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삼법인(三法印)

難勝 2009. 3. 11. 04:54

   1) 삼법인(三法印)


   우주만유를 관통하는 법칙이 연기라면 존재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 삼

법인이다. 삼법인(三法印)은 불교의 근본 교의(敎義)를 셋으로 표시한 것이

다. 다시 말하면 삼법인은 불교의 요지를 세 가지의 근본 법칙으로 정리하

여 하나의 표지로써 표장(標章), 인신(印信)이라는 뜻의 인()을 붙여 일정

불변하는 진리임을 나타내고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이 셋을

삼법인이라 한다. 불교가 가르치는 진리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색()은 무상(無常)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고, 괴로운 것은 무아(

)이다. 수()상()행()식() 또한 그와 같다’      잡아함경 권1


   ‘무상’, ‘고()’, ‘무아’ 이것은 일체의 속성에 대한 불교의 세 가지 명제

(命題)이다. 법(, 일체 삼라만상)의 특성이라 하여 법성(法性)이라 한다.

또한 이것으로 법의 진실 여부를 가리는 판단 기준이 된다고 해서 법인(

)이라 한다. 법은 법리(法理)라는 뜻이고, 인()은 인증(印證)의 의미로

‘결정코 확실히 그러하여 다시 변경할 수 없는 이법(理法)’이라는 뜻이다.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입장이기 때문에 후대

에는 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삼법인 중에는 ‘일체의 괴로움[一切皆苦]’이라는 항목을 빼고, ‘열반은

고요함[涅槃寂靜]’이라는 항목을 더하여 삼법인으로 할 때도 있다 증일아

함경 권10 .


   또는 여기에 ‘일체의 괴로움’이라는 것을 다시 합하여 사법인(四法印)으

로 할 때도 있다 증일아함경 권18 .


   이 삼법인은 불교의 기본적인 강령(綱領)으로 부처님의 깨달음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서 단 한

순간의 머무름도 없이 변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제행, 곧 생멸(生滅)변화하

는 모든 현상은 정신이나 물질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변화한다는 원리이

다. 어느것 하나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영원 불변하는 진리이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언젠가

는 헤어져야 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라도 마침내는 죽는다는 진

리이다. 모든 현상계의 사물은 그 어느 하나도 시간적인 면에서 볼 때, 항상

한 것이 찰라에 생멸변화(生滅變化)한다는 것이다.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하며[生者必滅], 만난 자도 언젠가는 헤어져

야 하는 것[會者定離]이 무상의 원리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생

사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한다고

하여도 인간을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물 또한 무

상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조그마한 돌멩이에 이르기

까지 모든 존재는 생()하고, 잠시 그 수명대로 머물다가[] 형체가 변하

고 달라져서[, ],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바탕이 되고 있는 물질적 요소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석존 당시의 인도 사상계에서는 지()수()화()

()과 같은 요소는 불변적 존재(不變的 存在)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석존은 그것 또한 무상한 것임을 역설하고 계신다. 현대의 자연

과학에서는 원소(元素)나 원자(原子)로 분석되고 원자 또한 파괴되며, 원자

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素粒子)도 불변의 존재는 아니라고 한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 있지만, 에너지가 물질로 변할 수 있고 물질이 에너지로 변

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제행무상의 원리가 아니겠는가.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것으로 믿던 사람의 마음도, 부귀영화도 어느덧 변

하고 마는 것이며, 젊음과 건강을 자랑하던 젊은이도, 뛰어난 미모를 뽐내

던 미인도 무상의 원리 속에 스러져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진정으로 의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이나, 풍성한 낙엽이나, 풍성한 결실을 언제 맺었었느냐는 듯

앙상한 가지만을 남기고 있는 겨울나무를 보며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

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보며 생()의 덧없음을 느끼

고, 역사 속에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부침(浮沈) 속에 지나갔던 많은 사실

을 보며 허망함을 느낀다.

   그러나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철저하게 무상함을 느끼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만큼 우리 마음이 탐욕[]성냄[]어리석음[]으로 오염되

어 있는 것이다.

   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만큼 오히려 사람들은 영원을 착각한다. 백

년, 천 년을 살 것같이 생각하고, 자기의 부귀와 공명(功名)이 영원히 갈 것

으로 본다. 탐욕(貪慾)과 집착(執着), 인색과 교만은 이런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행무상의 도리를 망각하고 헛된 욕심 속

에 잘못된 인생을 살고 있을까. 무상의 원리에서 볼 때, 인생 백 년이 수유

(須臾)에 불과한 것이며, 잠깐 꿈 속을 헤매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불교의 ‘제행무상’은 중생들의 뒤바뀐[轉倒] 착각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값싼 감상주의나 비관적인 인생관이 아니다. 다만 올바른 현실 판

단 위에 바른 인생관을 정립하고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자는 것이

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만법(一切萬法), 다시 말하면 삼라만상 그 모든 것은 그 어떤 것이라

도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곧 나[]라는 자체가 없다는 것

을 말한다. 인간에게는 비록 형태가 있고 느낌생각행동인식 등의 정

신 작용이 있지만 그 중 영원불멸하는 나[]라는 실체가 없음을 뜻한다.

