야 비로소 끊을 수 있습니다.
탐심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어떤 스님이 계셨는데 이 스님은 한평생 좋은 공덕만 쌓았습니다. 절을 짓고, 경전을 강의하며 살았습니다. 비록 좌선 수행은 하지 않았지만 그 공덕은 아주 컸습니다. 나이가 들자 저승사자 두 명이 그를 잡으러 왔습니다. 저승사자는 염라대왕의 체포영장과 수갑을 휴대하고 왔습니다.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보게 저승 사자님들 내가 출가해서 공덕만 짓느라고 내가 할 일을 못한게 있으니 7일간 여유를 좀 다오. 그러면 정진 수행하여 성공하여 먼저 너희 둘을 제도하고 다시 너희 대장까지 제도해 주겠네” 두 저승사자는 이 스님의 공덕이 너무 장하여 딱하기도 해서 7일간 여유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 순간 이 스님은 평상시 쌓은 덕행이 있어 좌정하자 마자 온갖 상념을 놓아 버렸습니다. 절 관리도 신도들 법문도 일체를 다 놓아 버렸습니다. 3일만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지고, 어떤 것도 다 없어져 단지 한 덩이 빛만 남았습니다. 7일째 되는 날 저승사자가 찾아왔으나 한 덩이 빛만 보일 뿐 스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속았구나! 두 저승사자는 애원을 했습니다. 스님 자비를 베푸소서!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될 것 아닙니까? 우리 둘을 제도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둘은 지옥 감방에 갇힙니다. 스님은 입정에 들어 듣지도 못하고, 개이치도 않았습니다. 두 저승사자는 전전긍긍하다가 빛 속에 한 줄기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습니다. 저승사자는 알았습니다. 이 스님이 도를 완전히 깨치지 못했음 한 줄기 검은빛으로 알아 차렸습니다. 스님은 공덕이 컸기 때문에 황제가 국사로 초빙해 자마금(紫磨金)으로 만든 바리때와 금실로 짠 가사를 하사를 했는데 스님은 어떤 것에도 개이치 않았으나 자마금 바리때만은 너무 좋아해 좌선시에 손에 얻어 두었습니다. 온갖 인연을 다 놓았지만 바리때만은 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승사자는 이것을 알아챘습니다. 어떤 것도 다 없어졌지만 한 점 탐심(貪心)이 남아 있었습니다. 두 저승사자는 쥐로 변해 그 바리때를 사각사각 갉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의 마음이 움직였고, 일단 마음이 움직이자 빛이 없어지고 몸이 들어 났습니다. 그때 저승사자는 수갑을 채웠습니다. 스님은 자신이 깨닫지 못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저승사자가 경과를 설명해주자 바리때를 박살을 냈습니다. 그 순간 탐심이 사라지고 성불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듯 한점 티끌 같은 탐심을 제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 소승불교의 초과인 수다원과는 성인의 유에 들어갔다하는 것이니 마음이 해탈이 되고 조용하고 번뇌가 없어졌으니 성류에 들어선 것인데, 그렇지만 사실은 들어간 것이 없습니다(而無所入). 그러면 이게 또 무슨 뜻입니까. 들어갔으면 들어간 것이고 안 들어갔으면 안 들어간 것이지 들어갔는데 들어간 것 없다 그러니 말이 안 됩니다. 산보고 높다, 물보고 깊다, 이건 남자다 저건 여자다, 또 학교 가서 선생님 말 배우고 이론이나 지식 익혀서 참 그게 복잡했는데 인제 불교 정법을 듣고 나서 그걸 다 해탈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남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산을 보든 물을 보든 마음자리만 남았으니 인제 그자리 그대로 산 본 자리고 물 보든 생명 그대로이며 그 생명 그 마음자리 그게 어디 나가고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그 마음 그 대로 조용해진 것뿐이니 어디 들어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항상 주관 객관 이런 저런 관념으로 진리라는 게 저 하늘나라 높은데 저 고원 어디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객관적인 진리가 있는 걸로 알아 왔습니다. 그래서 이 약하고 얼마 안 되는 무능한 존재가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삽니다. 