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금강경(金剛經) 강의(17) - 15. 持經功德分

難勝 2008. 7. 11. 05:34

                        금강경(金剛經) 강의(17)


15. 持經功德分 (경을 가지는 공덕)


본문:須菩堤 若有善男子善女人初日分以恒河沙等身布施 中日分 復以恒河沙等身布施如是無量百千萬億劫 以身布施若復有人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勝彼 何況書寫受持讀誦 爲人解說 須菩堤,以要言之 是經有不可思議 不可稱量 無邊功德,如來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若有人 能受持讀誦 廣爲 人說 如來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 成就不可量 不可稱 無有邊 不可思議 功德.如是人等 卽爲荷擔如來 阿?多羅三必三菩提,何以故 須菩堤,若樂小法者 著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卽於此經 不能聽受讀誦 爲人解說. 須菩堤,在在 處處 若有此經 一切世間 天人阿修羅 所應供養 當知此處 卽爲是塔 皆應恭敬 作禮圍繞 以諸華香 而散其處.


해석:“수보리야,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 모래와 같이 많은 몸으로 보시하고 한낮에 또 항하 모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저녁 때에 또한 항하 모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백천만억겁을 몸으로 보시하더라도,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신심으로 거슬리지 아니했다면 그 복이 저보다 뛰어나리라.  하물며 이 경을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고 남을 위해 해설해 줌이겠느냐.

  수보리야, 요긴하게 말하면 이 경이 가히 생각할 수 없고 가히 헤아릴 수 없는 한없는 공덕이 있나니, 여래가 대승을 일으킨 이를 위하여 설명한 것이요, 최상승을 일으킨 이를 위하여 설명한 것이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능히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 일러 주면 여래가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시는 바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끝이 없으며 가히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공덕을 다 얻어 성취하리니, 이러한 사람들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이 되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소승의 법을 좋아하는 이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여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읽고 외운다든지 남을 위해 해설하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어느 곳에 있더라도 이 경만 있으면, 일체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까지 마땅히 공양하리니, 바로 이 경이 있는 곳이 부처님의 탑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모두가 당연히 공경하여 예배하고, 많은 꽃과 향으로 그 곳을 장엄하느니라.”


강설(講說):<지경공덕분>은 말 그대로 경을 지니는 공덕을 밝혀 놓은 대목입니다. 경의 공덕의 수승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유루복有漏福에 해당하는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몸을 보시하는 이야기를 먼저 합니다. 아침, 점심, 저녁나절로 한량없는 백 천만 겁 동안을 보시하여도 이를 통해 얻는 복덕보다 경을 듣고 믿는 마음으로 거스리지 않는 복덕이 많다는 것입니다.

경의 말씀을 믿고 그것을 진실로 여겨 받아들이게 되면 경이 가지고 있는 공덕을 스스로 성취하게 됨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경이 가지고 있는 공덕이 실로 어마어마하여 말이나 생각으로 미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대승의 마음과 가장 높은 마음을 낸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경은 관념에 응고된 생각의 고집을 타파하는 공空의 이치를 설하는 법문이므로 세상의 일반적 상식의 차원에서 쉽게 알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相에 붙들린 알음알이, 곧 망상적 분별경계에서는 이 경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경은 읽어서 무슨 말이다 이해하는 지식의 대상인 책이 아니라 깨달음의 본체로 부처님을 직접 만나는 법신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을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하였습니다. 또 경이 있는 곳을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이 있는 곳과 같다고 하여 공양의 대상이며 예배의 대상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경의 소중함이 부처님과 같은 동격임을 밝혀 경을 통해 부처님을 만나는 불법의 중대성을 이야기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初日分 以恒河沙等身 布施 中日分 復以恒河沙等身 布施 後日分 亦以恒河沙等身 布施 如是無量百千萬億劫 以身布施

