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뒷간귀신 - 우리나라 토종귀신

難勝 2009. 10. 5. 04:39

우리나라 토종귀신 중 뒷간귀신

 

형태 

- 뒷간 귀신은 대체로 젊은 여성신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인데, 치렁치렁한 긴 산발로 얼굴을 가리고 미인이 아니라 지저분하고 마녀의 이미지를 지닌 여성신이다. - 장난기와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엿보이며 길고 마른 팔, 가느다란 손목, 긴 손톱의 지저분한 손을 지녔으며 그 손으로 뒷간 일을 보는 사람들의 몸을 만지는 장난을 한다. - 처녀귀신처럼 한복을 입고 맨발을 하고 있으나 흰 한복은 더러운 변소 간에 있으므로 깨끗하지는 못하며 얼룩이 져 있다. - 악신이기 때문에 해를 끼치는 데 빈 뒷간에 있다 갑자기 들어오는 사람에 놀라면 그 사람을 놀래키며 복수한다. 이에 노여움을 잘 타고 포악한 성격을 나타낸다. - 이 귀신은 매달 6일, 16일, 26일에 변소에 와 머물면서 자기의 쉰 다섯 자나 되는 긴 머리카락을 발가락에 걸고 세는 것이 일과로, 긴 머리를 변소에 늘어뜨려 놓고 머리카락 세는 데 홀로 열중하고 있다. 키득키득 웃는 웃음소리와 괴상한 숫자놀음이 변소간에 울려 음산하고 공포스런 분위기를 만든다. - 이에 사람이 변소에 올 때 기척을 하지 않고 문을 갑자기 열면, 머리카락을 세는 데 열중하고 있던 귀신이 놀라 긴 머리카락으로 사람의 머리를 덮쳐 변소에 빠뜨린다 한다.


특징

- 변소를 관장하는 신으로 악신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 변소에 빠진 사람은 며칠 안에 죽게 되거나 재액을 얻게 된다. 똥떡을 만들어 변소 앞에 가서 비손하고, 그 떡을 먹으면 재액이 소멸된다고 한다. - 가신(家神)의 하나로 측간을 관장하는 신으로 변소에서 병을 얻거나 사고가 나는 것은 바로 이 신의 소행이라고 믿어진다. - 늘 뒷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6'이 든 날짜, 매월 6일·16일·26일 등 6자가 든 날에 한해서만 있고, 그 외의 날에는 외출해서 없는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6자가 든 날에는 그날 변소 가는 것을 되도록 피해 왔다. - 이러한 관념은 어두운 밤 멀리 떨어져 있는 변소가 공포의 대상이 된 것에서 생겼을 것이다. 또 측신이 놀라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한국의 재래식 변소를 갈 때 지켜야 하는 인기척을 유도하려는 방편에서 생긴 설화로 보인다. - 제의는 정초에 지신밟기를 할 때 제물을 바치고, 그 외에 뒷간에서 아이들이 신발을 빠뜨리거나 사람이 빠졌을 때는 측신이 노해 탈이 생긴다는 징조이므로 시월 상달의 고사 때 반드시 고사떡과 메를 바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제의를 갖지 않는다. - 강원도에서는 변소를 지으면 길일을 택해 주부가 변소 앞에 제물을 간단히 진설하고 촛불을 켠 뒤 ""변소에서 대소변을 볼 때 탈이 없게 해 주소서.""하고 비손한다. - 안동 지방의 뒷간신의 신격(神格)은 여성 뿐 만이 아니라 남성의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출몰지역

전국적이다. 민간에서 전래되어온 토종 귀신이다.