내가 그 동안 애가 타도록 벌써 여러 날 불법을 얘기해 줘도 항상 집에 갈 때는 무엇을 깨쳐 가지고 들어가는 그런 관념을 가집니다. 그러니 이런 관념을 떼는 게 불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본성이 아니고 항상 그대로입니다.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쉬어서 그것을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고 기어코 먹을 것도 아닌 걸 안 것입니다. 그래서 수보리존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수다원이 성인의 종류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들어간 데는 없사옵니다.(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라고 여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계, 곧 남자나 여자나 산하대지(山河大地) 어디에도 내 몸뚱이에도 이끌리지 않는 것이 성현의 마음입니다. 산보고 좋다 싫다는 생각 안 내는 것이 그것이 색(色)에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산보고 좋다 나쁘다 하든지 남녀간에 보고 좋다 궂다 하면 벌써 <색>의 현상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색(色)이라 함은 여색(女色)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세계에서 유명한 성악가가 왔는데 노래를 아주 잘 부르니 이 기회에 한번 들어보자 하더라도 들어 볼 생각 없습니다. 또 들어 봐도 좋다고 생각하면 좋고 돼지 목 따는 소리 같다고 생각하면 이것저것 다 내 버리어 번뇌가 아주 없는 수다원은 어떤 목소리를 들어도 아무 생각 없이 듣습니다. 법문하는 소리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하나도 안 들립니다. 그러므로 수다원 같은 성인은 소리 따라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不入聲).
또 좋은 향내가 난다 해도 향 한 대 더 피우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좋은 향내도 나쁘다고 생각하면 나쁜 것입니다. 좋고 나쁜 것은 나의 망상이지 듣기 싫어집니다. 돼지 목따는 소리도 「참 불쌍하구나. 죽느라고 저렇게 애를 쓰는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야, 저 놈 죽느라고 노래 한 곡 잘 뽑고 죽는구나.」하고 돼지의 마지막 노래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다 하면 좋고 나쁘다고 생각하면 나쁜 것이니, 목소리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마음속에 있는 향내와 향내를 맡을 줄 아는 주체인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향내는 냄새가 좋다는 관념이 있을 뿐입니다. 생각이 끊어져서 마음이 삼매에 들어 일념이 되면 똥을 코에 발라도 구린내가 안 나고 방안에 향내를 꽉 채워도 향기가 안 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냄새 같은 객관에 끄달리지 않습니다.(不入香).
「어느 식당에 가면 설렁탕 맛이 참 좋다는데 거기 가서 막걸리나 한잔 사 먹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안 합니다. 온갖 음식에 생각이 없습니다. 하루 밥 세끼 죽지 못해 먹는 것인데 하루 한끼 먹는 사람도 있는데 난 하루 두끼만 먹자. 이런 식으로 자꾸 육체생활을 줄여들어 갑니다. 그러면 「어디 술집이 새로 생겼는데 술맛이 좋다더라.」하는 유의 소리는 바람소리에 물소리처럼 지나갑니다. 몸뚱이도 세계도 꿈인데 꿈속에 들어가 무엇이 존재하겠는가. 그리고 어느 몸뚱이가 있어 마르고 축나겠느냐. 이렇게 닦아 들어가는 것이 불법입니다(不入味).
남녀간의 이성끼리 만나더라도 생각이 안정되지 않은 범부는 가슴이 설레고 번뇌가 일어나서 들끓습니다. 그러니 설사 이성을 만나더라도 저건 남자거니 여자거니 생각하지 말고 저건 하나의 껍데기다, 바지 껍데기고 육체의 껍데기, 그림자로 봐야 합니다. 똥주머니 . 오줌 . 피 . 코 . 가래의 주머니로 봐야 합니다. 번뇌를 여의고 마음만 오롯하게 드러난 성인의 경지에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육체에 대한 일체의 애착이 없어지고 온갖 사상 관념이 없어집니다.(不入觸).
