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가루라왕긴나라 - 불목하니 긴나라

難勝 2009. 8. 28. 03:54

곤봉의 달인 긴나라화상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무리가 소림사에 닥쳤습니다. 소림사가 어떤 곳입니까.

天下武術出少林(천하무술이 소림에서 나왔다). 이 한마디면 족하겠지요.

또한 소림 담장 안에는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아 감히 속인들이 넘볼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륙을 붉은 먼지와 피로 뒤덮은 홍건적의 떼법(인해전술)에는 천하의 소림승들도 어찌할 수 없었나 봅니다. 메뚜기떼처럼 밀려드는 도적들의 기세에 눌려 절의 무승들이 당해내지를 못하고 죽거나 상하는 자가 여럿 나왔습니다. 자칫하다간 천년 고찰의 본당까지 도적의 진흙발에 유린당할 절체절명의 순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홀연히 등장한 한 화상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절 부엌에서 물을 긷고 나무를 해서 밥을 짓는 불목하니였습니다. 쑥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등을 드러낸 남루한 모양새. 평소 말이 없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지라 동료들에게 멸시에 가까운 대접을 받던 그였습니다. 이름조차 아무도 몰랐지요. 그런 그가 밥을 지을 때 불쏘시개로 사용하는 화곤(火棍)을 떡 하니 들고는 난폭한 도적떼 앞에 선 것입니다. 


하하하. 모두가 웃었습니다. 도적도 웃고 절의 중들도 웃었습니다. 도적들은 ‘웬 미친 중이냐’고 황당해서 웃었고, 중들은 ‘저 놈이 드디어 미쳤구나’하고 헛웃었습니다. 


그러나 웬걸요. 막상 싸움이 시작되자 불목하니는 화곤, 즉 곤봉을 휘두르며 물밀 듯이 밀려드는 도적들을 무서운 기세로 제압합니다. 찌르고 치고 때리고 누르고 휘두르고... 짧고 길어지는 곤의 변화는 끊임이 없습니다. 마치 제천대성 손오공이 동해용왕의 보물 여의봉을 휘두르는 듯이 말입니다. 한번 곤이 지나 간 자리마다 도적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뒹굽니다. 화염처럼 치솟는 화상의 무서운 기세에 흉포하기 그지없던 도적들도 그만 기세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노략질도 좋지만 어디 목숨만 하겠습니까. 다들 줄행랑을 놓았지요.  


절 부엌의 이름없는 무명화상이 천하 고수일 줄이야. 역시 소림사는 명불허전입니다. 소림의 승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해, 혹은 힘자랑하기 위해 무예를 연마한 것은 아니지요. 소림의 승들은 어디까지나 수양을 하고 득도를 하기 위해 출가한 이들입니다. 이들에게 무술은 단지 수양의 방편이지, 결코 무술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남이 알아주던 말던 묵묵히 무예를 연마했으며, 또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도를 닦는 데 전념한 것입니다. 불목하니도 마찬가지였겠죠. 자신의 기예를 드러내지도 않고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고수일뿐더러 수양이 지극히 높은 선승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자신의 상(像)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선승의 첫째 조건이니까요. 


지어낸 이야기냐고요. 아닙니다. 소림사의 역사에 나오는 긴나라화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때부터 긴나라는 소림사의 호법신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우리가 홍콩 영화를 통해 친숙한 소림사 주방장의 전설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죠. 또한 명말청초의 유명한 장군인 정종유는 자신의 저서 ‘소림곤법천종’에서 긴나라를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얘기하고 있답니다.


아, 그리고 긴나라는 절의 수호신인 천룡팔부(天龍八部)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 그림은 소림곤법천종에 나오는 숭산을 밟고 있는 긴나라의 위풍당당한 모습. 긴 곤봉을 들고서는 무수히 밀려드는 창칼의 군대를 대적하고 있군요. 긴나라의 뒤에 있는 절이 소림사이고요, 관음보살님도 보이네요.


곤봉을 움켜쥔 긴나라의 두 손의 모양을 유심히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