강설(講說): 그때 수보리가 이 경 말씀하신는 것을 들어 그 뜻을 깊이 알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수보리야, 만일 착한 남자, 여인이 있어서 초일분(初日分)에 항하사의 몸으로 보시한다면』하셨는데, 초일분이라는 건 오전입니다. 아침결 한 열시 전입니다. 초일분에 항하사 모래수와 같은 몸뚱이로서 보시를 한다는 것은 우리 경계로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몸뚱이가 하나뿐이고 몸뚱이 하나도 어려운데 한나절 동안에 무슨 항하사 모래와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남을 위해 보시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중일분(中日分)이란 점심 한 때를 말하고 또 후일분은 오후 해질 때를 말합니다. 아침결에 보시했으면 점심때나 저녁때는 보시할 몸뚱이도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들 중생의 경계에서는 말이 안 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통(神通)이 있고 공부가 장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이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그런 분신(分身)으로 나타낼 수 있는 분들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이런 신통이 있는 선남자 선여인이 한량없는 몸을 나투어서 중생들을 위해 보시를 해 주는데 아들도 되고 딸도 되고 영감도 되고 아내도 되고 음식도 되고 눈도 빼 주고 코도 떼 주고 손도 잘라 주는 이런 보시를 말합니다. 그래도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거니까 그런 경지가 되면 활동사진에 사람이 노는 것처럼 변화신(變化身)으로 하게 됩니다. 온갖 중생을 위해서 관세음보살 삼십이응신(觀世音菩薩三十二應身)을 나투어 아들도 되고 딸도 되고 국왕도 되고 하늘의 제석천(帝釋天)이 되고 무엇이든지 안 되는 게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항하사 수의 많은 몸뚱이로 온갖 궁색한 중생을 다 맞춰 주는데 거지가 혼자 얻어먹기 어려우면 한 수백명 거지가 되어서 같이 동무가 되어 주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을 아침에 열시쯤에 그렇게 하고 한나절 한시 두시에 또 항하사 수 한량없는 몸으로 보시하고 저녁 때 오후 세시쯤부터 해가 지도록 항하사 수의 몸뚱이를 또 보시해서 이렇게 하기를 한겁 두겁도 아니고 무량백천만억겁을 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복이 한량없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흔히 겁(劫)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사회에서 많이 쓰는 영겁이란 말도 불교의 겁이란 말에서 온 것입니다. 겁이라는 소리는 그것도 하루다 한 달이다 한 해다 하는 시간 단위입니다.

  그리고 겁에도 대겁(大劫), 중겁(中劫), 소겁(小劫)이 있는데 대겁은 지구가 한 번 이뤄졌다가 무너져 없어지는 시간을 말하는 시간이므로 굉장히 긴 시간을 뜻합니다. 대겁은 4중겁이고 80소겁이 됩니다.  그러니 무량 백천만겁이라고 하는 것은 한량없는 세월이 됩니다.


본문: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勝彼 何況書寫受 持讀誦 爲人解說

강설(講說):그런데 다시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서 「아, 그럴 수 있겠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진리가 확실히 있겠다. 그래서 우리는 필경 생사를 면하고 해탈하여 참 자유한 인간이 한 번 되겠구나.」하여 이 금강경을 듣고서 마음에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면, 곧 완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어서 확실한 신심만 낸다고 하더라도 그 복이 아까 무량백천만겁으로 하루에 항하사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 중생을 위해서 보시한 복 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 경전을 쓰기도 하고 또 요새 말로 하면 인쇄도 해서 여러 사람에게 보시하고 번역하고 강의도 하는 경불사(經佛事)도 하고 한다면, 요전에도 어떤 여신도(女信徒) 한 분이 자기 환갑(還甲)에 유마경(維摩經)을 번역만 해 놓고 출판하지 못했던 것을 큰돈을 들여서 천 부를 출판해 가지고 각계 각 학교 도서관에 전부 돌리고 선남, 선녀와 불교 안 믿는 사람까지 보시를 했는데 이것도 정말 큰복입니다. 경을 전부 다 쓰면 말할 것도 없지만 손으로 써 보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4구게 한 줄이라도 다 쓰면 좋고 더욱 더 해서 손가락에 잘라 흘린 피를 가지고 다 쓰고 짜고 짜다 피가 안나오면 다른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또 짜 가지고 법화경 일곱권을 쓰고 화엄경 팔십 권도 씁니다.