유교의 교리는 어떻고 예수교의 가르침, 철학의 논리, 과학의 원리 이 모든 것을 불교에서 법(法)이라고 그럽니다. 모든 이론, 종교, 학문이 다 법이고 불법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모든 법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망상이 없으면 불법까지도 따로 지킬 것이 없습니다. 팔만대장경이 모두 다 망상이니 하지 말라는 소리인데, 자아를 완성하여 번뇌를 여의였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한 주인공이 되어 생사를 초월하고 의식주도 필요 없고 영원히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사람이 되고 나서야 남을 제도한다는 것도 말이 됩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고서야 오직 남을 위해서만 몸이 닳아 없어지도록 농사도 지어 주고 장사하는 집에 가서는 장사하는 일 거들어 주고 설렁탕집에 가면 설렁탕 나누어주고 하루 종일 남을 위해서 고된 줄도 모르고 봉사할 수 있고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객관세계에 끄달림 없이 번뇌 망상 다 초월해서 몸뚱이도 없고 생명에까지도 조금도 끄달려 들어가지 않는데 거기에 무슨 법이 필요하고 어떤 진리, 어떤 원리가 필요합니까. 이것을 색 . 성 . 향 . 미 . 촉 . 법(色聲香味觸法)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수다원은 그 마음이 무아가 되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망상이 끊어진 경계에 들어섰지만 그 깊이가 아직은 얕습니다. 마치 학교 교육에 비교해 말하자면 국민학교는 졸업했다는 정도에 해당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나한과의 三과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을 새기는데 있어서 잘못 새기면 「들어감이 없으므로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새기어 말을 두동강이를 만듭니다. 이것을 「자기 마음을 깨달은 것이고 어디 들어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이무소입(而無所入)이라 했고 그렇다고 해서 객관의 대천세계(大千世界)에 어디에 들어갔느냐 하면 거기도 들어간 것이 없다는 뜻으로 ‘불입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달으면 어디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니, 안으로나 밖으로나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씀입니다.
본문: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 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해석(解釋):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다함은 자신이 능히 사다함의 과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다함은 다시 한번만 태어나면 깨달음을 얻을 사람이지만 사실은 가고 옴이 없는 까닭에 사다함이라고 불리웁니다."
강설(講說):부처님께서 또 물으십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는 사다함이 자기 스스로 사다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할 것 같으냐 안 그러냐.?”하고 먼저와 같은 요령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에 수보리존자의 대답은, 역시 “아니옵니다. 부처님 사다함도 이름은「한번 왔다 가는 이」라 하지만 사실은 오고 간 것이 없어서 그래서 사다함이라 한 것이옵니다.”하고 사룁니다. 이것은 다 第七章에서 말한 무위법(無爲法)이어서 모두 다 하는 것 없이 하기 때문입니다.
이과(二果) 사다원(斯陀洹)에 이르면 한 번만 오면 됩니다. 즉 일환과(一還果)입니다. 사혹의 뿌리가 일부 뽑혀, 죽은 뒤 다시 한번 세상에 와서 모든 채무를 청산하면 됩니다.
이과 나한은 단지 한번만 인간으로 옵니다. 명의상으로 한 차례 다시 온다고 하지만, 오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이치일까요? 많은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 과거의 빚이 청산됩니다. 어떤 때는 입태(入胎)하여 태아 단계에서 유산됨으로써 끝납니다. 그 일생으로 빚을 다 갚은 것입니다. 부모와 좋은 인연으로 맺었다가 짧은 식간에 연(緣)을 끊습니다. 부모와 굴육의 정이라는 약간의 부채를 짊어지웠을 뿐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상심해 눈물을 흘림으로써 빚을 깨끗이 청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과 사다함(斯陀含)입니다.
