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고려의 장례풍습 고려장의 바른 이해

難勝 2009. 8. 19. 04:41

고려의 장례풍습 고려장

 


고려 사회에서는 매장 (埋葬)과 화장 (火葬)이 시체 처리 방식이 널리 이용되고

가난한 사람중에는 간혹 풍장 (風葬)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장법 (葬法)은 국왕 관리 일반인등 사회계층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데 관리부터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묘지 (墓誌)에 의하면 이시기에 지배층은 화장을 많이 했음을 알수있다.


화장은 불교용어로 다비(茶毘)라고 하는데 사찰 근처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을 거둬 사찰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며 어느 시일이 지나면 유골을 묻었다.

유골은 대개 석관(石棺)을 사용 했는데 일미터 미만의 작은판석 육매를 조립하여 만들었다.


일반 서민의 경우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관도없는 구덩이를 파서 매장을 하였거나, 사체를 땅에 두고 그 위에 풀을 덮어 인적이 없는 산야에 방치해 두는 풍장이 간혹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화장을 한 후에 재를 산이나 강물에 뿌리는 방법도 있다고 전한다.


국왕의 경우는 매장을 하여 성대한 분묘를 만들었다.

왕의 시신이 담긴 관을 재궁(梓宮)이라고 하며 재궁이 묻힌곳을 능(陵)이라 부른다.

장례기간은 삼년상의 변형인 이일역월(以日易月), 즉 이십칠개월의 상례 기간을 이십칠일로 바꾸어 장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것은 국왕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고려 시기에도 유교식 상례 절차로 상복 착용 기간을 규정한 오복제도 (五服制度)가 있었다.

원래는 부모상을 당하면 관리는 관직을 그만두고 삼년상을 집행 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부모상의 경우 각각 백일을 휴가로 주고 일주기와 이주기에 칠일의 휴가를 주어 약식으로 삼년상을 마칠수 있도록 배려 하였다.

관료의 백일상은 재야의 사족들이나 서민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고려 후기까지 백일상이 일반화 된듯 하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장례 의식은 고려말 성리학이 수용되고 주자 가례가 보급 되면서, 조선시대로 들어와 서서히 유교식 상례로 변모하게 되고 결국 유교식 상례는 우리의 전통 상례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고려장이 없어지게 된 내력을 알려주는 이야기는 두가지가 구전되고 있다.


하나는 중국에서 낸 문제를 숨겨놓은 늙은 아버지의 힘을빌어 해결하고 고려장을 폐지하게 되었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늙은 아비를 산채로 져다버린 아버지가 내다버린 지개를 아들이 후일 다시 쓰기위해 가져 옴으로서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불효를 깨우치게 했다는 이야기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이야기로,

앞의 이야기는 불교 경전인 잡보장경(雜寶葬經)의 기로국연(棄老國緣)조의 설화와 유사하고,

뒤의 이야기는 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이야기와 유사하다.


효자전에 나오는 원곡을 살펴보면,

원곡이란 사람에게는 늙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원곡의 아버지는 횡설수설 하는 할아버지를 싫어하여 갖다 버리려고 생각 하였다.

십오세된 원곡은 울면서 말렸으나 아버지는 듣지 않고 여(輿)를 만들어 갖다 버렸다.

원곡이 따라가 여를 거두어오니 아버지가 이처럼 흉한것을 무엇에 쓰려 하느냐 하고 물으매, 곡이 말하기를 다음에 아버지가 늙으면 다시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 하였다.

이에 아버지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깨달아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모시고 왔고, 이후 잘 봉양 하여 마침내 효자가 되었다 라고 기록에 적혀있다.


위의 원곡 이야기는 노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는 점에서 효의 윤리를 확산시킬 목적으로 수용 되었다고 보여지며......


기로국 이야기는,

불경이 우리나라에 수용 확산 되면서 불경에 있는 천신 (天神)은 임금으로, 중국의

기로국은 고려국으로, 기로의 풍습은 고려장 (高麗葬)으로 변용되어 고려시기에 실제로 존재한 풍속처럼 믿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야기는 몽고의 민담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방 곳곳에 고려장터로 알려진 무덤들은 무엇일까.

고고학계 발굴 결과로는 고려장과 무관한 석관묘 (石棺墓)나 석실분 (石室墳)으로 판명됐다.


이와같이 고려장은 고려의 장례의 풍속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일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어 불효가 판치는 세태를 비판하는 신문 기사나 텔레비젼으로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고려시기는 불효죄를 엄격하게 처벌 하였다.

(고려사)에는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 있는데 아들과 손자가 재산을 달리하고 공양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징역 이년에 처한다고 하였다.


또한 국왕이 효행이 있는 사람과 팔십 이상된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선물을 주는 기록도 자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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