배경설화

제주도 무가 중 <문전본풀이> (1) 줄거리 우리나라에 있어서 측간귀신의 내력 이야기는 제주도의 심방들 사이에서 불려지고 있는 제주도 무가 중 <문전본풀이>에 그 유래가 나타난다. 집안의 각철로 관장하고 있는 신들의 형성유래담인 이 신화에 의하면, 노일제대귀의 딸은 남(南)선비의 첩이다. 그가 본부인을 죽이고 그의 일곱 아들까지 죽이려다 흉계가 드러나 전처소생의 아들에게 쫓겨 측간으로 도망가 55자나 되는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목을 매어 죽어 변소귀신이 되었다 한다. <문전본풀이> 중 측간부인 설화 본문 「옛날에 남선 고을의 남선비는 여산 고을의 여산 부인과 부부가 되어 아들 7형제를 두었다. 아들이 많아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배를 마련하여 쌀장사를 하기 위해 오동 나라 오동 고을을 찾아갔다. 거기에는 노일제대귀일의 딸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간악하기로 소문난 그녀는 남선비를 집으로 불러들여 내기 장기를 두어, 남선비의 배와 곡식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오갈데 없이 가련한 신세가 된 그는 노일제대귀일의 딸을 첩으로 삼아, 그녀의 집에서 끼니를 얻어먹게 되었다. 간악한 첩이 남편을 잘 모실 리가 없었다. 그녀가 끓여다 주는 겨죽으로 몇 해를 연명하는 사이에 남선비는 눈까지 어두워졌다. 한편, 여산 부인은 3년 동안을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아들네가 준비해준 배를 타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오동 고을에 닿은 그녀는 남편의 개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를 찾아갔다. 하지만 눈이 어두운 남편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녀가 밥을 해 올리자, 남선비는 그녀가 자기 부인이라는 것을 알고 만단 정화를 나누었다. 그 때에 집에 돌아온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여산 부인에게 예까지 오느라고 고생을 했다고 하면서 목욕을 가자고 권하였다. 그 말을 순진하게 받아들인 여산 부인은 귀일의 딸 뒤를 따라 주천강 연못가로 목욕을 나갔다. 귀일의 딸은 등을 밀어주는 체하다가 여산 부인을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여산 부인의 옷을 벗겨서 입고는 남선비에게 돌아가 큰 부인 행세를 하면서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행세가 나빠 주천강 연못가에 데리고 가 죽였다.”고 하였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남선비는 자기 원수를 갚아주었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남선 고을을 향해 떠났다. 부모가 돌아올 것을 예상한 아들 일곱 형제는 선창가로 마중을 나갔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기들 어머니가 아닌 것 같아, 집에 돌아가는 길을 아는 지와 밥상을 차리는 것을 보기로 하였다. 과연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자기들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 날부터 일곱 형제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이 사실을 안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꾀병을 부리며 일곱 형제의 생간을 먹어야 하겠다고 하였다. 막내 동생 녹디성인은 청태산 마구 할망의 도움을 받아 산돼지의 간을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서 형들의 간이라고 하였다. 귀일의 딸은 여섯 개의 간을 먹는 체하며 자리 밑에 묻어두고 피만 입에 바르는 척 마는 척하였다. 녹디성인은 귀일의 딸 머리채를 잡아 엎질렀다. 그러고는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형들을 불렀다. 형들이 동서에서 달려들자, 귀일의 딸은 도망을 치다가 막대기에 목이 걸려 죽었다. 그래서 주목지신(株木之神)·정살지신이 되었다.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변소로 도망을 쳐서 목을 매어 죽었다. 변소의 신인 측도부인(厠道婦人)이 된 것이다. 일곱 형제가 달려들어 죽은 위에 다시 복수를 하려고 두 다리를 찢어발겨 드딜팡(용변을 볼 때에 디디고 앉는 납작한 돌)을 마련하고, 대가리는 끊어 돝도고리(돼지먹이통)를 마련하였다. 머리털은 끊어 던지니 바다에 가 해초가 되었고, 입을 끊어 던지니 바다의 솔치가 되었다. 또 손톱·발톱은 쇠굼벗·돌굼벗(딱지 조개의 일종)이 되고, 배꼽은 굼벵이가 되었으며, 항문은 대전복·소전복이 되었다. 그리고 육신은 빻아서 바람에 날리니 각다귀·모기가 되었다. 일곱 형제는 황세곤간이 관리하고 있는 서천꽃밭으로 가서 도환생꽃을 얻어와 오동 나라 오동 고을의 주천강 연못가로 달려갔다. 하느님께 축수를 드려 연못물을 마르게 한 다음, 뼈만 남은 시체에 도환생꽃을 올려놓고 금붕체로 후리쳤다. 그렇게 하여 어머니를 살려내어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춘하추동 사시절을 물속에서 지냈으니 몸인들 안 추울 리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루 세 번 더운 불을 쬐면서 조왕할망으로 앉아 얻어먹기 마련하십시오.”라고하면서 조왕신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일곱 형제는 제각기 자기의 직분을 차지하여 신들이 되었다.」


기타

- 위 설화에 의하면 본부인 조왕(부엌을 관장하는 신)과 시앗인 측도부인은 원수간이라 하여 부엌과 측간은 멀리 짓고, 측간의 돌멩이 하나, 나무 하나라도 부엌으로 가져오지 않으며, 부엌의 물건 역시 측간에 가져가지 않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 그 밖의 지역에서 측신의 유래에 관한자료는 거의 보이지 않고 ‘성주신(城主神, 城造神) 밑에서 형벌을 집행하는 신’이라고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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