요새 최면술하는 사람들이 자기최면(自己催眠)을 통해 아무 생각 없는 지경에 들어갑니다. 막연히 마음을 희미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 가운데 있는 잡념망상을 없애어 무아지경에 도달합니다. 이들은 최면에 들어선 때가 가장 기분 좋은 때라고 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세상의 사건이란 다 불안 공포들 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걸 모두 치워 버리고 마음만 가라앉히면 일시적으로 수다원과가 나타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최면에 들었을 때에만 최면력에 의해 나타난 세계이고 마음을 깨달아서 성위에 들어 간 것과는 물론 다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 번뇌 망상이 없는 수다원의 경지에 들어가서 산하대지가 다 없어진 이런 사람이 죽으면 천당에 태어나게 되는데 하늘 세상에 태어나서 보면 아직도 미세한 망상, 적은 잡념의 버릇이 조금씩 남아서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가 보입니다. 그런데 천당은 모든 게 뜻대로 되고 부족한 것이 없이 만족하고 너무 편하고 즐거워서 공부가 안 됩니다. 마치 부자집 자녀들이 돈 쓰느라고 공부 못하듯이 자기의 선정(禪定) . 삼매(三昧)의 힘으로는 하늘 나라의 즐거움을 이겨가며 고도의 수행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인간 세상에 다시 내려가서 수도를 더 해야겠다고 결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어느 집에 태어나야 불도를 만날 수 있으며 어려서부터 출가를 해서 수도를 마치고 또다시 하늘 나라에 올라올 수 있을까를 살핍니다. 그리하여 늙도록 아들이 없는 집, 그리고 불교하는 집에 태어나서 일곱 여덟살만 되면 절에 데리고 가서 일찍 중이 되도록 하는 그런 부모를 선택합니다. 늙은 부모 자기는 불도수행을 못 했지만 아들이라도 부처님께 바쳐서 큰복을 짓자는 불심으로 그렇게 합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있는 나라, 불심이 있는 집안에 태어나서 한 평생 공부를 더 하면 나머지 번뇌 망상이 더욱 없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한번 더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천당에 다시 가더라도 그때는 미세한 번뇌마저도 끊어지기 때문에 천상락(天上樂)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선정을 닦을 수 있으므로 이것을 일왕래(一王來) 한번 또 왔다 간다고 하고 사다함(斯陀含)이라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 세상에 한번 더 왔다 가기 때문에 일왕래(一王來)라고 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왔다갔다하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 마음에 번뇌 망상이 있음으로써 오고가는 흔적이 나타나는 것이지, 몸뚱이도 세계도 없어진 경계에서 정신 하나만 오로지 깨어 있을 때는 무한대의 우주가 그대로 다 내 마음뿐이어서, 이 세상에 왔다 간다 하지만 내 본 마음에서 보면 오고 간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그대로 하나일 따름입니다. 다만 육체가 온 것이고 생각이 간 것입니다. 육체와 생각을 이미 초월하여 마음의 본 바탕을 찾은 나에게는 오고 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세상 한번 왔다 가는 것도 이름만 왔다 가는 것이지 마음자리 자체는 왕래를 하지 않은 것이며, 육체가 그런 것이고 생각이 그런 것이지 우주 전체가 그대로 마음인 입장에서는 왕래할 수가 없는 하나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사다함은 왕래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왕래하지 않은 것이고 우리 마음 그게 곧 사다함인 것입니다.
본문: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世尊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名阿那含
해석(解釋):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나함은 자신이 능히 아나함의 과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나함은 결코 다시 태어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에 아나함이라고 불리웁니다."
강설(講說):삼과(三果) 아나함(阿那含)을 불환과(不還果)라 합니다. 다시 인간 세상에 오지 않고 직접 천상으로부터 사과(四果)를 증득하여 열반에 듭니다.
아나함(阿那含)은 ‘오지 않는다’는 뜻이니 편안해도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정도가 된 셋째의 성위(聖位)입니다. 인간 세상에 다시 안 오고 천당에서 그대로 천당의 향락을 돌아보지도 않고 선방처럼 공부할 수 있는 삼학년생입니다. 자기의 참선하는 정진력(精進力)이 용맹스럽고 아무 생각 없는 정력(定力)이 깊고 견고해져서 주위의 향락에 조금도 끄달리지 않고 선정(禪定)을 닦을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수다원과’를 증득하면 비로소 성인의 유에 들은 것인데, 이 성과(聖果)의 일학년인 수다원과에 들어간 뒤 이학년인 ‘사다함과’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수행을 해야 하고 삼학년인 ‘아나함과’에 오르기까지는 얼마나 수행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칠래과’(七來果), ‘一來果’(일래과) , ‘불래과’(不來果)라고 이름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닦은 복력(福力)으로 말하면 국왕, 대신이 되고 부귀할 복력이 있지만 일부러 어려서 출가하기 좋도록 조실부모할 집에 태어나서 일찍 출가해서 평생 정진만 합니다. 