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허공이 곧 법신

難勝 2009. 1. 6. 04:14

허공이 곧 법신


팔만 사천 법문은 팔만사천 번뇌를 치료하는 것으로서, 다만
대중을 교화 인도하는 방편일 뿐 일체 법이란 본래 없다.

그러므로 여의는 것이 곧 법이요, 여의줄 아는 이가 곧 부처
이다.
일체 법을 여의기만 하면 얻을 만한 법이 없으니, 도를 배우
는 사람이 깨닫는 비결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마음에 어느
것이라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의 참된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 비유가 바로
이것이다.

법신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인데도 '법신이 허공계에
두루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허공 가운데에 법신을 포함
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법신 그대로가 허공이며 허공 그대로가
법신임을 모른다.

만약 결정코 허공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은 허공이 아니다.
그렇다고 결정코 법신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이 허공이 아니다.

다만 허공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허공이 곧 법신이니라.
법신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법신이 곧 허공이니라.

허공과 법신은 전혀 다른 모양이 없으며, 번뇌와 보리도 다른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일체의 모양을 여윔이 곧 부처이니라.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을 취하나니,마음
과 경계를 함께 잊어야만 참된 법이다.
경계를 잊기는 오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기는 매우 어렵다.

사람들이 마음을 감히 잊어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져 부여 잡을 바가 없을까 두려워해서인데, 이는 공이
본래 공이랄 것도 없고, 오로지 한결 같은 참된 법계
[一眞法界]임을 몰라서 그런 갈 견해이니, 밖으로 경계를
좇으면서 그것을 마음이라고 잘못 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도둑을 제자식으로 잘못 아는 격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계.정.혜를 세워 말씀하신
것인데, 애초부터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인들 어디 있겠느냐?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일체법을 말씀
하신 것은 일체의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로다.

나에게 일체의 마음이 없거니 일체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셨다. 본래 근원이 청정한 부처에다가는 다시 어떤 것도 덧붙
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허공이 수많은 보배구슬로 장엄할지라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성(佛性)도 허공과 같아서 비록 무량한 공덕과 지혜로써
장엄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본래 성품이 미혹되어 더더욱 보지 못할 뿐이다.

이른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만법이 이 마음을 의지하여
건립되었으므로, 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끗한 성품 위에다가 경계에 대한 알음알이를 굳이 짓
지 말라.

또 '정혜(定慧)의 비추는 작용이 역력히 밝고 고요하면서도
또렷하다[寂寂惺惺]'든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見聞覺知]'
는 것은 모든 경계 위에서 알음알이를 짓는 것이니, 이 말은
임시로 중하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몸소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이것은 모두 경계의 법이므로 유견(有見)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일체 법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짓지만 않으면,
곧 법을 보는 것이다.


- 전심법요(傳心法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