  이렇게 금강경이나 대승 법문을 듣고 마음에 거슬리지 않으면 총명해서 그랬던지 신심이 지극해서 그랬던지 그 복이 아까 그렇게 한량없이 많은 몸뚱이로 보시해서 지은 복보다도 더 많다고 했는데 하물며 수지독송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법회산림(法會山林)을 하고 강의(講義)도 하고 경전 간행도 해서 얻어지는 복이야 더군다나 말할 게 있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須菩提 以要言之 是經 有不可思議 不可稱量 無邊功德 如來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강설(講說): 부처님께서 결론으로 『수보리야, 대강 요긴한 것만 간략히 말한다면 이 경의 공덕이 가히 생각도 못하고 얘기할 수도 없고 이름할 수도 없는 불가사의 불가칭량한 공덕이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금강경을 뜻도 모르고 자꾸 읽어도 그런 공덕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 경 자체가 우주 인생의 근원이 여실히 표시된 문서이기 때문이니 구공, 아공, 법공(俱空 我空 法空)의 진리를 가지고 있어서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지만 이러한 인생의 근본면목, 우주의 본체, 참된 실상(實相)을 다른 곳의 어느 경에서도 들어 볼 수 없는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경이 검은 것은 먹이고 흰 것은 종이지만은 이것이 또 그런 큰 공덕이 들어 있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이 경전이 그런 불가사의 불가칭량 무변공덕이 있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대승심(大乘心)을 일으키는 이」,「큰마음을 깨치고 온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이」를 위해서 또는 「대승심을 일으킬 수 있는 이」를 위해서 설명하신 것이고 성불하신 뒤 40년만인 이제야 처음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승심(大乘心)이란 제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 설명한 것처럼 일체 중생을 모두 다 내가 제도하지만 제도했다는 마음 없이 하는 보살행을 말합니다.


본문:  若有人 能受持讀誦 廣爲人說 如來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 無有邊 不可思議功德 如是人等 卽爲荷擔如來 阿耨多羅三藐三菩提

강설(講說): 만일 어떤 사람이 이미 이 경전을 수지독송도 하고 자기가 받아 지니고 외우기까지 할 뿐 아니라 또 남을 위해서 좋은 법사가 될 수 있도록 금강경을 잘 알고 공부를 잘 해서 남에게 널리 설명해 주면 그리고 견성까지 하면 더욱 좋고 그러면 여래께서는 이 사람이 다 불가량 불가칭 무유변하여 가장자리가 없이 무한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을 성취하는 것을 다 아시고 다 그렇게 되는 것까지도 가만히 보시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책임질 수 있어서 중생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일체의 도사가 될 수 있으니,「이 경을 듣고 배워서 받아 가지고 이 금강경의 진리에 의지하여 꼭 그와 같이 하겠다고 마음 속에서 진심으로 감동하여야 하겠습니다.」하고 마음으로 받아 지니는 것을 수지(受持)라고 합니다. 또 수지 하면서 읽고 외는 데 하루에도 백독 천독을 하고 그저 잠 안 자고 자꾸 외고 합니다. 그렇게 한 번 읽어 다르고 두 번 읽어 다르고 자꾸 염념(念念)히 달라져서 깊이 들어갑니다. 또 한 번 두 번 설명을 듣고 나면 자꾸 그 때마다 희유함을 느끼게 되고 몰랐던 것이 알아지고 마음의 골수에 박히고 몸뚱이 이대로가 금강경이 되어 피와 살이 되고 뼈가 되는 것입니다.