이렇게 한평생 수도만 하다가 또 죽어서 천당에 가 보면 이 세상 잠재의식이 움직이고 있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세상에 내려왔다가 또 올라갔다 하기를 일곱번이나 하는 동안이 제일과인 ‘수다원과’(須陀洹果)이므로 칠래과(七來果)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일곱번 왕래를 한 다음에는 사다함에 들어섭니다. 그래서 사다함과에서 한번 더 왕래하는 것을 합하면 모두 팔왕래(八往來)가 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왕래하면서도 왕래가 아닙니다. 천당에 갔을 때나 인간 세상에 올 때나 변하지 않는 자리가 있어서 우리의 마음자리, 성품자리가 그런 꿈을 꾸고 꿈이 깨면 생시인 것처럼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도 생각이 저 혼자 갔다 오고 업이 독자적인 생명이 있어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라, 내내 우리 마음이 오고가고 하는 것인데 이 마음의 본체는 오고 가는 것이 없으며 변하지 않는 자립니다. 거리 내외가 없어서 마치 나와 몸뚱이가 둘이 아니어서 다리도 손도 배도 등도 다 나이고 몸뚱이 부분이나 전체의 구별이 없이 그것이 다 나인 것과 한가지로 온 우주가 ‘나’이며 전체가 나인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나함’이 천상에서 정진만 하고 세상에 내려가지 않지만 그러나 실로는 안 간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항상 마음이 우주에 꽉 차서 가고 안 가고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로는 가지 않는 것도 없다(實無不來)고 한 것입니다.
본문: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世尊 若阿羅漢作是念 我得阿羅漢道 卽位着 我人衆生壽者
해석(解釋):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라한은 자신이 능히 아라한의 과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로 법이 없기 때문에 아라한이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그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강설(講說):절에 가면 지금도 나한(羅漢)님, 오백 나한이 있는데 아라한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법을 얻었으면서도 일부러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무유법(實無有法)입니다. 다시 말하면「어떠한 내용이 있어서 이것이 ‘아라한’이다.」할 수 있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큰 일입니다. 실로는 나한이 됐다 해도 ‘아라한’이라 지목할 수 있는 그런 이치가 없으니 이 대목 참 어렵습니다. 이 대목이 사학년 졸업반의 마지막 문턱입니다. 나한님들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내가 사학년생입니다.」이런 생각을 하면 즉위착아인중생수자상(卽爲着我人衆生壽者相)이 꽉 남아 있는 사람이어서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느니 하고 중생살이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살림살이 장만하는 게 중생상(衆生相)이고 오래 살려니, 칠십, 팔십 살려 하는 그것이 수자상(壽者相)입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공부도 안 하고 나중에 애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늙어빠진 뒤 할 일 없을 때에야 염불, 참선하려 하지만 그 땐 이미 힘이 다 빠져서 참선해도 안 되고 염불해도 안됩니다. 참선이나 염불은 젊어서 미성년 때 하는 게 훨씬 좋은 건데 내가 오래 살겠거니 믿고서 할 일 다 하고 늙은 뒤에나 천천히 해 보려는 것도 ‘수자상’의 그릇된 생각입니다. 아라한이 만일 어떤 법이 있어서 그 이치를 깨달아 얻은 것이 ‘아라한’이라면, ‘아라한’은 곧 내가 얻은 것이니 얻어진 법이 있고 얻은 내가 있게 되며, 법은 객관이고 나는 주관이 됩니다. 이렇게 하여 주관인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하면 그건 주관 객관이 벌어져서 상대가 안 떨어지고 절대지경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니, 아상․인상․ 중생상․수자상이 벌어져서 결국은 중생을 완전히 여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본문: 世尊 佛說 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世尊 卽不說須菩提 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
해석(解釋):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가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여윈 아라한 가운데 으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는 생각까지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제가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즐기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보리는 실로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아란나행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강설(講說):부처님께서 “수보리는 무쟁삼매를 얻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쟁삼매를 얻으면 남이 무슨 말을 해도 대꾸를 안 합니다. 