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善德女王, ?~647]
성 김(金), 휘(諱) 덕만(德曼), 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시호는 선덕이다. 진평왕(眞平王)의 맏딸.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 진평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들의 옹립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634년(선덕여왕 3)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 635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책봉되었다.
638년 10월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오자 11월에 이를 격퇴하였으며, 642년에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다. 이어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아 나당(羅唐)의 통로를 끊어버리자 여왕은 이 사실을 당나라에 호소하였으며 이어서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3년에 다시 고구려 ·백제의 침입을 당나라에 호소하고 원군을 간청하였으며 이듬해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645년에 당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하자 원군을 보냈으나 다시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으며, 647년에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모반하였으나 곧 진압했지만 이 해에 여왕은 신병으로 죽어, 유언에 의해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였다.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였으며, 첨성대(瞻星臺) ·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선덕여왕의 3가지 일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선덕여왕 지기삼사(善德女王知幾三事)〉조에는 신라의 제27대 선덕여왕이 앞일을 예지하는 신통력을 발휘한 세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첫번째 이야기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날 여왕에게 당나라 태종(太宗)이 진홍·자색·백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그 씨앗 3되를 보내왔다. 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씨앗을 뜰에 심게 했다. 과연 꽃이 피어서 질 때까지 향기가 나지 않아 여왕의 예언이 들어맞았다고 한다.
두번째 이야기는 개구리 울음을 듣고 전쟁의 조짐을 미리 알아차린 일화이다. 636년(선덕여왕 5) 겨울, 궁성 서쪽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많은 개구리가 모여들어 삼사일을 계속 울어대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여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여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정병 2,000명을 데리고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女根谷)을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매복해 있을 것이라며 쳐부술 것을 명했다. 각간 등이 군사를 이끌고 그곳에 가보니 부산(富山) 밑에 여근곡이란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 500명의 백제군이 숨어 있었다. 이에 이들을 모두 죽이고 남산에 숨어 있던 백제 장군 우소와 백제의 후원군까지도 모조리 쏘아 죽였다고 한다.
세번째 이야기는 여왕이 자신의 죽을 날을 예언한 일화이다. 어느날 여왕은 신하들에게 "내가 아무해 아무달 아무날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에 장사하라."고 일렀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지 몰라 물으니 낭산(狼山)의 남쪽이라고 했다. 여왕의 말처럼 그달 그날에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낭산의 남쪽 양지쪽에 장례했다. 그 후 10여년 뒤에 문무왕(文武王)이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선덕여왕은 자신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라는 절이 창건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어떻게 모란꽃과 개구리의 일을 알았는지 묻자, 여왕은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는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군사의 형상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경인데, 여자는 음(陰)이며 그 빛이 희니 흰색은 서쪽을 상징한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음을 알았고, 남근(男根)이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위의 세 가지 일화 중 '향기 없는 모란꽃'과 '개구리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한다. 다만, 모란꽃 이야기는 선덕여왕이 공주이던 시절에 아버지인 진평왕에게 말했던 것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개구리 이야기는 선덕왕 5년(636)에 여근곡이 아닌 옥문곡(玉門谷)에서 백제군사 500명을 섬멸한 것으로 적혀 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신라의 여왕제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겨 신라사람들에게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명을 보내주어 신라왕으로 삼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으며 신라 내에서도 여왕제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위의 이야기처럼 선덕여왕이 예지력을 갖춘 비범한 인물임을 강조함으로써 논란을 종식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사람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덕여왕 (0) | 2009.09.29 |
---|---|
성묘(省墓) (0) | 2009.09.28 |
국군의 날의 의미와 올해의 행사 (0) | 2009.09.27 |
역사 속의 음식 이야기 (0) | 2009.09.27 |
주막 이야기 (0) | 2009.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