  전에 법화경 읽는 어떤 스님이 밤에 경을 외우면 불이 꺼져도 방이 환히 밝아서 대중이 다 불을 안 키고 경을 보게 되고 한 이런 법사들이 있습니다. 견성은 못한 법사지만 그런 이가 있어서 평생 삼매에 들어서 금강경 또는 법화경이나 화엄경 읽는다고 하면 딴 잡념이라는 건 없어집니다. 그저 불보살님들이 모두 수행하시고 중생제도하시는 걸 보니 모든 잡념이 없어지고 법열(法悅)이 생겨서 중생들이 영화 보는 것보다 더 재미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서면 그렇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 뜻을 잘 알아 가지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준다면 이 사람은 마침내 구경(究竟)의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을 부처님께서 다 아시고 다 보시게 됩니다. 그것은 이런 사람은 곧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기특하게 여기시고 갸륵하게 보십니다. 부처님의 법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보살의 행을 하는 이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何以故 須菩提 若樂所法者 着我見人見 衆生見 壽者見 卽於此經 不能聽受讀誦 爲人解說

강설(講說): 부처님께서 다음에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만일 저 소승아함경(小乘阿含經)을 배워서 소승불교(小乘佛敎)만 배우고 거기에 마음이 만족해 있는 나한이 되었다고 하면 비유컨대 어디 요양 와서 좀 편히 쉰다고 해서 잠만 자는 것과 같은데 오히려 정신을 차리고 앉아 있으면 그것이 훨씬 건강에 좋은 효과도 가져오게 되는 것이고 또 아무리 일을 하고 종일 지껄이고 종일 노동하고 돌아다니고 종일 무슨 회담(會談)을 하고 아주 어렵고 까다로운 회의에서 까딱 한마디만 잘 못하면 나라가 망하고 전쟁이 일어날 회담을 하는 가운데도 보통 사람 같으면 여러 달을 연구해서야 대답할 수 있는 어려운 것도 번쩍번쩍 한두 마디 건너면서 다 따져 알고 말 한마디 실수 안 하도록 하여 정신 노동이 굉장한 일을 하더라도 무심한 가운데서 하면 피로한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소승불교만 배워 놓은 사람은 홀가분하니 굉장히 좋은 것 같지만 길게 이렇게 하다보면 결국 아견(我見)도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현상계는 무상한 거고 생사세계에서 성주괴공(成住壞空),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나한열반(羅漢涅槃)에 앉아 있는 것이라 하여 그걸 한없이 좋아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상대적인 열반이고 미세한 주관 . 객관 그런 것이 저도 모르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관은 아상(我相)이고 아견(我見)이며 그러니까 자기가 증득한 내용을 객관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러니 중생견, 수자견이 일어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 금강경 경전을 설명해 주면 일체 중생이 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이게 중생이고, 또 일체 불법이 불법이 아니니 그래서 그게 불법이라는 소리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소승불교의 논리로 모든 것을 보고 이런 말을 들으면 논리에 안 맞는 말이라 하여 이해가 안 됩니다.  있는 게 없는 거고 없는 게 있는 거고 이러니까 이걸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런 법문을 청수(聽受)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더군다나 감당도 못하고 독송도 안 합니다.  그러므로 남한테 해설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어하고 보기부터 싫어하고 그런 건 불법이 아니라고 비방만 합니다. 요새 유물본위의 사상을 배운 남녀 청년들이나 노인들이 예비강의(豫備講義) 일 주일을 거쳐서 들으시니까 어느 정도 이해하는데 힘이 덜 듭니다. 그래도 지금 상권만 설명하는데 이십일(첫번법회) 걸렸는데 만일 이런 강의를 듣지 못하고 처음으로 금강경을 구해 본다면 그 말이 희안하고 군데군데 보면 무주상으로 보시하라는 내용이 있으니, 그러면 이것은「상에 머무름 없이 주라는 말인가.」이렇게 저렇게 생각대로 새기면서 좋다고 보기는 볼 겁니다. 그렇지만 바른 뜻은 모릅니다. 구공(俱空)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 그런 문장은 나오지도 않았으니 더구나 모를 것이고 「아라한이 아라한이라는 생각이 없다.」 이런 정도의 말도 알 수가 없는 소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수보리야, 만일 적은 법을 좋아하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해서 이 경을 들어서 받아 지니지 못하고 독송하지 못하며 남을 위해 해설할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須菩提 在在處處 若有此經 一切世間 天人阿修羅 所應供養 當知此處 卽爲是塔 皆應供養 作禮圍繞 以諸華香 而山其處