예쁘다 해도 아무 소리 안 하고 밉다 해도 아무 소리 안 하고 뭘 줘도 아무 생각 없고 빼앗겨도 아무 생각 안 합니다. 항상 남과 다투지 않아서 무슨 소리를 해도 다른 데 가서 그 소리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미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습니다. 옳고 그름이 하나로서 일체 다툼이 없습니다. 또 누가 법문을 해도 「아 법문 잘한다.」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만일 옳다 그르다 하면 그것도 시비가 있는 것이고 번뇌가 있는 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일체 중생과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삼매를 얻은 것이 나한이고 나한이 되면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인데 도대체 마음을 탁 놓아 버리어 자기의 모든 번뇌를 쉬고 나면 현실 세계 이게 모두 공인 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제 사학년의 아라한과를 얻은 것을 ‘무쟁삼매’(無諍三昧)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수보리에게 「일체 사람과 시비를 안 하고 항상 마음이 편하고 그런 무쟁삼매에 들어서 일체의 다툼을 안 하는 그런 인간이 됐다. 수보리는 특히 모든 나한 가운데 오백나한 가운데 가장 제일이다. 수보리 이 사람은 제일 욕심을 멀리 했다. 그 에게는 아무 사건이 없다. 그래서 남과 시비를 안 하는 ‘아라한’가운데도 특등 ‘아라한’이 됐다.」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보리는 ‘나는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다. 이런 생각은 안 합니다. 만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선 곧 「수보리가 그 마음이 고요한 나한도의 다툼 없는 나한 중 나한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실제로 제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니 제일 아라한이 될 수도 있고 진짜 나한이 될 수도 있지만 나에게 ‘아라한’을 증득했다는 생각이 조금만이라도 있으면 부처님께서는 제가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즐긴다고 하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하셨습니다. 아란나행(阿蘭那行)이란 다툼 없고 욕심을 여읜 무쟁삼매(無諍三昧)의 행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수보리는 ‘실무소행’(實無所行) 실제로 마음 닦은 게 실천한 게 아무 것도 없고 수행이 다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이란 무학(無學)이라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지위에 올라선 것입니다. 이제 사학년이 되어 어려울 게 없는데 실제는 아무 수행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없는 그런 무위법(無爲法)의 행을‘아란나행’을 좋아한다고 한 것입니다.
유마경에 천녀(天女)가 꽃을 뿌리는 광경을 묘사합니다. 천녀가 꽃을 뿌리자 대아라한의 몸에 떨어진 꽃은 들러붙어지만 대보살의 몸에 떨어진 꽃은 들러붙지 못하고 떨어집니다. 유마거사는 말합니다. 일체의 대아라한은 88결사를 끊었지만 아직 습관의 잔재까지 끊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보통사람은 오죽하랴. 사람중 제일은 도덕과 수양이 모두 뛰어난 사람입니다. 다음에 아라한중 제일은 욕계를 벗어난 것이다. 이것이 이욕아라한(離慾阿羅漢)이다.
좀도둑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어떤 좀도둑이 있었는데, 실력이 아주 뛰어났습니다. 자식이 성장하자 아버지에게 의발(衣鉢)을 전수해달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성화에 못 이겨 오늘 밤 나하고 같이 도둑질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몰래 한집에 들어가 방안에 있는 보물이 들어있는 큰 궤짝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아버지는 자물쇠를 열더니 아들한테 물건을 꺼내오라고 궤짝 안으로 시킨 후 아들이 궤짝 안으로 들어가자 자물쇠로 잠가버리고 큰 소리로 “도둑이야”하고 외치고 도망을 쳤습니다. 집안 사람들이 도둑이야 하는 고함 소리에 놀라 등불을 켜고 사방을 살폈습니다. 어떤 여자 아니가 촛불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오자 궤짝안에 있는 아들은 다급해지자 꾀를 내어 찍! 찍! 찍!하고 쥐들이 싸우는 소리를 계속 내었습니다. 여자아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님 야단났어요! 도둑은 보이지 않는데 궤짝 안에 쥐들이 둥지를 튼 모양입니다. 그러고는 자물쇠를 열었습니다. 그 순간 좀 도둑 아들은 재빨리 한숨에 촛불을 불어 끄고 도망을 쳤습니다. 집으로 달려와 보니 아버지는 드러누워 코를 골고 자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흔들어 깨워, 어떻게 자식을 해치려 했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무슨 얘기를 하느냐? 너 나오지 않았느냐? 성공했으니 이제 의발을 전수하마! 하셨답니다. 도둑질에는 정해진 법도가 없으니 붙잡히지 않고 도망쳐 오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불하는데는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 아무것이나 어느 한가지를 닦으면서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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