   제법(諸法)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시간적으로 무상한

존재는 다시 공간적으로 볼 때, 그 어떤 상일주재(常一主宰)적 실체(實體)

의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시간적으로 무상하다면,

거기에 불변하는 고정적 실체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여러가지 조건[因緣]

에 의해 성립된 모든 존재는 ‘그것을 있게끔’한 조건들만 제거되면 사라지

는 것으로, 고집하여 말할 수 있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객관적 물질 세계는 지()수()화()풍()의 4원소로 구

성되어 있으며, 인간은 색()수()상()행()식() 즉 물질,

감정, 사상의 개념인 오온(五蘊)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결국 물질의 구성 요소나 인간(人間)의 구성 요소 그 자체도 영원한 것이

아니며, 자아(自我)라는 것도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오온의 일시적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즉 범부(凡夫), 중생(衆生)이 생각하는

‘나라는 개념’ 속에는 진정으로 ‘참된 나[眞我]’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라고 고집하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나누면, 육체적

또는 정신적 요소나 육체적 정신의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것은 모

두 지극히 무상(無常)한 것이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나’라고 하

는 것이 곧 괴로움의 씨앗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상하며 괴롭다. 또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고 참다운 ‘나’ 자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모

든 거짓과 나에 대한 집착과 소유에서 떠날 때 참된 나의 존재는 찬란히 빛

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거짓된 나를 참된 나로 착각하고 고집하는 데서 아집(

) 아만(我慢)과 아욕(我欲)이 생겨서 번뇌와 고통 속에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법무아는 모든 법이 나[]라고 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결론

이다.

   모든 법,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을뿐, 그 어떤 것도 고정 불변의 나

[]라는 것이 아니라는 원리이다. 모든 사람과 사물이 어우러져 더불어 사

는 삼라만상의 도리를 깨닫게 [諸法無我] 되면 인류 세계의 화합과 평화도

앞당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인생은 고()다. 생사와 근심슬픔불행번민은 괴로움

[]이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것

도 고이다. 욕심나는 것을 얻지 못함도 고다. 결국 인생의 밑바닥은 고를 근

저로 하고 있다. 즉 무상한 것이 인생이며, 무상한 것은 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단안은 제행무상의 판단 위에 저절로 이

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존께서는 『아함경』의 도처에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라 강조하고 계신다.


   고()에는 그것 자체가 괴로움인 조건에서 생겨난 감각적인 괴로움인

‘고고(苦苦)’가 있고, 무상한 개체(個體)를 유지하고 존속시키기 위해 애쓰

는 데서 생기는 ‘행고(行苦)’가 있으며,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사랑하고 애착하는 것이 파괴될 때 느끼는 괴로움인 ‘괴고(壞苦)’가 있다.

이것을 세 가지 괴로움의 모습이라 한다.

   이러한 고는 모두 주관적인 것이며 우리의 주관적 감정이 무상한 객관성

을 무시하고 상주(常住)하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상주하여 주기를 원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주관적 욕망이 원인이 되어 애착심이 생기고,

이 애착심이 많아지면 취()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 고를 느끼게 한다

는 것이다.



   열반적정(涅槃寂靜)


   열반적정은 나고 죽고 하는 고통을 벗어난 이상경(理想境), 곧 불생불멸

의 법을 체득한 경지, 다시 말하면 괴로움을 떠난 이상으로서의 즐거움을

나타낸다. 제행무상을 깨닫고 제법무아의 존재를 앎으로써 그것을 모두 초

월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열반적정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두 가지 원리를 적용하여

현실을 현실대로 깨닫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원리이다.


   수행을 통해 도달한 궁극적 경지를 불교에서는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말

로 부른다. 해탈(解脫)은 묶음[結縛]이나 막힘[障碍]으로부터 벗어난 해방

·자유 등을 의미한다.

   열반(涅槃)은 ‘불어 끈다[吹滅]’는 뜻으로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

요한 상태, 모든 번뇌와 욕망 대립과 고통이 사라진 고요한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 또한 열반이란 소위 삼독심(三毒心)이라고 하는 탐()진()치

()가 영원히 끊어진 상태로 생사의 구속을 벗어난 해탈의 경계이다.


   해탈에는 혜 해탈(慧 解脫)과 심 해탈(心 解脫)의 두 가지가 있다. 혜해탈

(慧解脫)은 오온(五蘊自我의 구성 요소)이나 12연기의 도리를 깊이 연구

하여, 그러한 것들에 실체가 본래 없다는 것을 앎으로써 지적(知的)으로 해

탈하는 것을 뜻하며, 연기한 것이 무아(無我)라는 것을 직관하여 아는[

] 것만으로는 마음의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므로 정정(正定)을 통

해 마음에서 그것을 완전히 없앨 때 심해탈(心解脫)이 얻어지는 것이다. 열

반은 이러한 두 가지 해탈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모든 악이 없어지면 일체는 선()이 되고 모든 삿됨[]을 깨뜨리면 일

체는 정()이 된다.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였던 일체는 탐치 삼독의

뿌리가 뽑히고 무명(無明)의 구름이 걷히는 순간, 곧바로 상()락()

아()정()의 세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열반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의

전개, 생명의 약동을 의미한다.


   삼법인은 이와 같이 불교의 근본 교의를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등 셋으로 나누어 그 실천성을 유도하고 있다. 그것은 영원한 기쁨인 열반

의 즐거움을 얻기 위한 불교의 목적이다. 불교가 목적으로 하는 바가 형이

상학의 탐구보다는 현실적 고통에 그 해결을 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삼법인은 불교가 가르치는 진리를 세 가지 표지로써 구체적으

로 나타내어 불교 전체를 제시한다는 뜻이다. 제행무상으로는 현상계의 모

든 것이 생멸변화한다는 것을 알고 제법무아로 만유 모든 존재의 진상을 파

악, 그 기준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불자들은 삼법인의 가르침을 자신의 생활 속에 구현하여 최

상의 평화와 자유인 열반을 향해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