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찾아 가는 길

금산사 미리 공부하기

難勝 2009. 7. 19. 06:01

9월 포교사단 팔재계 수계법회 예정 사찰인 전북 김제 모악산 금산사를 미리 공부해 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1635년에 기록된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백제 법왕 2)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1492년에 씌어진 〈금산사5층석탑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인 가섭불 때의 절터를 중흥한 것이라 하여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금산사는 신라 경덕왕 때인 762년에서 766년 사이에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중창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로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진표 이후에 후백제 견훤에 의해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고려초 1079년에 법상종의 대종사(大宗師)인 혜덕(慧德)왕사가 주지로 부임해 간경·법석(法席)을 주관하는 장소인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는 등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도량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석연대(石蓮臺)·5층석탑·노주(露柱) 등이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암자와 건물 40여 채가 불타버렸으나 1601년(선조 34) 수문대사(守文大師)가 재건을 시작하여 1635년 완공했다. 조선 고종 때 미륵전(彌勒殿)·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고 1934년 대적광전·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6년 다시 화재로 대적광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지금 절에 남아 있는 유물·유적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조형물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중요 석조유물은 노주(보물 제22호)·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 보물 제24호)·5층석탑(보물 제25호)·석종(石鐘 : 보물 제26호)·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28호) 등이 있다. 또한 미륵전(국보 제62호)·대적광전이 있었고, 그밖에 대장전·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일주문·금강문·보제루(普濟樓)·종각·중향각·칠성각 등의 건물과 수계(受戒)의식을 행하는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자리잡고 있다.

금산사 창건이야기

 

백제 진표율사는 미륵존불로부터 당시 금산사내에 있는“사답(寺沓) 칠두락(七斗落)” 정도 넓이의 연못인 용추못(龍沼)을 메우고 미륵존불 모양의 불상을 세우라고 계시를 받는다. 그런데 불상을 세우기 위해 처음(762년 건립시작)에는 흙으로 못을 메웠는데, 이튿날 보면 다 파헤쳐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 때 지장보살이 나타나서 숯(목탄)으로 메우라고 일러준다. 이에 진표율사는 도력(道力)을 써서 안질을 퍼뜨린 후 `누구든지 안질을 앓는 자는 금산사 용소에 숯을 한 짐 집어넣고 못물로 눈을 닦으면 낳는다.'는 소문을 낸다.
안질에 걸린 수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숯을 집어넣으니 그제야 연못은 메워지게 되었다.
 

진표율사는 연못이 숯으로 메워지자 미륵불상을 받쳐 세우기 위해 연못 한 가운데에다 연꽃모양을 조각한 큰 바위 (석조 연화대 또는 석련대, 현재 보물 23호)를 세웠으나, 무슨 조화에서인지 석련대(石蓮臺)는 밤 사이에 20여 미터나 떨어진 위치 (현재 석련대가 있는 위치)로 옮겨져 버린다.


이 때 미륵이 꿈에 현몽하여 “야! 이 미련한 놈아. 돌이란 직접 불에 들어가면 튀는 법이니라”고 계시한다.

이에 다시 진표율사는 연못 중앙에다 밑이 없는 대형 무쇠시루(甑 증)를 걸고 그 위에다 우물 정(井)자 형태의 나무 받침목을 얹은 다음 철로 된 미륵불상을 세우게 된다(4년에 걸쳐 766년 완공목을 얹은 다음 철로 된 미륵불상을 세우게 된다(4년에 걸쳐 766년 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