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관(無我觀)'/ 숭산 스님
부처님이 설하신소승불교의 세 가지 기본통찰은
1.무상관(無常觀) 2.무아관(無我觀) 3.부정관(不淨觀)이다.
'무아관(無我觀)' 은 내가 없다는 깨달음이다.
우리는 항상 '나' 만을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좋아, 나는 저 사람이 싫어,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 그러나
본래 이 '나' 라는 것은 없다.
'나' 라는 것 역시'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나' 라고하는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 했다.
그의 말을 뒤집어보자. 자 그렇다면
생각을 완전히 끊으면 '나' 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무아관 수행은 우리 마음을
아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 생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은 단지 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습관, 버릇의 결합일 뿐이다.
'나' 라는 것은 생각· 감정· 인식· 충동· 의식들이
끊임없이 서로 반응해서 일시적으로 모인 결과이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오온이라고 한다.
다섯개가 뭉친 무더기라는 뜻이다.
당신은 어떻게 이 세상에 나왔는가?
당신 스스로 결정한 것인가?
내 얼굴, 내 부모, 내 나라 이 모든 것은
내가 스스로 택한 것인가?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진정 이 같은 물음에 답을 찾고 싶다면,
이 고해의 세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참선수행하라.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고통스런 상황을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아니,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왔는지 모르며,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아마 대부분은 돈이나 명예,
사회적지위나 인정 등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단지 사회적 상황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나온 '생각' 들일 뿐이다.
내 주변에 아주 훌륭한 교육을 받고
바쁘게 사시는 스님이 한 분 계셨다.
그는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 많은 절을 세우기도 했다.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큰 소망이 있었다.
" 크고 아름다운 절을 짓고 불교대학을 짓는 일도
좋지만 수행하는 일만이 우리 자신을 찾게 해줍니다.
수행하셔야 합니다." 고 말했다.
그러면 그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 예, 예, 일이 끝나는 대로 참선 수행할 겁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지 한 달뒤
그는 뇌졸중으로 입원해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박사학위?
불교대학?
훌륭한 절?
이 모든 것들이 정녕
우리의 삶을 고해에서 건져준다는 것인가?
이 짧은 인생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죽으면 무엇을 가져갈 수 있는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空手來空手去)'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기독교 속담에는
'수의(壽衣) 에는 주머니가 없다!' 는 말도 있다.
이 세상에 나서 무엇을 얼마나 성취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이 몸조차 가져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극도의
허무주의자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삶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그렇다면
자살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이 아니다.
내 말의 진정한 뜻은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온
의미나 이유 혹은 선택이란 것들은 결국
이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보탬이 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이유이다.
이것을 얻으려면 우선 참선수행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무아관이다.
흔히 '나' 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 나' 란 어디에 있는가? 얼마나 큰가?
어떻게 생겼나? 무슨 색깔인가?
어디에 놓고 다니는가?
우리 내면을 깊이 바라본다면
실제'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깨달음이 바로 소승불교의 목적인
'열반' 을 의미한다.
완벽한 정적과 소멸의 상태이다.
마음과 마음이 만드는 고통이 완벽하게
공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기쁨을 얻게 된다.
그 경지에서는 오고 가는 것도 없고,
삶도 죽음도 없으며, 행복도 슬픔도 없다.
이것이 무아관(無我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