강설(講說):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수보리야, 이 경전을 모셔 놓은 데가 있으면 재재처처(在在處處)에 금강경의 문자가 있는 곳마다 일체 세간의 천당 사람이나 인간 사람이나 아수라인등 세계에 사는 중생들이 마땅히 공양을 올려서 지극히 존경하고 꽃이나 향을 갖다가 사루고 뿌리어 공양하느니라.』 또 의복 음식까지 갖다 놔라 한다고 법화경 같은 데선 그렇게 말합니다. 그건 아주 마지막 존경입니다.  이 금강경에서는 소위 형식적, 의식적인 불교는 잘 안나옵니다. 근본 발심만 얘기하는데 이걸 지나서 법화경에 가면 쌀도 갖다 놔라. 돈도 갖다 놔라. 절도 지어라. 이런 소리가 나옵니다. 그게 모두 금강경 사상 지나간 사람들이 법화경 사상을 알아 놓으니까 어쨌든지 모두 신심으로 하는 행동이므로 복이 되고 공덕이 됩니다. 일체 행동이 요새 불공한다고 떡과 밥을 갖다 놓는데 그게 모두 복이 됩니다. 다만 이런 도리를 모르고 하는 것은 미신에 가깝지만 그래도 인연이 되는 정도의 복이 되지 죄는 안 될 것입니다.  아무리 등상불(等像佛)에게 했다 하더라도 또 등상불이 부처님 모셔 놓은 것이지 등상불이 따로 있습니까.  전혀 헛일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같은 값이면 금강경을 알고 법화경을 들어서 그 뜻을 어느 정도 십분의 일이라도 좀 짐작을 하고 불공을 하면 여러 천만 억배의 공덕이 생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마땅히 알아라, 이 금강경을 모신 곳은 이것이 곧 부처님 사리를 모신 곳이고 부처님 정신을 모신 탑이라는 것이니, 그래서 꽃을 공양하고 향을 사루고 예경하고 주위를 돌면서 공경하리라.』하신 것입니다.

  사리를 정골(精骨)이라 그러는데 십계, 이백오십계를 잘 지키고 참선 정진 잘해서 정신이 모인 결정(結晶)이라 그 말입니다. 몸뚱이 속에서 정신이 모여 생긴 것이 사리이므로 부처님의 사리는 부처님의 몸에서 부처님의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을 모신 부처님의 사리는 부처님의 몸에서 부처님의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을 모신 부처님 탑은 부처님 모신 것이고 부처님 법신을 모신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사리탑인데 이 경전을 모신 곳도 법당에다 모셨든지 그 누가 자기 집 어디 깨끗한 곳에 모셨든지 일본 사람들처럼 부처님 모셔 놓듯이 경전 모시는 곳을 따로 만들어 가지고 경전을 모셔 놓든지 하면 곧 부처님 탑을 모신 거와 한가지입니다. 그 곳에 향도 올리고 꽃도 올리고 절하고 정례(頂禮)도 하고 금강경을 모시고 탑을 쌓고 그걸 돌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절에 가면 신도들이 탑 주위를 돌아가면서 예경하며 좋은 꽃이라는 꽃은 다 갖다 올리고 좋은 향 사다 올리고 이래서 그 근방에 뿌리기도 하는데 그게 불공이라는 겁니다.

  태국은 음식은 물론 과일도 안 놓고 꽃과 향과 촛불의 세 가지 밖에 안 놓습니다. 물도 여기처럼 다기(茶器)에 안 떠놓습니다. 산에 있는 산 꽃을 많이 올리고는, 우리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전부 탑이나 법당에 들어가니까 향내가 진동을 했고 향 사르고 그저 생화를 갖다 전부 장엄했는데 우리가 떡과 곶감 대추 갖다 놓는 것 보다 신성하고 좋습니다.

끝으로 다시 한번 본문 해석을 보면서 마칩니다. 수보리야! 어느 곳에 있더라도 이 경만 있으면, 일체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까지 마땅히 공양하리니, 바로 이 경이 있는 곳이 부처님의 탑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모두가 당연히 공경하여 예배하고, 많은 꽃과 향으로 그 곳을 장엄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